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양형규 개인展   2006_0913 ▶ 2006_0919

양형규_불안한 안주_형광·야광수지, 거울_가변크기_2006

초대일시_2006_0913_수요일_06:00pm

큐브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37번지 수도약국 2층 Tel. 02_720_7910

너 자신을 알라. ● 너 자신을 알라. 원래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신전 입구의 어느 기둥에 새겨진 이 짧은 금언은 소크라테스가 즐겨 인용함으로써 유명해졌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한글로 읽을 경우 마치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질타할 때 흔히 하는 말인 '네 주제를 파악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듯이 어딘지 교조적이고 훈육적으로 들린다. 사람에 따라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네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채근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에 대한 앎이다. 단호하면서 직선적인 이러한 경구의 시위를 당기는 사람은 그것은 다시금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비수와도 같은 따끔한 경고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너 자신을 알라. 이 짧은 금언으로부터 물리적, 외면적 자아를 넘어서는 사유적 자아에 대한 모험이 시작된다. 자아의 인식은 쉬우면서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나의 실체를 사진처럼 객관적으로 찍을 수 있는가? 사진이 시간과 공간, 앵글에 따라 객관성으로 위장된 '추억', '죽어버린 시간에의 향수'를 자극하며 실재로부터 멀어질 수 있듯이 내 마음 속에 촬영된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닌 '언젠가 그랬던' 또는 '그러길 기대하는' 또 다른 나일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심적 장치(mental-set)에 투사된 허상이거나 나의 한 단면일 수 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수 있다. 거울에 반영된 나의 모습은 실제가 아닌 실제의 반쪽이거나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환영(illusion)에 반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나르키소스란 원래 '망연자실'을 뜻한다고 하지 않는가? 망연자실하여 주체에 대한 인식을 놓쳐버리는 그 지점에서 나의 자아는 눈이 멀고 만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청소년기에 책상 위에 놓인 종이가 새까맣게 될 때까지 끄적거리면서 고민하는 것도 필경 내가 누구이며,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작게는 외모로부터 교우관계, 성적 호기심과 같은 욕망의 지배를 받는 자신에 대한 경멸과 학대에 가까운 자기검증, 나의 혈통, 진로, 사회적 관계 등이 질풍노도처럼 나의 뇌리를 휩쓸며 끊임없는 혼란의 미망 속으로 내모는가 하면 자아실현의 원대한 청사진을 그리며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 자아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비단 청소년 시기에 겪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는 아닐 것이다.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쾌락원리로부터 현실원리로 이행하는 단계,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는 시기에 자아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드(Id)와의 중단 없는 투쟁을 통해 쟁취되는 자아에 대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다소 도덕적인데, 라캉(Jacques Lacan)은 자아란 분열적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개념임을 암시한 바 있다. 어린이가 거울 앞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완전한 것으로 파악하고 실제 자신의 몸을 '조각난' 것으로 믿는 것으로부터 발생한 자아는 필경 불완전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 거울단계를 라캉은 '거울의 경기장(stade du mirroir)'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경기장이야말로 인간 주체의 싸움이 영원히 치러지는 장소라 할만하다. 그래서 분명하게든 희미하게든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자의식이 싹트겠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가 누군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물어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래서 삶은 고통스럽지만 흥미진진한 것일지 모른다.

