만지고 싶은, 혹은 만지기 싫은, 몸의 기억들

여상희 회화展   2006_0803 ▶︎ 2006_0816

여상희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2006

초대일시_2006_0803_목요일_06:00pm

롯데갤러리 대전점 창작지원

롯데갤러리 대전점 대전시 서구 괴정동 423-1번지 롯데백화점 8층 Tel. 042_601_2827

만지고 싶은, 혹은 만지기 싫은, 몸의 기억들 ● 여상희의 작품은 더운 김을 뿜는다.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자랄 때 발생하는 열과도 같은 온기가 그의 작품에 있다. 그것은 자연물 중의 어떤 것을 선택해도 그의 손길을 거치면 꿈틀거리는 이종의 생명체처럼 변형되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집착해 마지않는 주황색(어떤 지점에서는 더 붉고 어떤 지점에서는 더 노랗지만, 통칭 주황색이라 부를 수 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탐스럽고 만지고 싶게" 보이고 싶다는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주황색은 벌겋게 달아오른 살덩이의 긴장, 혹은 기형의 형태를 낳는 비정상조직의 불안감을 내재하고 있다.

여상희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45.6×221cm_2006
여상희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12.5×145cm_2006

기실 그가 선택하는 소재들, 이를테면 맨드라미나 조개껍질, 버섯, 마카로니, 건빵과 같은 것들은 뜨거운 생명감이 느껴지는 것들이 아니며, 또한 그들 사이의 어떤 공통점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여상희의 눈에 들어 그의 붓끝으로 재현되면, 그 모든 것들은 공통된 어떤 특성이 덧씌워진다. 맨드라미는 동물의 구불구불한 창자처럼, 마카로니는 짓눌린 살이나 기형으로 자라는 세포와도 같이, 건빵이나 쿠키의 구멍은 인간 신체의 어느 부위인 것처럼, 기묘한 동물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그 동물성은 첫 눈에는 상투적으로, 그리고 쉽사리 성적인 것으로 읽힌다. 특히 입체로 만들어진 버섯이나 요철이 강조되어 보이는 어떤 작품들은 다소 진부한 성적인 상징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가 줄기차게 놓치지 않고 있는 지점은 생명이 자라나는 과정의 규칙과 일탈, 그 아름답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한 세계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생물의 기본 리듬인 세포의 분열과 증식, 그 되풀이되는 결과로 드러나는 특정 형태, 그것의 기저에 흐르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욕망 구조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사물을 끊임없이 과장하고 변형하고 사랑하고 학대하게 한다.

여상희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30×161.5cm_2006
여상희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30×96.5cm_2006

반복되는 구조들을 주된 모티프로 사용한다거나, 사물간의 구조적 상사(相似)를 강조하는 가운데, 그의 작품들이 밀도를 얻는 지점은 촉각성이다. 그것은 그가 사물을 변형하는 방식과도 연관된 것인데, 그의 화면 속에서 기존의 사물들은 조금 더 매끈매끈하고 미끌미끌해진다. 맨드라미꽃이든 무엇이든 불길한 생명의 증식처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은, 그의 붓끝을 통해 부여되는 번들거리는 표면 때문이다. 번들거리는 촉각의 기억은 관객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주제화되거나 의식화되지 않은 채로, 어떤 불분명한, 하지만 결코 상쾌하거나 산뜻하지 않은, 어둡고 축축하고 물컹거리는 연상 작용을 강요한다. 그 촉각적인 것의 재현에 매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색채 감각이다. 번들거리는 주황은, 번들거리는 그 어떤 색보다 생체(生體)에 대한 연상과 쉽게 결합하는 것이다. 그의 주황은 이제 조금 변주의 길을 가는 듯도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 가운데 하나이다. 기실 셀 수도 없는 세상의 모든 색들을 선택할 수 있는 무한대의 자유를 보류하고 색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작가 자신이 고백하는 바, 의식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기호(嗜好)의 차원인 듯하다.

여상희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96.5×130cm_2006
여상희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30×96.5cm_2006

작가의 기호에 대한 왜, 라는 질문은 관객 각자가 스스로의 마음으로 돌려야 할 것인데, 작가의 의도와 관객의 감상이 충돌하는 지점은 언제나 재미있다. 작품은 작가와 관객 사이의 그 무엇으로, 작가가 의도하는 방향과 관객의 기대는 쉽게 뜻하지 않은 지점에서 어긋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한다. 관람자의 시선은, 그가 그려내는 것들을 스물스물 증식하는 생명의 상징으로 볼 수도, 극도로 여성적인 사물의 체험으로, 혹은 야비하고 공포스러운 혼란으로, 그도 아니면 세상의 미시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과 해석에 척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지만, 그의 작품의 근간이 몸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정도의 범주 설정은, 이제 2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는 그의 작품의 수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이윤희

Vol.20060804d | 여상희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