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Theater 'Alice' 1.5

공감각적 중장비 공연   2006_1014 ▶︎ 2006_1015

『토탈시어터 앨리스』쌈지길 공연사진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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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일시 1_2006_1014_토요일_07:00pm 공연일시 2_2006_1015_일요일_07:00pm

서울국제공연예술제(www.spaf21.com) 공식 초청작 2005올해의 예술상 수상작

기획 및 연출_홍성민 조연출 황우성_기획보조 이세옥외 18명의 스탭_45명의 출연진

관람료_무료

마로니에공원 및 아르코미술관 전체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892 art.arko.or.kr

홍성민 : 세계의 잠재성으로서의 연극 ● 영화와 연극을 나누는 차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본질적인 것 한 가지는 다음과 같다 : 영화는 상상의 재현을 '지연된' 공간 속에서 다루는 반면 연극은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현실화한다. 영화는 수많은 작은 분리된 기호들의 통조림 속에 꿈을 주입한 뒤에 그것을 이음매 없는 장치로 조합해지만 연극은 기호들을 한데 모아 완벽하게 새로운 현실을 생산하는데 소진한다. 그러므로 항상 동일한 가공의 시간을 무한히 반복해서 보여주는 영화 대신 우리가 연극에서 만나는 것은 매번 현실의 시간이 마법처럼 새롭게 변형되는 '이 곳'의 예외성, 즉 무대의 초월적 '지금'이다. ● 이러한 연극적 공간의 독자성은 때로는 현실을 재현하는 리얼리즘 서사 속에서 관습적 상징처럼 다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연극이 서사의 전달에만 충실할 경우 제도적 흔적으로만 간주될 수도 있지만, 역시 그것의 본령을 가장 극대화하여 드러내는 것은 연극이 현실로부터 가장 낯선 곳으로 이주해 갈 때, 기호들의 완전히 새로운 잠재성을 드러낼 때이다. 이러한 연극의 역사를 우리는 서커스와 잔혹극, 초현실주의 혹은 구성주의의 다양한 시도들,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에서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에 이르는 현대연극의 탈-언어적 노력들 속에서 발견한다. 이들이 상상하는 세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참조는 세계의 무한성, 즉 모든 가능한 세계들의 존재를 주장한 16세기의 철학자 지오르다노 브루노에게서나 혹은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에 이르러 가장 급진적인 형태들로 비유되는데, 예를 들어 『바벨의 도서관』에서 저자는 이 도서관 안에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잠재적 사건들 뿐 아니라 가능한 모든 철자들의 조합에 의해 서술되는 불합리한 소리들이 가리키는 경우의 수들까지 기록된 책들이 있다고 말한다. 우주 안에 일어날 수 있는 것들 중에 이 도서관의 어느 책들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없다.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끄』에서 말하는 천국의 두루마리는 어쩌면 바벨의 도서관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론과 우연론은 '무한정한 잠재성'이라는 차원에서 조우한다.

르네마그리뜨_위협적인 암살_좌 / 『토탈시어터 앨리스』정동환분_우
『토탈시어터 앨리스』쌈지길 공연사진_2005

세계의 잠재성은 어느 때고 그것의 머리를 든다. 그것이 무엇인가 라는 묻는 것은 매번 동일성의 동굴 안으로 떨어지는 위험을 함축한다. 세계의 잠재성은 우리가 '바깥'이라고 부르는 곳으로부터 비롯되며, 우리가 그 공고함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계의 근저를 변형시킨다. 20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예술형식을 거론하자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세계의 양태를 다루기 시작했던 초현실주의이다. '초현실'은 예술적 양식(style)이 아니라 세계의 양태(mode of the World)다. 레이몽 루셀은 이것을 관찰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20세기 연극에, 푸코의 표현을 빌면, '의미관계'(signification)가 아닌 '닮음'(resemblance)에 근거하는 재현의 공간을 복원시켰다. 그것은 언어가 세계로부터 분리된 상호-참조적인 네트워크가 아니라 사물들과 직접 교호하는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구조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의미는 불안정하지만 빛을 일으키며, 모호하지만 강렬한 사유를 생산하고, 세계의 장소들로부터 떠올라 먼 거리를 가까운 관계들로 대체해 나간다. 유사관계 혹은 닮음에 의거한 사고에 의해 세계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짝짓는다.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 가장 빨리 만나게 되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것들이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거리로 벌어지기도 한다. '닮음'은 숱한 이유들과 참조들을 거쳐 사물들의 배치 조건에 시적 필연성이라는 요소를 추가시킨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과 의미의 탈-유기화(dis-organization)로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이성적 질서에 빈 공간들을 만들어낸다.

