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éepistémè of Painting

이인현 개인展   2006_0914 ▶ 2006_1015

이인현_회화의 지층_캔버스에 유채_60×240×10cm_2006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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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914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가인갤러리 서울 종로구 평창동 512-2번지 Tel. 02_394_3631 www.gaainart.com

번짐과 색의 계조(階調, gradation)를 중심으로 가공하지 않은 캔버스에 단색 유채물감을 사용하여 극히 간결한 화면을 완성하는 이인현의 회화는 '회화의 지층(L'episteme of Painting)'이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십여 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물감이 캔버스에 스며들어 번져 나오는 양태와 서서히 옅어지거나 진해지는 색의 계조는 그 자체 '회화의 지층'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지층'이라는 어휘는 단지 그러한 외형상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지식의 고고학』에서 미셸 푸코가 말한 '에피스테메' 개념을 염두하여 붙여진 것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푸코는 그 시대 모든 담론의 배경이 되는 인식의 구조가 있으며 그것이 땅의 지층처럼 시대별로 구분됨을 주장하고, 그러한 지층을 가리켜 '에피스테메'라 칭했다. 따라서 이인현이 그의 회화작업 전반을 '회화의 지층'으로 통칭하는 것은 자신의 회화가 단순한 감상의 대상으로서 하나의 예술작품이기 보다는 이 시대 모든 회화를 아우르는 기본 원리, 즉 현대회화의 '에피스테메'를 탐구하는 일련의 시도로서 읽혀지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지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십여 년 이상 계속되어 온 그의 「회화의 지층」연작이 회화의 물성과 이미지, 정면과 측면, 평면성과 즉물성 등 회화의 본질과 그 존재 방식에 관한 연구임을 고려할 때, 이 제목은 작가 자신의 일관된 예술태도를 피력하기에 꽤 적절한 명칭임에 틀림없다. 처음 작품을 발표한 1990년대 초반부터 2003년 최근 전시에 이르기까지 이인현의「회화의 지층」을 둘러싼 다양하고 심도 있는 비평과 논의들이 있어 왔다. 발표초기부터 미술계 평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그의 회화는 한편으로는 바로 이러한 점(이인현=회화의 지층) 때문에 매번 일종의 유명론적(唯名論的) 증명에 시달려 온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뜬금없이 '어느 작품이 회화의 지층이냐'고 찾기도 하고, 나름대로 '회화의 지층을 보았다'는 행복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또는 '언제까지 회화의 지층이 계속될 것인가' 자못 진지하게 궁금해 하기도 하는데, 이런 반응은 대부분 이미지의 결핍에 따른 금단증상일 경우가 많다. 이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이전보다 더 발전된 모습을 추구하는 목적론적인 모더니즘의 단선적 역사관에 따른 것이며, 필자는 그러한 근대적 사고에 대한 거부야 말로 이인현의 회화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 테제라고 본다.

이인현_회화의 지층_캔버스에 유채_60×240×10cm_2006
이인현_회화의 지층_캔버스에 유채_80×240×10cm_2006

이인현의「회화의 지층」은 전통 회화의 역사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미술 전반의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기존 회화의 논의에서 이분법으로 구조화되어 있던 것들에 반기를 드는 '회화에 관한 회화'다. 그는 기존 미술사의 논의에서 양립할 수 없었던 것들을 그 경계선상에서 자신만의 역설적인 논법으로 양립 가능하게 만든다. 먼저 살펴볼 것은 그간「회화의 지층」을 둘러싼 논의들 가운데 가장 자주 거론되었던 정면과 측면에 관한 이인현의 입장이다. 그는 정면 중심의 회화의 역사에서 가려져 있던 측면의 위치를 부각시키기고자 했다. 그의 회화에 공통된 10cm 폭의 측면은 물감이 스며드는 모습을 통해 회화의 물질적 본성과 그 생성과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화면이다. 그의 회화에서 측면은 정면과 함께 감상되어야 할 화면의 연장이자, 물질이 만들어내는 회화의 깊이를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 전통적 회화가 삼차원 환영을 통해 회화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과 달리 - 효과적인 방편이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제작 당시 측면이었던 것이 보여질 때는 정면이 되기도 하며, 심지어 면과 면 사이의 모서리가 화면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그에게 회화의 화면은 정면과 측면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떠나 언제든 서로의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가역적이며 고정된 중심이 부재한 유동적인 성질의 것이다. 정면과 측면의 유동적 관계는 물성과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의 회화에서 정면과 측면이 정해진 주종의 관계가 아니듯 기존 회화에서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물성과 일루전은「회화의 지층」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분리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균질하게 칠해진 단색 화면과 물감이 번진 화면 모두는 그 자체 확연히 물성을 드러내지만, 그와 동시에 푸른 물감이 번져나간 형상과 그것이 단색면과 병치되어 보여주는 이미지는 수평선을 사이에 둔 강가 풍경이거나 바다 위에 떠있는 섬들의 모습과 같이 구체적인 일루전을 드러낸다. 점 작업의 경우에도 캔버스와 물감의 물성을 하나의 화면 안에서 잘 드러내면서도 보는 사람에 따라 내리는 빗방울이나 바다 위에 떠 있는 고깃배의 불빛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이인현의 회화에서 일루전은 작가가 의도한 자기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물질의 성질 자체에서 비롯된 우연적 효과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는「회화의 지층」안에서 물성과 이미지 간의 뚜렷한 경계를 흐리며 그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모더니즘 회화의 절대적 본질을 견지한 채 바로 그 자체의 물성으로부터 모더니즘 회화가 거부한 일루전을 탄생시키는 역설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이인현_회화의 지층_캔버스에 유채_20×160×10cm_2006
이인현_회화의 지층_캔버스에 유채_60×240×10cm_2006_부분

