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풍경

이흥덕 회화展   2006_0825 ▶︎ 2006_0904

이흥덕_2006서울타워_캔버스에 유채_259×389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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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825_금요일_06:00p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4전시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700번지 Tel. 02_580_1518 www.sac.or.kr

관찰자의 미학 : 실제, 또는 '저항의 암시적 풍경' 앞에 서게 하기 1. '오로지 실제일 뿐인 것'들이 주는 해석학적 긴장 ● 이흥덕의 회화는 일상의 도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충만하다. 그것들은 사적 차원이거나 사회적 차원의 사건들이다. 한 때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들도 있고, 사건이랄 것조차 없는 미미한 에피소드들도 있다. 부조리하거나 아연실색케 하는 것들이 있고, 우스꽝스럽다가 종내는 서글퍼지고 마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것들은 이미 지나치게 일상에 편입되어버려 무덤덤한 것들이다. 이 크거나 작고, 무겁거나 가벼운 다양한 것들은 그럼에도 모두 나름의 은폐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이 흥덕의 세계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자주 가해자와 피해자의 오래된 관계로 엮여있다. 폭력과 상처의 다양한 알레고리로서 등장하기도 하고, 오만한 권력과 민초 사이의 먹이사슬로 매어져 있기도 하다. 개는 자주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내던져진 무력한 실존, 침묵하는 희생자, 소시민의 메타포로 등장한다. 개가 지시하는 하나의 은폐된 차원은 '야성(野性)'의 결핍과 예속과 순응주의다. 개는 자주 주인에 끌려 다니고, 목적없이 짖고, 내달릴 때조차 방향이 없다. 끊임없이 살해되고, 죽어 나자빠져있고, 줄행랑을 놓는 멧돼지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멧돼지 사냥에 나선 사람들은 흥미롭게도 황우석 박사, 현직 대통령, 김정일 등이다. 비단 특권층뿐만 아니다. 갈망했다 실망하기를 되풀이하는 사람, 스스로를 끝없이 분주하게 만들므로써 문제를 잊는 사람, 나르시즘으로의 도피자, 관조적 체념자, 가해자들, 탐욕스런 시선의 주인, 퇴폐적 성애자, 거짓 뒤에 참된 동기를 숨기는 악당, 정치인들, 피해의식과 증오심으로 쩔쩔매는 자, 치받기를 포기한 자 등이 모두 동등하게 등장하고 조명받는다. 주인에 예속된 개, 줄행랑을 놓는 멧돼지, 지하철에 나타난 도마뱀, 허공에 매달린 갈치는 모두 어떤 비극의 절제된 장치들이다. 현시대의 문명이 살리기 보다는 죽이고, 거세하고, 협박하고, 추방하는 것에 더 자주, 그리고 더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에 관한 암시들일 수 있다. 상이군인, 걸인, 비인간적으로 취급되는 소녀들, 몽둥이, 잘려져 나갔거나 앙상한 나뭇가지들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널부러진 멧돼지가 더 진정으로 사는 길의 단초가 아닐까? 원만하게 적응해나가는 대신, 이방인으로 겉도는 편이 더 낳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본질적으로 익숙해질 수 없는- 영혼의 실재를 입증해야 하리라는 것, 또는 요구되는 방식을 추종하는 굴욕과 맞서는 것이 작가 이흥덕의 잠재적인 선언이 아닐까?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즉 인생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바로 그 순간 '깨어서 바라보는 것'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기술(技術)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갈림길에 섰을 때 깨어나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와도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 이흥덕의 그리기는 사실 이 바라보기의 연장선상이다. ● 이흥덕의 세계는 모든 것들을 조심히 다루기를 원하지만, 해석학적 맥락에서 중립적인 사건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C.S. 루이스) '사람들의 일부는 아주 착하고, 일부는 아주 악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스캇 펙,M. Scott Peck) 대개의 경우, 악한 자들이 상황을 악화시키면 다수의 사람들은 이에 순응한다. 그리고 말라기 마틴(Malachi Martin)이 지적했듯, 우린 둘 중 하나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쩌랴, 일상은 온통 순응주의의 드라마 일색인 것을! ● 이흥덕의 어조가 차라리 강한 비판조였다면, 감상자들은 짐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일상의 다반사가 수용과 순응, 타협과 협잡, 거짓과 선동으로 범람하고 있다고 외치는 것이라면,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흥덕의 회화에선 어떠한 외침도 들리지 않는다. 선동도 미사여구도 없다. 작가는 뒷짐을 진채 한참 뒤로 물러서 있다. 회화에는 어떤 경미하고 불확실한 징후, 불쾌하고 후덥지근한 어떤 긴장감, 또는 보다 모호한 형태의 대립과 긴장감이 고작 배어있을 뿐이다. 결론은 더더군다나 암시조차 없다. 때문에 감상자는 주석없는 세상과 단지 마주서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갖게 된다. 긴장감, 해석의 부담은 고스란히 감사자의 몫으로 떨어진다. 관찰자적 전망 안에서 해석학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이다.

