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적 물성탐구

서길종 판화展   2006_0816 ▶︎ 2006_0822

서길종_자아의 창문(조용한 외침)_부식, 애쿼틴트 판화_120×150cm_2006

초대일시_2006_0816_수요일_05: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02_734_1333

흙벽에 투사된 한국인의 생활사와 보편정서 ● 서길종이 제작한 일련의 판화들은 오랜 시간 풍화되어 그 표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골격이 드러나 보이는 옛 가옥의 흙벽을 상기시킨다. 이를 곧이곧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흙벽에서 유래하는 특유의 분위기를 암시하며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굳이 흙벽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묘사와 질감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은 단순히 흙벽 자체를 겨냥한 재현의지의 소산이 아닌 것이다. 대신 작가의 감각 레이더는 흙벽으로서의 감각적 표면을 지나, 그 이면에 놓여진 정서를 겨냥한다. 그리고 이때의 정서는 기본적으론 작가의 개인사와 유년기에 연유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한국 사람이면 누구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정서에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 부분적으로 뜯겨져나간 벽지 뒤쪽으로 얼기설기 그 형체를 드러낸 흙벽의 골격이나, 그 틈새를 비집고 들이치는 겨울바람의 추억은 한국의 소시민들에게는 일종의 원형으로 남아있다. 장마철이면 눅눅한 습기로 인해 마치 물에 흠뻑 젖은 골방에 누워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나, 한겨울에 골방에 누워 벽면에 그려진 우연한 비정형의 얼룩을 보며 머리 속에 온갖 그림을 떠올려보곤 했던 기억은 정서를 낳고, 원형으로 부풀려지며, 무의식으로 남겨진다. 골방 그 자체가 상상력이 그려낸 이미지의 장이었고, 사유의 장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신문지로 도배한 골방은 그 자체 시사를 위한 장으로서도 손색이 없었으며, 나아가 인쇄된 여배우의 사진이 핀업걸을 대신하기조차 했다. 작가가 가시화한 흙벽은 이처럼 골방의 추억을 환기시키며, 한국 근대사를 살아낸 소시민의 정서와 원형을, 그리고 무의식의 지층을 주지시킨다. 실로 골방의 미학이라고 할 만한 정서의 한 지점을 떠올려주고 있는 것이다.

서길종_무겁고 부드럽게 살자!_부식, 애쿼틴트 판화_120×90cm_2006
서길종_a clod of meat_부식, 애쿼틴트 판화_60×70cm_2006

이러한 사실은 작가가 주제로서 설정한 'background'의 개념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그 주제의식은 말하자면 동시대적이고 당대적인 시대정신에 대해 논평하거나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열어 보이기보다는, 일종의 원형적인 존재를 되살려내고 이를 되새김질하는 회고적이고 회귀적인, 그리고 회향적인 본성을 겨냥한다. 대략 배경 혹은 후경으로 번역되는 이 말에서도 느껴지듯이 서길종의 작업은 자신의 개인적인 인격을 성립시키는 요소들을 추적하고 이를 재구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 그 자체 일종의 자기 반성적인 행위에 맞닿아 있는 이 과정은 후기근대의 다원주의 이후 회의에 부쳐진 모더니즘의 거대담론을 불러들인다. 그러니까 다시금 주체, 자아, 에고의 출처를 묻고 그 근원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자아는 그 자체 완전한 총체로서의 관념적 실체로서 현상하지는 않는다. 대신 자아는 흙벽의 얼룩처럼 정형화된 언어로는 환원될 수 없는 존재, 그 표면에 난 크고 작은 비정형의 크랙들처럼 그 속에 온갖 삶의 상처를 내장하고 있는 트라우마적 존재, 그리고 나아가 그 상처를 감싸 안는 치유적이고 재생적인 존재(이는 흙의, 자연의 복원력과 맞물린다)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보다 결정적으로 자아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실체로서보다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이고 정서적이고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무분별하고 우연한 집합으로서 나타난다. 이렇듯 작가의 자아가 일종의 정서의 형태로 환원돼서 흙벽에 스며있는 만큼이나, 역으로 흙벽은 작가의 인격이 형성된 과정을 재구성하게 해준다. 작가의 작업에서의 흙벽은 이처럼 단순히 질료적인 대상성을 넘어 그 이면에 작가의 인격이 배여 있는 마음의 밭이나 정서의 터로서 현상하고, 작가의 유년이 녹아있는 삶의 유비(메타포)의 한 형태로서 현상한다.