「회화의 지층」은 제작 기법과 재료 사용에서도 전통적 회화의 그것을 벗어난 고유의 역설을 담지하고 있다. 그는 캔버스에 유성물감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묽게 용해하여 짧은 시간 안에 균질하게 펴바르거나 순간적으로 내려놓아 번지게 함으로써 유화가 가지고 있는 두터운 마티에르를 피하고 수성의 느낌이 나게끔 한다. 이는 유화의 재료를 사용해 유화가 아닌 듯 보이게 하는 그만의 전략이다. 또한 그는 물감을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에서 회화의 상징과도 같은 붓의 사용을 자제한다. 캔버스를 감싼 막대에 물감을 적셔 붓처럼 쓰거나 캔버스 천 자체를 붓대신 사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실제 붓을 사용할 때 조차 붓을 캔버스에 대지 않고 그저 물감을 옮기는 도구로써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붓질(brushstroke)'에 대한 전통적인 회화의 과도한 의미부여를 의도적으로 비틀고자 함이다. "물감을 묻히지 않은 맨 붓을 캔버스에 갖다 댄들 아무 흔적도 남길 수 없다. 그렇다면 사실상 붓은 영원히 캔버스에 닿을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그의 말에는 이러한 의도가 잘 드러난다. 또한 「회화의 지층」은 캔버스의 전형화된 형식을 전복시킨다. 이인현은 전통적 의미의 2차원 평면이 아닌 일정한 폭을 지닌 '3차원 평면'의 장방형 캔버스 형태를 중심으로 그 높이와 너비를 변형하고 심지어 막대형 캔버스나 정육면체 캔버스를 시도하며, 그것들을 임의적으로 조합하기도 한다. 이렇게 두 폭, 세 폭,... 대여섯 폭으로 된 그의 회화는 '한 폭의 그림'이란 상투어를 보란 듯이 비웃는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완성된 작품은 부분적 해체와 재조합, 반복과 재생을 거친다. 이전 작품의 캔버스 천을 뜯어 낸 틀 위에 새 캔버스를 씌워 새로이 작업을 하고, 이렇게 제작된 작품을 이전 작품과 결합하여 또 다른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에게 신작과 구작의 구분은 중요치 않으며 모든 작품은 개별작품으로서 가치와 의미를 지니기 보다는「회화의 지층」이라는 작가의 전 예술행로에서 하나의 과정으로 자리할 뿐이다.

