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조각 퍼포먼스-생명의 고리

이행균 조각展   2006_0927 ▶ 2005_1014

이행균_무사유_오석_180×130×22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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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927_수요일_05:00pm

세종문화회관 데크프라자 서울 종로구 세종로 81-3번지 Tel. 02_399_1154

갤러리 도올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02_739_1405

무사유 ● 이 말의 표면적인 의미는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생각을 결여한다는 수동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비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실천하고 암시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소크라테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공자),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비우는 행위(불교) 등을 내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특히 불교에서의 자신을 비우는 행위는 진아(진정한 자기)를 획득하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로서 행해진다. 그렇다면 진아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비워야할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화된 나, 제도화된 나, 인공적인 지식의 산물인 도덕과 윤리와 관습에 길들여지고 종속된 나로서, 진정한 나를 옥죄고 속박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휴머니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마저 재고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인간적이란 말이 사회화되고 제도화되고 관습화된 도덕적 인간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사회화되기 이전의 나, 제도화되기 이전의 나, 관습화되기 이전의 자연적 인간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 이행균은 반가사유상(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우리 식 버전인)의 포즈를 닮은 인체조각으로써, 그리고 마치 스톤헨지의 거석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두상조각으로써 이러한 주제를 실현한다. 그런데 인체조각에는 머리가 없고, 두상조각은 그 속이 파내어져 있다. 이로써 자기를 비워내는 무사유의 실천논리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각각 인체의 사실주의조각과 두상의 양식화되고 추상화된 조각을 대비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로부터는 진정한 사유, 진정한 지식(지혜), 진정한 나에 대한 명상의 계기가 느껴진다.

이행균_윤회-상생_화강암, 모터_174×174×56cm_2006

윤회 ● 이 말 속에는 변화하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다. 즉 모든 존재는 그 자체 고정불변의 개체가 아니라, 변화하고 변질되며, 썩고 부패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환한다. 특히 존재를 이루는 이질적인 계기들이 서로 고리를 이뤄 물고 물리며, 이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분되지도 않고 그 계기들을 나눌 수도 없다. ● 이행균은 거대한 축을 중심으로 해서 천천히 움직이며 돌아가는 해골과 아기 조각으로써 윤회하는 존재의 비밀을 형상화한다. 이때 축은 거대한 유두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그 자체 생명의 샘과 존재의 근원을 암시하며,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거대한 자궁(모태)을 암시한다. 이처럼 생명의 근원을 축으로 하여 해골과 아기가 서로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해골과 아기는 애당초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지만, 전체 조각이 돌아가면서 그 각각의 상이 하나로 겹쳐지게 된다. 해골과 아기가 겹치고, 순환하며, 나아가 동격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해골은 죽음을, 아기는 삶을 암시한다. 이처럼 의식의 지층에서 구분돼 보이는 이질적인 두 계기가 무의식의 지층에서는 서로 만나게 된다. ● 프로이드는 의식보다 무의식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그리고 무의식의 지층에서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교차한다고 보았다. 한편, 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스(삶)와 타나토스(죽음)가 서로 단절된 것에서 인간의 한계를 보았으며, 이처럼 단절된 불연속성의 끈을 잇고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에서 그 한계를 극복하고 전인적 인간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이는 그대로 윤회에 대한 동양적 사유와 통하는 것이며, 윤회를 주제로 한 이행균의 조각에 나타난 존재론적 인식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윤회, 상생 ● 윤회로 나타난 주제의식이 다른 조각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작가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속을 파낸 한 쌍의 조각을 만든다. 그 형태는 마치 각각 음과 양으로 대비되는 태극문양을 떠올리게 한다. 서사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윤회의 주제의식을 음과 양의 상호관계성 혹은 상호작용성에 바탕을 둔 태극의 상징적 형태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음은 존재의 원리를 의미하며, 양은 그 원리가 드러나게 돕는 존재의 형상을 의미한다. 결국 음이 없는 양은 무의미하고, 양이 없는 음은 인식될 수가 없다. 주제에 나타난 상생의 의미는 이처럼 존재의 이원론적인 비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삶과 죽음이 물고 물리는 윤회에의 공감을 표명하는 것으로, 이질적인 계기들을 봉합하고 존재의 처음 상태(전인적 인간, 진아, 일자)를 회복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속을 파낸 조각의 빈 공간에다가 물을 채워 넣는데, 이것이 마치 수조처럼 보인다. 사실 물이야말로 온갖 이질적인 계기들을 자기 속에 포섭하여 흐르게 하는 윤회, 상생, 순환의 형상화, 그 진정한 화해와 치유의 계기가 아닌가 싶다. 작가는 이 수조 속에다가 일종의 나비 모양의 모형을 띄운다. 그 속을 파낸 겉돌 조각을 봉합해 만든 모형을 물에 띄운 것으로서, 부력을 이용한 수상조각을 실현한 것이다. 물에 뜨는 돌, 중력을 배반하는 돌, 마치 나뭇잎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돌로 나타난 이 모형은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재고하게 만든다. 이와 함께 작가는 자체 내에 동력을 도입함으로써 일종의 키네틱조각을 실현한다. 동력의 차용과, 같은 극끼리 서로 밀어내는 자석의 차용에 의한 움직이는 조각을 통해서 작가는 유희적 요소를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조각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이행균_윤회-생명의 고리_화강암, 모터_115×170×240cm_ 2006
이행균_좁은문_대리석_85×110×195cm_2003
이행균_돌조각 퍼포먼스

