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현현(顯現)

책임기획_김성호   2006_0901 ▶ 2006_0914

고산금_고래 사냥_면사, 옥양목, 코바늘 뜨기, 판넬_35×45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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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901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_고산금_구영모_유지숙_황은화_홍순환

갤러리 쿤스트독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02_722_8897 www.kunstdoc.com

최근, 기획전들이 관객 참여를 통한 놀이나 유희와 같은 대중문화 코드에 부합하기 위해 스펙터클과 퓨전 지향의 트렌드를 대량 생산하는 미술현장을 상기해볼 때 이들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개념적 성향의 미술을 고찰해 보는 이번 기획전은 오늘날 유의미하다. ●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5인의 작가는 시각적 결과물 보다는 그 개념이 보다 더 중시되던 60년대 개념미술의 지평을 어떤 식으로든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작가 개개인의 독특한 '개념의 현현'을 성취하고 있다. 전시는 행위나 대지미술의 유형처럼 도큐먼트의 형식으로 기록되고 개념만이 남는 일련의 작품 형식은 제외하고 시각적 결과물을 생산해내는 개념 지향의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 고산금, 구영모, 유지숙, 황은화, 홍순환 5인의 작가들은 이번 전시에서는 제각기 다른 주제와 형식을 통해서 오늘날 개념적 미술의 의미를 묻고 있다. '미술에서의 개념'이라는 용어의 확장된 해석을 도모하는 이번 전시는 그 현현(顯現)에 대한 재해석을 탈형식 문맥 속에서 새로이 시도하고자 한다. ● 고산금, 언어와 내러티브의 현현 ● 고산금은 대중가요, 팝송, 소설, 시와 같은 '언어를 통한 진술'을 작품의 원재료로 삼는다. 작가는 옥양목이나 털실로 코바늘뜨기를 시도하면서 코를 빼서 구멍을 남기는 방법으로 혹은 흰 판넬 위에 인공진주를 개별 단어의 수만큼 치환시켜 부착시키는 방법으로 원재료로 삼은 텍스트의 각 단위들을 표상해낸다. 섬유의 올을 밀쳐내고 마련해준 텍스트의 개별 자리는 비워지면서 텍스트의 기표가 발현되고, 정성들여 마감된 흰 판넬 위에 도드라지게 올라선 인공진주들의 도열은 채워지면서 텍스트의 기의를 소여시킨다. ● 가독성을 지향해 오던 텍스트가 그토록 오려 누려온 지시성, 고정성이라는 기의(signifie)의 지위를 일순간에 무화시키고 미니멀한 기표(signifiant)로 덜렁 환원시키는 고산금의 작업의 의미는, 기표의 원전을 살짝 밝혀내는 작품명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원재료로 삼았던 텍스트의 기의를 유추하게 하거나 되뇌게 한다는 점에서 메타-소통의 차원을 촉발시키는데 존재한다. 그것은 내러티브적 언어의 의미 전달적 소통의 차원을 넘어 또 다른 소통의 체계, 즉 무수한 '의미작용'의 체계를 지향하는 작가의 개념적이고도 이지적인 전략과 뜨개질과 같은 수고스러운 집약적 노동이 유발하는 창작행위가 상호침투한다. ● 그런 탓에, 고산금에게 있어서 언어와 내러티브의 양가적 현현은 텍스트의 가시적 부재와 의미적 현존을 일깨우는 개념의 현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구영모_미술관(棺, 館, 觀)_혼합재료_60×70×270cm_2005

구영모-변증법적 상징의 현현 ● 구영모의 작업은 일견 그의 미니멀적 회화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절대주의 추상이 추구해 온 동일률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이 정신과 물질의 긴밀한 함의를 희미하게 드러내는 모노크롬 류의 모더니즘 미술의 전형적 차원에 존속해 왔다고 살펴볼 때 그의 작업이 내포하고 있는 변증법적 상징은 한편 의외일 수 있다. ● 하지만 현실로부터 초탈하여 미의 범주로 안착한 개념이 사회현상과 맞부딪히는 '동일률 배반'의 충돌은 그의 작업에서도 존재한다. 그것은 개념이 이데올로기나 언어의 차원과 부딪힐 때 생성되는 것으로 특히 이번 출품작 「미술관(棺, 館, 觀)」에서 이러한 두 차원이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전통 회화의 액자 형태로 관(棺)을 만들어 예술의 종말 논의와 더불어 예술작품의 무덤으로 비난받아온 미술관이 야기하는 동시대 미술현장을 '변증법적 상징'으로 함축해 내고 있다. ● 구영모가 구사하는 '만들어진 오브제'의 '열려진 미니멀'의 형식은 '美術館, 棺, 觀'과 같은 언어의 개념적 유희와 맞물리면서 정반합(正反合)적 대립과 모순을 야기하는 다종한 정의와 해석의 차원을 열어놓는다. 헤겔의 예술종언이나 아서 단토의 예술종말 혹은 브르디외의 예술의 음모가 한 덩어리로 읽혀지는 이 작품은 '형식이 태도를 드러낼 때' 혹은 '개념이 감각적으로 현현될 때' 얼마나 많은 해석의 층위가 존재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체가 된다.