양형규_나를 보다_야광수지, 먹물, 아크릴_70×100×100cm_2006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양형규가 작업을 통해 풀고자 하는 화두이다. 그러나 실상 양형규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으로 연장된다. 여기 한 사람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수면을 내려보고 있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복수이다.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떠오르는 이 군상들은 흡사 유령처럼 보인다. 게다가 한 틀을 이용해 주조한 인체이기 때문에 이 군상은 로댕(August Rodin)이 「지옥의 문」 위에 올려놓았던 유령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로댕 역시 한 거푸집에서 찍어낸 세 명의 인물을 결합해 이 부분을 만들었다. 양형규의 「나를 보다」는 라캉이 말하는 시선과 응시의 두 지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자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물속에 비친 나를 본다. 그러나 정작 보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물속에 투영된 이미지에 의해 전면적으로 노출돼 있다. 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이 기묘한 유예지대에서 나는 증발했다 출몰한다. 그것은 매혹과 당혹을 동시에 지닌 내 의식 속에 난 균열이자 구멍이다. 내가 미끄러져 들어가는 공간, 이 틈을 통해 나는 보고 또한 보여진다. 사방으로 캄캄하게 엄습하는 어둠은 나를 세계로부터 단절시킨다. 이 고립감은 수면에 투영된 나를 실제의 나인 것처럼 지각하도록 인도한다. 투영된 영상은 실재가 아니라 그 그림자이며 주변공간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환영이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나의 실재로 믿는 순간 실재는 사라지고 그것의 껍질만 남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영된 이미지를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나의 존재는 혼란의 미궁 속으로 미끄러진다. 이 미끄러짐은 주체를 환상의 포로로 만든다. 주체의 분열은 여기서 비등한다. 그러나 양형규의 작품에서 주체는 마냥 사라지는 허상은 아니다. 일렁거리는 수면에 비친 그림자는 주체란 대상이 있을 때 존재할 수 있다. 이 관계는 불안하지만 상호의존적이다. 복수로 존재하는 주체는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일 수도 있고,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관계는 수평적으로 열려있는 '사이(in between)'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내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사이에 내가 있다.

양형규_우....리._합성수지, 야광안료_180×60×110cm_2006

사이에 수평적으로 위치해 있으므로 내(수면에 비친 그림자)가 나(주체)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채근할 수 있고 역으로 주체가 그림자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이에 놓인 관계에 대한 시각적 서술이다. 이것은 자기와의 투쟁을 서술한 것이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 드러나는 주체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이때 너는 타자이든 제2의 자아이든 상관없어 보인다. 문제는 양자를 구성하는 관계이다. 나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너를 통해 반추된 나일 수 있다. 결국 주체는 자아의 성채(城砦) 속으로 스스로를 유폐할 때 관계의 그물로부터 벗어나고 마침내 사라진다. 나를 반영하는 대상(그것이 거울에 비친 그림자이든 타자이든)이 존재할 때 관계는 성립한다. 관계에 대한 인식은 사유적 자아로부터 사회적 자아로의 이행을 이끄는 동력이다. 내가 타자에게 전면적으로 노출됨으로써 나의 정체성은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이상적인 것은 자아도 알고 타자도 알 수 있는 '나'의 실체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작가는 이번 전시의 주제인 '반영, 투영, 환영'을 사람과 사람, 주체와 타자, 주체(실재) 사이에 놓인 주체(실재의 그림자)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관계는 서로의 반영 혹은 투영을 통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러나 응시의 대상으로서 자아는 타자에게 각인된 나의 일부일 수도 있으며 반대로 타자에게 노출되기를 기피하면서 나는 나의 다른 부분 속으로 숨게 된다. 이러한 은폐는 나를 규정하는 여러 측면 중에서 나에게 유리한 부분만 보여줌으로써 나의 실체를 축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나 역시 내가 보고 싶은 나의 모습만 상상한다. 여기에서 관계의 균열이 발생한다. 균열된 관계 속에 설정된 나는 실재의 그림자, 즉 환영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나'에 대한 고민은 결국 '너'를 전제로 했을 때 성립한다는 전제를 잊지 않는다. 즉 실존적 자아란 '나'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사이는 틈이 아니라 통로이며, 궁극적으로 관계를 지속시키고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내 의식 속에 열려있는 길이다.

양형규_우발적인,,,_투명 필름지, 야광안료_90×60cm_2006

어둠 속에 갇혀있는 나, 그 불안한 안주는 나의 주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나를 그 불안정한 상태 속에 계속 방치해둘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거울을 본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나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거울 속에서 나를 쳐다보는 존재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건넨다. 너 자신을 알라. 결국 너에게 던진 질문은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 나 자신을 알라! ■ 최태만

Vol.20060914b | 양형규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