생명의 고리 ● 작가는 연이어진 고리를 매개로 하여 거대한 손의 형상과, 그 고리 중 하나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아기를 연결시킨다. 아기는 고리에 연결돼 있고, 고리는 손에 연결돼 있다. 아기는 존재를 암시하며, 고리는 존재의 유전자 형질을 결정하는 DNA의 사슬을 암시한다. 그리고 손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 신적 존재(혹은 의식보다 결정적인 무의식)를 연상케 한다. 이로써 윤회, 순환, 상생으로 나타난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에다가 생물학적 사실이 덧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 생물학적 사슬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손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로써 작가는 인간복제와 유전자공학으로 나타난 세속적인 지식을 풍자하는 한편, 존재론적 사실이 과학적 사실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 이행균은 이렇듯 생명의 고리라는 주제의식을 서술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가 하면, 이를 퍼포먼스의 형식으로써 변주하기도 한다. 거대한 화강암 원석의 표면에다가 착암기를 이용해 구멍을 뚫고, 쉐루야(일종의 지렛대)를 이용해 원석을 낱개의 조각조각들로 쪼갠다. 그리고 이렇게 쪼개어진 조각들을 지게차를 이용해 들어올려 재구성하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공간구성 혹은 공간조형 작업을 전개하는 것이다. 전시 당일 현장에서 선보이는 이 작업에서의 부분으로서의 조각돌 하나하나는 생명의 계기들을 암시하며, 이를 재구성하는 행위와 과정은 그 계기들이 어우러져 진정한 생명을 잉태시키는 상생의 원리를 추상화한 것이다. ● 이 작업은 사실주의 조각으로 나타난 작가의 다른 작업들과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작업은 그 자체 부분 부분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전체 형상을 추출해내는 공간구성으로(생리적으로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 그리고 현장성과 일회성이 강조되기 마련인 퍼포먼스(전통적인 조각과는 그 생리가 다른)로까지 조각의 범주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행균_윤회-삶과 죽음 _화강암 _175×175×200cm_2006
이행균_윤회-두개의 나_대리석_32×65×90cm_2006

영혼의 진화 ● 이행균은 근작들을 관통하는 대주제를 '영혼의 진화'라고 일컫는다. 무사유, 윤회, 상생, 생명의 고리로 나타난 소주제들을 영혼의 진화라는 큰 틀 안에 아우른 것이다. 적어도 작가의 주제의식 속에서의 진화된 영혼이란 사회화되고 제도화되고 문명화된 인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회화되기 이전의 인간, 제도화되기 이전의 인간, 문명화되기 이전의 인간을 겨냥하며, 이로써 존재론적 인간과 전인적 인간의 회복을 꿈꾼다. 더불어 영혼의 진화는 결코 생물학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로 나타난 세속적인 지식으로는 거머쥘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지식을 비워낼 때에야 비로소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사실주의조각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묘사와 서사, 그리고 그 서사를 함축해낸 상징적인 문법으로써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해준다. ■ 고충환

Vol.20060928b | 이행균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