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NATOS-polis

지정(智淨)-김영수 사진展   2006_0927 ▶ 2006_1010

지정-김영수_황사가 낀 날 봄나들이 나온 가족과 연인_흑백인화_42×42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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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927_수요일_06:00pm

갤러리 나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Tel. 02_725_2930 www.gallery-now.com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에서 비타 누오바(Vita Nuova) ● 지정(智淨) 김영수의 사진들은 무덤들을 보여준다. 무덤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죽음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물질적 기호이다. 그래서 무덤은 문학이나 영화 혹은 그림들 속에서 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김영수의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무덤들을 보여주는 그의 사진들 역시 얼핏 보기에 메멘토 모리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럴까? 김영수의 무덤 사진들은, 적어도 내게는, 메멘토 모리를 연상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무덤의 상징적 기능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영수의 프레임 속 무덤들은 언제나 일정한 거리 저편에 있다. 그것이 유적지의 왕릉이든, 아파트 단지 뒤편의 공동묘지든, 혼자서 조용히 독서를 즐기기에 어울리는 뒷동산 어느 곳의 분묘이든, 김영수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무덤들은 메멘토 모리의 상징적 목소리를 낯설게 만들만큼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김영수의 무덤 풍경들은 단순히 죽음에의 경고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경고를 무색하게 만드는 또 다른 메시지를 읽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김영수의 무덤 사진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떤 것들일까? 나의 경우, 그 메시지는 세 가지로 읽혀진다.

지정-김영수_어느 가족의 설날 연날리기 추억_흑백인화_42×42cm_2006
지정-김영수_잔디가 좋은 공동묘지에서의 골프연습_흑백인화_42×42cm_2005

첫째 ● 지정(智淨) 김영수의 무덤 사진들은 '죽음의 문화 정치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무덤은 고래로 죽음에 대해서 두 가지 기능을 지닌다. 하나는 '잊지 않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추방하기 위함'이다. (Jan Assmann, '고대 이집트의 국가 정체성과 무덤', 1993, Muenchen). 다시 말해서 무덤은 죽은 자를 기억시키는 기능과 더불어 죽음 혹은 죽은 자가 살아있는 자들의 삶 속에 더는 개입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기능을 동시에 지닌다. 무덤의 이러한 이중적 기능은 자연과 문명 (혹은 역사) 사이의 뿌리 깊은 딜레마에서 비롯한다. 문명은 자연을 지배하면서 진보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자연은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인간들 자신이 이미 자연적 존재이다) 문명은 언제나 자연에 대해서 더블 바인드의 관계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죽음의 문화 정치학이다. 그것이 장례이든, 제사이든, 문화유산화이든 죽음의 문화들은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 밖으로 소외시키는 장치들, 즉 죽음을 기억시키면서 망각하게 만드는 문화정치학적 장치들이었다. 무덤의 문화도 다르지 않다. 무덤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메멘토 모리의 상징이지만 다름 아닌 그 상징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교양화 하고 일상화 하고 방어하면서 우리들 스스로가, 하이데거의 정언을 따르자면, '죽음 앞에서의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정-김영수_물맛이 좋은 약수터_흑백인화_42×42cm_2005
지정-김영수_죽은 자들의 공간에서 세상 바라보기_흑백인화_42×42cm_2005

둘째 ● 지정(智淨) 김영수의 무덤 사진들은 자본주의적 욕망과 죽음 사이의 아이러니를 깨닫게 만든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뿌리는 확대 재생산이고 무한대의 축적이다. 그러한 확대와 축적의 욕망은 G. 바타이유가 '죽음의 영역까지 파고드는 생명의 에너지'라고 정의한 에로스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인정하지 않는다. 그 욕망은 잉여 이익이 보장되는 곳이면 어디이든 시장으로 만들면서 침입한다. 그 한 예가 이 나라 병적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얼굴인 아파트 시장의 확대 재생산력이다. 가족의 전통과 문화가 싹트고 육성되는 장소가 아니라 맹목적인 투기 시장이 되어버린 이 나라의 거주 문화를 극렬하게 보여주는 아파트 시장주의는 죽은 자들이 거주하는 땅까지 개발이윤의 터전으로 만들면서 침입한다. 그 결과가 김영수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생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이 등과 배처럼 맞붙어 만들어진 이 나라 대도시의 우스꽝스러운 풍경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건 단순히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들 속에 담겨있는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이다. 자본주의적 욕망은 확장과 축적을 통해서 맹목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그 욕망이 결과적으로 보여주는 건 프로이트가 '죽음에의 충동'이라고 부른 자기파괴본능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묘지를 모태처럼 껴안고 빽빽이 도열한 김영수의 대단지 아파트 사진 한 장은 맹목적인 생의 욕망 속에서 죽음은 스스로 걸어서 삶 속으로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걸어서 죽음의 영역으로 입장한다는 걸 확인 시켜 준다. 죽음은 삶의 저편으로 가차 없이 추방당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들 삶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지정-김영수_어린이 날 선릉에서의 소풍_흑백인화_42×42cm_2006
지정-김영수_월드컵 기간에 금관총이 보이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축구시합_흑백인화_42×42cm_2006

마지막으로 ● 지정(智淨) 김영수의 무덤 사진들은 삶과 죽음의 뿌리 깊은 이분법으로부터 우리를 깨어나게 만든다. 죽음의 문화 정치학이든 자본주의적 죽음에의 충동이든 우리를 죽음과 화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이분법 때문이라면 김영수의 사진들은 생과 죽음이 사실은 너무도 가까운 이웃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역설적 이미지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추구되는 오늘날의 맹목적 삶 속에서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 죽음이 아니라 생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사진은 묘사할 뿐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J. 사코우스키의 정언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삶 속에 자리 잡은 무덤들을 파인더로 포착해서 보여주는 김영수의 무덤 사진들은 죽음의 힘을 경고하는 또 한 번의 메멘토 모리가 아니다. 삶과 죽음이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영역 안으로 맞물려 있는 그의 무덤 풍경 사진들은 비타 누오바(Vita Nuova), 즉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껴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생 그 자체의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 메멘토 모리에서 비타 누오바로 돌아서기 - 아마도 이 반전의 경험이 김영수의 무덤 사진들이 보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메시지일 것이다. ■ 김진영

Vol.20060927b | 지정(智淨)-김영수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