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공간(poetic space)

장진 회화展   2006_0906 ▶ 2006_1012

장진_시적공간_한지에 먹, 주사먹_88×78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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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906_수요일_06: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 / 2006_0906 ▶ 2006_0912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34_7555 www.topohaus.com

인천신세계갤러리 / 2006_1010 ▶ 2006_1012 인천시 남구 관교동 15번지 신세계백화점 인천점 1층 Tel. 032_430_1157

경계 위의 풍경, 풍경이 지워지고 드러나는 계기 ●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세부가 지워지면서 단순해질 때가 있다. 빛 속에서는 결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이 단순한 풍경은 태생적으로 어둠과 더 친숙하며, 어둠 속에서 비로소 자기의 속살을 보여준다. 모든 풍경은 이처럼 그 속살을 자기 내부에 숨기고 있다. 특히 낮과 밤,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갈리는 자연 속에선 더욱 그러하다. 온갖 현란한 불빛들이 명멸하는 도시에서의 풍경은 결코 단순해지지가 않는다. 도시에서의 사물은 자기의 존재가 지워지기라도 할 것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기를 쓰고 어둠을 밀어낸다. 이에 반해 자연은 어둠을 포용한다. 자연 속에서 사물은 낮 동안만 자기를 드러내 보일 뿐 밤과 더불어 자기를 지운다. 그리고 거대한 실루엣을 되돌려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의 풍경은 사물과 사물간의 경계가 지워진 마치 거대한 유기체 덩어리와도 같은 실루엣으로 드러난다.

장진_시적공간_한지에 먹, 주사먹_73×76cm_2006
장진_시적공간_한지에 먹, 주사먹_47×70cm_2006

장진의 그림 속의 풍경은 이처럼 단순하다. 엄밀하게 말해, 처음부터 단순한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비로소 단순해진, 단순화된 풍경이다. 풍경이 그 속에 단순한 계기를 숨기고 있고, 작가가 이를 불러낸 것이다. 풍경의 본질 혹은 원형으로 부를만한 그 계기는 그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풍경과 작가를 가로막고 있던 경계가 허물어질 만큼의 충분한 동화 이후에나 비로소 풍경은 스스로를 열어 보인다(이를 하이데거는 세계의 개시라고 부른다). 이때의 풍경은 작가와의 동화의 소산인 만큼 풍경 자체의 자족적인 것인 동시에 작가에게 속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작가가 풍경 속에 투사한 자기 즉 작가의 분신인 셈이다. 이를 육화된 풍경, 체화된 풍경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육화되고 체화된 의식의 형태로서 풍경과 연속돼 있으며(이를 메를로 퐁티는 우주적 살이라고 부른다), 이미 그 자신 풍경의 일부인 것이다. 이는 풍경을 사물화하고, 객체화하고, 대상화하는 프로세스를 통해서는 결코 거머쥘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작가와 풍경을 주(主)와 객(客)으로 분리하고, 작가 자신으로부터 풍경을 멀찌감치 떼어놓는 식의 분석의 소산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작가의 그림은 풍경에의 동화와 해석(그 속에 일정부분 동화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는)의 소산이다.

장진_시적공간_한지에 먹, 주사먹_100×80cm_2006
장진_시적공간_한지에 먹, 주사먹_74×84cm_2006

이렇듯 장진의 그림은 분석의 결과물이 아니므로 그림 속에서 사물의 실체를 확인해보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강화를 배경으로 그려진 것이다'라는 표면적 사실을 이 그림은 배반한다. 강화도에 대한 지정학적 사실, 감각적 사실을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과 강화와의 의미관계는 어떻게 찾아질 수 있을까. 강화를 배경으로 했거나 소재로 했다는 그 표면적인 사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작가의 그림은 강화의 지정학적이고 감각적인 사실 저편의 한 지점을 겨냥하고 있다. 풍경의 표면(감각적 사실로서의 현상)과 이면(관념적 사실로서의 본질)의 경계를 허물고 강화가 그 전체를 드러내 보이는 한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암시적인 풍경 곧 그 속에 잠정적인 움직임을 암시하는 풍경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 움직임이란 자연의 변화무쌍한 성질로부터 온 것이다. 변화하는 것을 고정된 형태로 붙잡아 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암시적인 것이다. 우듬지를 흔드는 바람과 그 바람에 묻어온 대기의 알갱이 그리고 손끝에 감촉되는 습윤한 기운과 같은 온갖 변화하고 움직이는 자연의 계기들이 그림 속에 거둬져 있는 것이다. 작가의 단순한 그림은 이처럼 생략된 그림이 아니라 함축된 그림이다. 마치 주름처럼 움직임의 계기들이 겹쳐져 있고, 마치 지층처럼 변화의 계기들이 포개져 있는 것이다. 그 레이어들 한 겹 한 겹이 그대로 강화의 바람과 공기를, 강화의 시간과 공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장진_시적공간_한지에 먹, 주사먹_57×50cm_2006
장진_시적공간_한지에 먹, 주사먹_61×94cm_2006