유지숙_I was looking over there for a long time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04:13_2003

유지숙-시간의 현현 ● 유지숙은 지속적으로 삶의 공간과 대면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의미와 그것의 시각적 현현에 골몰해 왔다. 작가는 자신이 호흡하고 있는 일상의 시간들을, 몇몇의 시리즈물 형식으로 연속적으로 재현해내고 있을 따름이지만 작가의 그러한 기록 혹은 채록의 방식은 범상치 않다. ● 유지숙은 시간의 흐름에 편입되는 수동적 관조자가 되거나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창출하는 적극적 창조자가 되기도 한다. 가족의 일상을 몰래카메라로 훔쳐내거나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여행지에서 특정 공간에 담겨진 시간의 흐름을 고정된 비디오카메라로 냉정하게 기록하던 그녀는 '철저한 관조자'에 다름 아니었다. 한편, 10년간의 프로젝트를 계획하면서 1999년 이래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얼굴 사진을 찍어 기록해오고 있는 작가는 바이오그래피적 시간의 흐름에 과감히 몸을 던진 '철저한 창조자'이기도 하다. ● 작가 스스로를 대상화시켜 탐구하는 일상의 시간은 자신 혹은 참여자가 카메라에 찍히는 순간의 이벤트적 유희가 가미된 최근작「점핑 포토」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방식으로 확장되어 오고 있다. ● 우리가 시간을 기록하는 그녀의 작업에서 유심하게 살펴볼 것이 있다면 작가 스스로를 주체화시키든, 객체화시키든 일상 삶의 공간을 주목하는 태도이며 그 태도의 형식이 추억과 기억의 심리적 흔적을 야기하는 '소멸의 시공간'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현현되고 있다는 지점일 것이다.

홍순환_중력의구조-기둥_FRP_높이 450cm_2006

홍순환-탈시각적 지표의 현현 ● 회화, 오브제 설치의 영역을 두루 걸치고 있는 홍순환의 작업에서는 '개념의 감각적 현현'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표현주의적 감성으로 때로는 심리적 아노미의 진폭으로 혹은 구조의 위태로운 현상으로 다채로운 옷을 갈아입는 정형화되지 않는 특성을 배태한다. ● 그럼에도 그의 비정형 작업은 늘 비주얼 이미지의 배면을 주목한다. 그것은 심리와 인식의 차원에 집중된다. 특히 중력과 탈중력의 개념을 탐구하는 일련의 설치작업들에서는 물리적 현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탐구하는 식의 이미지의 차원을 주목하기 보다는 그 현상 이면과 배후에 잠재하고 있는 존재론에 관한 인식의 차원을 주목하는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다. ● 홍순환이 근본적으로 시각화를 지향하는 미술의 유형론을 빌리고 있으면서도 작업 전반에서 탈시각적 측면을 부단히 강조하는 까닭은 '시각적 진실의 불온함'을 인식하는 탓이다. 수직과 수평에 관한 건축적 조화와 그에 대한 시각적 안정감, 혹은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체계를 신뢰하는 우리들의 합리적인 관습이 종국에는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된 체계임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려는 태도는 작업 곳곳에서 감지된다. 차가운 바닥에 조명을 밝히고 드러누운 뼈대만 앙상한 야전침대, 천장과 바닥을 잇는 가설 기둥의 거짓 공학, 사다리가 지니는 늘 불안한 의탁에의 의지 등. 그것들은 현대사회의 부조리한 자아와 타자의 만남이며 정신과 물질의 불안한 소통을 가늠하게 한다. ● 출품작에서 '중력의 물리학적 기준과 심리학적 기준 사이의 스펙트럼'을 주목하는 작가는 '존재의 근거로부터 유발되는 다양한 상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일상에서 발견된 오브제나 만들어진 오브제의 정체성을 변환시키거나 부분적 가치를 훼손하는 방식과 같은 재구조, 재맥락화를 통해서 심리나 존재 인식의 차원과 같은 '탈시각적 지표의 현현'을 시도한다.

황은화_Another View 4_벽에 아크릴채색_높이 450cm_2006

황은화-공간의 현현 ● 황은화는 이미 구축된 구조화의 공간 안에서 시각적 인식에 질문을 던지는 일련의 제스처를 통해 공간의 재구조화를 감행한다. 그 제스처란 3차원 공간 안에 원형이나 사각형과 같은 2차원의 평면도형의 체계를 그리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려진 도형의 체계는 3차원의 구조물이거나 그것이 확장된 건축 공간의 내부를 잇는 허구의 일그러진 도형일 따름이다. 작가가 3차원 공간을 대면하면서 하나의 시점(視點)을 형성하는 위치를 고수하고 그 위치로부터 '시각적 인식에 의해 2차원으로 드러나는 평면도형'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 환영의 체계에서 이룬 기하학적 도형은 실제의 체계에서는 구조화된 내벽과 바닥 구석을 연결하는(혹은 연결하다 끊겨진) 2차원 도형의 와해일 따름이다. ● 2차원으로부터 3차원화를 시도했던 회화의 전통적 태도를 거꾸로 출발시키며 '공간에 그리는 회화'를 통해 3차원 공간을 2차원으로 환원시키려는 황은화의 전략은 다분히 시각적이다. 실재와 가상, 실재와 환영의 화두를 '끊임없는 관자의 시선' 속에 가두는 작가의 작법은 미술을 시각철학으로 풀이하는 작가의 태도를 여실히 반영한다. ● '시각과 지각 그리고 인식'의 문제에 보다 철저하게 집중하기 위해서 작가는 창작의 과정에 과학적인 측량이나 보조 방법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은 채 '작가의 눈과 몸'만을 끊임없이 운위하는 고된 노동을 투여한다. 일견 이지적인 작업을 풀어나가기에는 어긋나거나 무모한 창작태도처럼 보이는 이러한 노동에의 방식은 오히려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 관람자들이 감상을 위해 작가의 시점과 초점을 맞추려고 몸의 자세를 부단히 바꾸어가며 당시 창작의 노동을 추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은화의 '개념과 시각적 인식에 의한 공간의 현현'이란 그런 차원에서 몸의 논리와 부단히 교류한다. ■ 김성호

Vol.20060903c | 개념의 현현(顯現)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