이흥덕_신도시_캔버스에 유채_259×389cm_2006
이흥덕_지하철4호선_캔버스에 유채_194×388cm_2002

2. 안티 픽션(anti-fiction), 누보 로망(nouveau roman)적 그리기 ● 근래 이흥덕의 세계는 더욱 더 사건과 사람들 자체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건들이 더욱 명쾌하게 드러나는 반면, 그것들을 캔버스에 소속시키는 일련의 회화적 절차들은 더욱 간결하게 되어가고 있다. 표현의 강박, 또는 '정서의 안개'가 걷히면서 색조는 훨씬 밝아졌다. 붓질은 훨씬 더 밋밋하고 평면화되었다. 이는 이흥덕의 역할이 미묘하게 바뀌어 왔음을 암시한다. 이전에 그의 회화는 훨씬 더 정서에 의해 주조되었다. 많은 담화들이 거친 붓 터치와 메마른 질감을 통해 발언되었다. 모름지기 회화는 마음의 미묘한 변화를 담지해내는 장이어야 했다. 가장 명료한 형태의 담론적 기능에 나설 때조차, 붓 터치 하나하나에는 조형적 순수와 혐오와 분노의 감정 사이를 오락가락 했던 기록들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자주 거칠고, 무겁고 칙칙한, 표현주의의 계통의 관례적인 범주 안에 적절히 드는 것이곤 했었다. 반면, 이제 이흥덕은 전지적 관찰자로서 사건들을 예의주시한다. 초점을 흐리는 감정적 단초들은 훨씬 제한적으로만 허용된다. 그의 역할을 화면을 밝게 하고, 불필요한 주관적 개입을 유보해 관자들로 사건을 잘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전에 비해 훨씬 덜 표현주의자적이고, 더 리포터로서 일한다. 훨씬 중립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다. ● 이흥덕의 이 이 거리두기, 중립성은 자신의 회화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맥락일 것이다. 이흥덕은 자신의 회화조차 자신에게 격렬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렇게 되면 예술가들도 결국 자신의 예술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니까.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로부터 자유로운 예술가일 것이다. 그런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에서 한 불안한 인간의 집착적 욕망 이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사실 이흥덕은 언제나 타고난 관찰자였다 : "저는 시선을 극단적인 점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중간 어디쯤에 두고, 나와 이웃의 삶을 바라보고 싶은 것이죠. 편들기, 정치적인 성향의 비판들, 지나치게 원론적인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은 오히려 삶을 유지해가는 모든 사람들의 매일매일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흥덕) 이것이 삶을 대하는 전형적으로 이흥덕 식의 태도다. 세계의 부조리를 해부하는 상황에서조차 그는 한 발 더 뒤로 물러서 있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알랭 로브그리에(Alain Robbe-Grillet) 의 잘 알려진 선언을 환기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며, 단지 있는 것이고, 이야말로 세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다." 단정짓거나 판결을 내리는 일체의 것으로부터의 후퇴, 그것이 가능하거나 필요하더라도 해석은 관자 각자의 몫일뿐이라는 점, 관대함, 보이지 않는 관찰자의 미덕...

이흥덕_저돌적 야성의 죽음_캔버스에 유채_194×259cm
이흥덕_영웅_캔버스에 유채_227×181cm
이흥덕_비상구_캔버스에 유채_181.8×227.8cm_2004