『토탈시어터 앨리스』쌈지길 공연사진_2005

「컬트 로보틱스」에 이어 김은영과 함께 「앨리스」시리즈를 선보인 바 있는 홍성민은 유사관계의 현존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매우 놀라운 존재감을 불러일으킨다. 마그리트의 회화와 대중매체의 약품광고 캐릭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트랜스젠더(앨리스)가 갑자기 굳건한 근친성의 장(場) 안에 모여드는 것을 일종의 시적 필연성으로 이해하는 작가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을 하나의 텍스츄어로 직조해 내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약 20년간에 걸친 싱글채널비디오 작업을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 그리고 시간-운동의 관계에 있어 리퍼런스들의 배치를 주된 작업의 이슈로 다루어온 그가 연극적 표현 형식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컨텍스트와 리퍼런스의 배치에 있어 가장 궁극적인 도전은 리얼-타임으로 진행되는 연극과 같은 형식에서 관객과 작품이 동시에 주고받는 작용과 반작용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힘의 관계'(power relationship)일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극적 공간은 즉각적인 '사건'으로 채워진다. 그것은 사건을 둘러싼 모든 맥락과 참조들을 객석과 무대 사이로 끌어 들인다. 연극의 제도적 언어를 약화시킬 경우, 사실상 현실과 허구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의 허물어짐으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걷잡을 수 없는 현실적 요소들의 범람을 다룰 방법은 없어 보인다. 영화나 비디오, 연극 모두 현실과 내용의 분리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셈인데, 홍성민의 경우 이러한 분리는 외형적으로는 최소화된다. 그는 오히려 현실적 상황에서 형식적 조건들을 이끌어내는 '차용'(appropriation) 혹은 '차경'(借景)과 같은 방식을 즐겨 사용함으로써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현실의 관념적 위치를 바꾸어 놓는 데에 주력한다.

'펠림세스트 오페랄라라' 안양예술공원 공연사진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70분간 립싱크로 연기한다._2006

2005년 가을 홍성민은 계원조형예술대학의 '갤러리 27'에서 있은 초연에 이어 인사동 '쌈지길' 내부의 나선형 램프(ramp)에서 좀 더 '완성된' 형태로 「앨리스」를 선보였다. 그의 연극에서 관객들은 전통적 연극에서라면 자신들이 바라보아야 할 무대로부터 거꾸로 '객석'이 위치하는 곳을 바라보도록 앉혀진다. '컬트 로보틱스'에서도 적용된 이러한 원칙 -무대와 객석의 전도(顚倒)-은 이 연극이 갖는 의식적 구조의 얼개에 해당한다. 즉 관객들은 이 연극이 재현하는 현실을 이해하기보다는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극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입장은 현실과 분리된 곳으로서, 그곳이 바로 무대이다. 현실과 현실의 재현으로서의 연극 사이에 가로놓인 모호한 유사성은 한국의 전통적인 마당놀이에서와 같이 객석과 무대의 혼재 혹은 전도에 의해 직접적인 연극적 요소로 인용된다. 이러한 관계는 연극을 공연하는 장소가 옮겨질 때마다 함께 바뀐다. 홍성민이 '장소특정적 연극'(site-specific theater)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연출방식은 동시대 미술의 특수한 예술적 장르인 설치미술의 개념을 연극에 접목한 것으로, 하나의 작품은 그것이 놓여있는 장소와 시간대의 총체적인 맥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컬트 로보틱스」나 「앨리스」 혹은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각색한 「팰림세스트 : 오페랄라라」와 같은 작품의 구성은 장소나 시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컨텍스트로 작용할 뿐이며 결국 동일한 작품은 끊임없이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될 수 밖에 없다.

'펠림세스트 오페랄라라'안양예술공원 공연사진_2006
'펠림세스트 오페랄라라'안양예술공원 공연사진_2006

홍성민의 연극이 보여주는 것은 '가까운' 것도, '이해하기 쉬운' 것도, '친숙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 세계의 '양태'다. 아마도 비선형성(non-linearity) 못지않게 그의 작품들 속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유사관계로서의 세계를 복원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각적 시(poetic)로 현실의 의미론적 지배(politic) 내부에 담겨있는 세계의 잠재적 재현방식을 대체하는 것이다. 시는 기본적으로 '닮음'의 경로를 통해 세계의 유비를 생산한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고전과 통속,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기록과 구전, 이성과 광기, 아름다움과 혼돈이 근접해 있다. 배치관계를 다루는 이러한 종류의 미학은 새로운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가장 오래된 예술적 창조를 뒷받침하는 것이며 끊임없는 레파토리로 무한히 생성되는 것이다. 문학텍스트 「앨리스」와 오페라「라트라비아타」는 수많은 레파토리들 가운데에서는 잘 알려진 중점적인 레파토리들이지만, 홍성민의 연극 속에서는 그것들이 다가갈 수 있는 세계의 또 다른 이야기들로 이어지면서 경로로 사용된다. 세계는 이야기들의 전체일 뿐 아니라, 거대한 레파토리의 집합이다. 홍성민의 연극은 그러한 레파토리들이 조우하는 상위의 레파토리, 그리고 다시 그 상위의 레파토리를 재현한다. 그가 보르헤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은 '양피지' 외에도 이러한 상호지시구조로서의 배치물에 관한 관념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스타일이나 표현방식의 문제가 아닌,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미학에 대한 것이다. ■ 유진상

Vol.20061014c | Total Theater 'Alice' 1.5_공감각적 중장비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