서길종_medium&link_부식, 애쿼틴트 판화_55×40cm_2006
서길종_plus_부식, 애쿼틴트 판화_40×55cm_2006

이처럼 서길종의 작업은 오래된 흙벽에다가 어떻게 자아를 투사할 것인가, 혹은 그 흙벽으로 하여금 어떻게 자기 정체성과 정서적 요소들을 떠올리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에 맞춰져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동판부식기법과 아쿼틴트 기법을 혼용함으로써 흙벽의 오래되고 풍화된 분위기를 되살려낸다. 동판의 표면에다가 그라운드를 칠하고, 그 끝이 뾰족한 송곳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새기고, 동판을 부식하고, 재차 이렇게 드러난 이미지를 교정하기를 거듭 반복한다. ●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마치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듯한,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듯한 풍화된 느낌의 흙벽이 그 형체를 드러낸다.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가 하면,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가 가로질러 놓여 있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뼈대 삼아서 마치 살처럼 흙벽이 덧붙여진다. 그 흙벽은 대기와 시간에 노출되고 풍화된 나머지 그 표면질감이 푸석푸석해지고,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간 채 그 이면의 옥수수 대와 짚 부스러기를 드러낸다. 마치 노년의 피부처럼 그 표면의 깊은 주름과 함께 비정형의 크랙이 세월의 연륜을 증언해준다. ● 이와 함께 아쿼틴트 기법에 의한 그 입자가 만져질 듯 부드럽고 어두운 음영효과가 밝게 드러나 보이는 돌출 부분과 대비되면서, 흙벽을 빛과 어둠이 어우러진 감성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여기에 모노톤으로 나타난 절제된 색채감각(주로 갈색이나 흑백 대비로 나타난)이 더해지면서 흙벽을 일종의 자기 반성적인 사유를 위한 계기의 장으로까지 확장시킨다. 물론 이때의 확장은 단순히 사물과 대상의 감각적 재현을 넘어선, 작가의 주체(유년과 무의식의 지층)와 연결된 내향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다. 부연하자면, 내포적이고 내재적인 확장, 내부적이고 구심적인 확장(그 자체 자기 외부를 향한 원심적 확장과는 비교되는)인 것이다.

서길종_skin head etching_부식, 애쿼틴트 판화_30×20cm_2006
서길종_stay_부식, 애쿼틴트 판화_60×30cm_2006

이렇듯 낡고 풍화된 흙벽에는 작가의 유년이 투영돼 있으며, 인격이 투사돼 있다. 이는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형태를 띠기보다는 암시적인 형태로서 나타난다. 실은 우연하게 조성된(엄밀하게는 그 자체 의도된 우연성 혹은 가장된 우연성의 소산인) 흙벽의 떨어져나간 부분이나 남겨진 비정형의 형태가 삶의 상처를 떠올려주며, 깊게 패인 주름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인체의 실루엣 형상과 함께 익명적인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일종의 '상기'에 그 맥이 닿아 있는 이 우연한 형상들은 작가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들로서, 작가의 유년과 무의식의 지층으로부터 끄집어내진 것들이다(플라톤은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상기에서 찾는다). 나아가 이는 단순한 작가의 개인사를 넘어 한국인의 보편정서를 상기시킴으로써 한국인의 정서적 원형과 미의식의 전형에 맞닿아 있다. 변하지 않는 것보다는 변하는 것, 반듯하고 완전한 것보다는 적당히 어눌하고 숙성된 것, 즉각적으로 어필되기보다는 은근하게 드러나 보이는 암시적인 형상을 선호하는 이 미감(한마디로 반쯤은 우연이 만들어 낸 경계 위의 미감이라고 해야 할)의 이면에는 자연의 형성력과 순환원리에 순응하고 공감하는 삶의 지혜가 놓여있다. ● 이외에 작가의 일부 작업은 판화의 경계를 넘어 그 자체 자족적인 오브제로까지 그 표현범주를 확장시키고 있다. 종이 대신 레자(비닐 성분의 유사가죽)의 표면에 이미지를 프린트한 후, 그 조각들을 재봉틀로 박음질해서 연이어 붙인 것이다. 이때 표면적인 이미지로서 주름을 암시하는 대신 실제로 주름을 조성하기도 하고, 비정형으로 나타난 조각천의 가장자리를 바탕화면에 덧대어 실로 꿰매기도 한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실재에 대한 단순한 재현논리를 넘어, 그 자체 자족적인 실재(일종의 리터럴 오브제)의 제안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형식실험이나 이를 통한 판화의 외적이고 물리적인 확장과 함께, 작가의 작업은 내향적이고 내면적인 확장을 꾀하고 실천하는 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 고충환

Vol.20060816b | 서길종 판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