부산하고 어정쩡하며 불안해 보이는 일상의 편린들은 단지 하나의 독립된 파편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전후좌우로 병치되고, 중첩되고, 상호연관되고, 다발로 등장하면서 예기치 않은 추상성과 복잡성을 만들어낸다. 등장인물들은 때로 대화풍선이라는 만화적 방식을 통해 무언가를 말한다. 분명, 이흥덕의 회화는 서술적이다.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건들과 인물들 간에 어떤 극적인 연계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구성과 해석의 요인들 또한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 진술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의 세계에선 허구(fiction)로서의 어떤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실들, 실제의 사건들과 그것들의 단편적인 재구성이 존재할 뿐이다. 진행되고 완료되는 것 모든 것들의 출처는 허구가 아니라 실체로서의 사건과 인간인 것이다. ● 이흥덕의 세계에 삶을 조망하고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문학적, 시각적 도구로서의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들의 정연한 극적 전개도 없다. 숱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어떤 인간 보편을 그려내기 위해 신중하게 구성된 심리적 캐릭터가 아니다. 중심을 이루는 사건도 없고, 시종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도 없다. 다만, 정돈되지 않고, 인위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원재료로서의 삶의 나열, 병치가 있을 뿐이다. 마치 '매초와 매분은 있되 그것의 총합인 하루는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 사건들은 구성에 이르지 못 하는 수준, 에피소드와 소사건들의 나열 수준에서 재배치된다. 이것은 이야기의 구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라는 허망한 형식을 폭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양상에서 파악하려드는, 이른바 누로로망(nouveau roman)과 그 미학에 있어 유사한 방식이다. ● 결국, 이흥덕의 방식은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말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픽션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삶으로부터 듣도록 유인하는 방식이다. 이흥덕의 회화들은 결코 어떤 결말에 도달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아닌 이상, 선뜻 내던질 수 있는 결론이란 실상 없다. 함축, 상징, 은유, 비유도 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된다. 극적인 장치, 구성적 전략도 미소량만 동원된다. 모두 실제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이다.

이흥덕_구원_캔버스에 유채_181.8×227cm
이흥덕_산불_캔버스에 유채_259.1×387.8cm
이흥덕_메리크리스마스_캔버스에 유채_227.3×363.6cm_2006

3. 카페, 신도시, 지하철, 그리고 관찰자 ● 이흥덕의 '저항의 풍경'이 촉발되는 무대가 자주 카페와 신도시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카페야말로 욕망의 공간이고 집착이 자라는 공간이다. 그리고, 욕망과 경험 사이의 거래가 가장 즉물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일상이 가장 극화되는 장소인 것이다. 신도시는 현재가 역사 전체를 대변하는 유일한 시간으로 군림하는 공간이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들은 광장이나 가옥이 아니라 도로에서 일어나고, 정착이 아니라 이동이 미덕이며, 따라서 자동차가 소유문화의 첨병으로 떠오르는 곳이 바로 신도시다. 이런 곳에서 가장 계시적인 사건은 교통사고다. 사실 정확히 하자면 그것은 자동차사고가 아니라 속도의 사고다. 속도의 욕망이야말로 현대문명의 금자탑인 동시에 끔직한 저주가 되고 있다.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적응과 관련된 심각한 심리적 외상을 입는다. ● 교통사고가 문명적 차원의 보고라면, 지하철은 사회적 차원의 문제제기에 적절한 기호다. 교통사고가 빈부의 차를 가리지 않는 반면, 지하철은 거의 전적으로 서민의 장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서민들의 군중화되고 불안한 삶의 현장이자 보고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괄호, 무언가 주도권이 이양된 이후의 기념비적인 박탈감 안에 자연스럽게 묶인다. 그것은 고통스럽게도 자신의 절망스러운 정체와 대면하는 경험의 일환이다. 일테면, 수많은 무관심들에 에워싸이곤 하는 '나'는 거대한 익명성의 한 텍스트일 뿐이다. 매순간 관계의 무중력상태, 그리고 사회의 빅뱅이 초래된다. 익명의 군중 속으로 역사, 사회, 이념, 진리, 그리고 자아의 나머지부분까지 흡수되어버리고 마는 순간! 급속한 소멸의 운동이 과장된 원근법 저 멀리로 몰아친다.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나가는 곳, 出口, Way Out'은 차라리 '출구없음'의 반어적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 사람들은 점점 더 카페와 신도시에 갇힌다. 속박과 억압과 불안을 매일 촉지하면서도. 이 욕망의 회로에서 무언가에 끌리듯 붙잡혀 있다. 사람들은 갈망하고 집착하면서 서서히 출구를 잃어 간다. 이 보이지 않는 공격들은 익명의 사람들의 석연치 않은 표정과 제스춰 위로 슬쩍 스치고 지나간다. 한 성실한 관찰자가 숨어서 모순을 옆구리에 차고 부조리의 도로를 휙하고 지나가버리는 삶을 포착하고 기록해 왔다. ● 지난 20년 동안 이 관찰자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결코 도망칠 수 없는 현실과 대면해 왔다. 그것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경험일 수도 있다. 저렇듯 욕망에 쩌들고, 집착하고, 안절부절하고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되묻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과 무관한 감상자로서 편안하게 밖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너무 비루하고 민망해서 얼른 내빼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결정적으로 행복의 현상들이 아니듯이 불행의 단초들인 것만도 아니다. 결국, 그것에서 무엇을 보는가도 우리에게 달려 있다. ■ 심상용

Vol.20060825a | 이흥덕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