이인현_회화의 지층_캔버스에 유채_각 120×360×10cm_2006

「회화의 지층」에서의 이 모든 시도는 예술작품에 대한 물신화와 예술가의 권위(authority)에 저항하는 작가의 의지에서 기인한다. 그는 예술작품을 신성시하거나 예술가를 신격화하는 예술의 근대적 신화에 반대한다. 사실상 그의 작업 행위는 단순한 노동의 반복 과정이다. 나름의 계산을 거쳐 제작에 들어간 이후 그는 일체의 상념과 욕심을 거둔 채 숨을 죽이고 동일한 시간과 긴장감으로 붓칠을 하고 순간적으로 물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직 캔버스와 물감을 만나게 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그에게 회화의 화면은 작가의 노동을 통해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두 물질이 조우하는 장소일 뿐, 작가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그의 회화에는 작가의 붓자국도 지문도 사인도 없다. 오직 물질과 그것이 만들어 낸 자발적인 일루전이 존재할 뿐이다. 이처럼 「회화의 지층」에서 작가의 역할은 최소화되며 작가는 작품에서 최대한 멀어진다. 작가주의에 반대하는 이인현의 이러한 예술에의 태도는 롤랑 바르트의「저자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텍스트의 유일한 의미의 기원으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러한 저자의 의도를 해독하는 것을 독서의 과정으로 여기는 기존의 문학작품에 대한 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바르트는 의미 발생의 근원으로서 저자의 절대적인 권위를 거부하고 모든 텍스트의 의미는 중의적이며 불확정적이라고 말한다. 중세 이후 인본주의와 더불어 생겨난 근대적 개념인 '저자(auteur)'는 항상 작품에 선행하며 작품을 부양하는 작품의 근원적인 존재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저자의 개념을 전복해야 할 하나의 신화로 보고,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나고 언술행위 안에서만 자신을 소모하는 '필사자(scripteur)'의 개념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현대적 의미의 필사자야 말로 언어라는 기원 외에는 다른 어떤 기원도 가지지 않은 채 선행하는 글쓰기를 모방하고 "바닥이 없는 거대한 사전으로부터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리는" 진정한 의미의 작가인 것이다. 이럴 때만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으로서의 텍스트가 가능하며 텍스트의 의미의 통제권이 독자에게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인현의 회화는 이러한 '저자의 죽음'이 비단 문학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몸소 보여준다. 화가는 자신의 회화에서 유일한 의미를 산출하는 자기표현의 주체가 아닌, 회화와 동시에 태어나고 회화의 제작행위 안에서만 자신을 소모하는 자로서 계속하여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다. 독창성(originality)이란 예술의 근대적 신화가 만들어 낸 허상일 뿐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화가는 작품에 최종적인 의미 부여를 지연하면서 계속하여 그리기의 공간을 답사하는 자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인현은「회화의 지층」을 떠다니는 수없이 많은 기표(물성) 가운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의(이미지)를 방조하면서 회화 자체를 탐구하는 바르트가 말하는 바 진정한 의미의 작가 - 현대적 필사가 - 인 셈이다. 작업의 결과물로서 완결된 하나의 예술작품보다는 일련의 생성과정으로서의 예술행위를 보다 중요시 하며, 유사한 것들의 반복과 차이 속에서 그 의미를 더 풍부히 하는데 주력하는모습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이「회화의 지층」에서 이미지의 변화가 중요치 않으며 그의「회화의 지층」연작이 계속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인현_회화의 지층_캔버스에 유채_각 120×360×10cm_2006

삼년 만에 열린 이번 개인전에서「회화의 지층」은 보다 다양하고 풍요로운 양상을 띤다. 단일한 종류의 연작을 선보인 지난 몇몇 전시들과 달리 이번 전시에서 그는 그간의 여러 제작 방법을 망라하여 그야말로 다채로운 '회화의 지층'을 보여 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면과 면이 만나는 모서리에 가로선으로 물감이 번져 나가는 화면이다. 캔버스로 감싼 각목을 물감에 적셔 넓은 캔버스의 모서리에 갖다대는 방식으로 제작된 이러한 화면은 각목을 대는 각도와 시간에 따라 선의 형태와 길이가 달라지면서 섬이 되기도 수평선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일루전의 화면이 균일한 단색화면과 결합하여 두 폭이 맞닿아 이루어진 작품군은 그의 회화의 특징인 물성과 일루전의 줄타기를 매우 잘 드러내면서 전시의 한 주류를 차지한다. 이밖에 「회화의 지층」을 대표하는 기존의 면 작업과 이전에 비해 그 제작방식을 조금 달리한 - 이전에는 붓끝이 캔버스에 살짝 닿아 점의 가장자리가 더 진했다면, 이번에는 붓끝을 대지 않고 물감을 캔버스에 내려놓기를 반복하여 점의 중앙이 더 진한 색의 계조를 띠는 - '점' 작업, 그리고 회화의 표면에 물감을 스치우는 가벼운 면 작업 등이 여러 점 선보인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특히 이러한 다양한 양상의 작품들이 어떻게 한 공간 안에서 잘 어우러질 것인가에 주력했다. 이는 그의 작업이 하나의 작품으로 독립적인 완결성을 가질 수 없고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항 속에서, 또는 과거의 작품들로부터 앞으로의 작품들에까지 연결되는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고려할 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런지 모르겠다. 이렇듯 반복과 차이 속에서 지속되어 온 의미의 다양한 층을 지닌 텍스트로서 「회화의 지층」은 이인현이라는 작가의 손을 떠나 관객에게 인도되며, 바닥이 없는 거대한 사전에서 계속하여 길어올릴 그 텍스트는 앞으로도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할 것이다. 프러시안 블루의 유채물감과 가공하지 않은 생 캔버스라는 '상수'를 가지고 수없이 많은 '변수'를 만들어 내는 이인현의 회화에 대한 탐구가「회화의 지층」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하여 더 많은 변주를 풀어내기를 기대해도 좋을 이유다. ■ 신혜영

Vol.20060915a | 이인현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