강화가 그 전체를 드러내는 풍경의 한 지점이나 그 속성은 어떻게 찾아질 수 있을까. 장진의 근작은 이러한 물음에 바쳐져 있다. 작가는 그 해답을 강화의 암시적인 자연에서 찾으며, 특히 바다를 배경으로 한 섬이라는 강화의 장소특정성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는 바다와 하늘이 접해있는 수평선과 산과 하늘이 면해있는 지평선(혹은 공지선),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 드문드문 떠 있는 섬들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에서 이처럼 다른 풍경의 지점들이나 그 계기들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강화의 자연을 그릴 때처럼 이는 암시적인 풍경 속에 해체되고, 그 구분과 경계를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평선과 지평선을 배경으로 한 풍경은 자연스레 옆으로 긴 그림으로 나타나는데, 그 세부를 무시하고 본다면 이는 마치 미니멀리즘 회화의 추상화면을 보는 것도 같다(미니멀리즘 회화가 회화의 본질에 천착한 배제와 배타의 논리적 산물이라면, 작가에게서의 단순한 화면은 모든 계기들을 그 속에 끌어안고 녹여낸 함축과 암시의 소산이다). 또한 옆으로 긴 그림은 세로로 서 있는 그림에 비해 작가와 풍경이 하나로 연장되고 연속된 듯한 느낌을 강화해준다. 그렇게 바다와 하늘, 산과 하늘이 접해있는 선(線)은 동시에 작가와 풍경이 서로 만나고 동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 선은 아득하고 멀고 심리적이다(이는 작가와 풍경이 심정적으로 서로 동화돼 있음을 증명해준다). 그 지점은 비록 작가의 감각에 붙잡힌 것이긴 하지만, 정작 그로부터 느껴지는 인상은 감각을 벗어난 비현실적인 비전을 향해 열려 있다. 작가가 근작에 부친 '시적 장소'라는 명제는 아마도 이런 의미, 즉 감각의 소산이지만 정작 감각을 벗어나 있는 풍경, 현실에 속해 있지만 정작 현실을 넘어선 풍경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자기에게 감각적으로 어필돼 오는 풍경의 휘장을 찢고, 그 뒤쪽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캐낸 (원형적) 풍경, 다시 말해 (감각적) 풍경이 자기 속에 품고 있던 내적 계기들을 작가에게 내어주고 열어 보인 (원형적) 풍경, 작가와 하나로 삼투되는 풍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풍경은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생명의 비밀을 드러내 보인다. 그 풍경의 선은 실제로는 없는 것이며, 단지 인간의 감각과 인식이 그어놓은 금에 지나지 않는다(그 선 자체는 인간의 한계를 증명한다). 작가는 아마도 이처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맞닿아 있는 지점,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다만 암시될 뿐인) 것이 그 경계를 허무는 장소로서의 강화를 그린 것이리라. ● 이렇게 그려진 강화는 온통 붉다. 노을과 갯벌에 피어있는 키 작은 소금꽃 군락이 강화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노을 자체는 빛에 속한 것이지만, 정작 그 실체가 더 잘 드러나는 때는 사물들이 자기의 실체를 지우기 시작하는 어둠과 대비될 때이다. 그리고 소금꽃(바다 속에 핀 꽃)은 생명의 비의(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맞물려 있는)를 드러내고, 생명에의 경외감을 자아낸다. 이처럼 붉게 물든 노을과 소금꽃 자체는 그대로 작가 자신의 마음의 밭이기도 하다. 이렇게 장진의 화면(마음) 속에서의 강화는 어둡고 단순하게, 그리고 붉게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 고충환

Vol.20060907e | 장진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