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enomenological Perception

현상학적 보기展   2006_1018 ▶︎ 2006_1029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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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18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_문성식_박진아_이지원_최중원

기획_진휘연_정신영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참여연대 옆) Tel. 02_720_9282

총체적 인식에의 도전과 현상학적 보기 ● 기존 매체를 이용하면서도, 진실로, 진실로, 새롭게 그리기나 새롭게 표현하기가 가능할까 ? 극단적이거나 파괴적 태도 없이, 또한 현대미술의 복잡한 담론과 상충하지도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진부함을 벗어나고픈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여기 있다. 그들은 인류가 그토록 오랫동안 추구했던 사물의 실체와 그것의 표현 가운데 존재하는 인식의 변환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 관객과의 소통에 전혀 수동적이지 않다. ● 미술이 진실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에 궤를 같이 하면서 재현의 문제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담론 /철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 그것은 이미 만 오천년 전 동굴 속 벽화를 그리며 사냥의 성공을 기원했던 구석기 시대 선조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창에 찔리고 칼에 쓰러지는 황소와 사슴들은 그들의 '염원'을 담은 정신적 유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차적 세계관, 자연주의적 현현을 믿었던 그들의 종교적 진실이기도 했다. ● 고대 철학의 산맥을 넘고 근대의 다양한 사유를 거친, 2006년 현재에도 그 주제와 테마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인류는 여전히 이미지와 진실 , 그리고 그것을 파악하는 인식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여정에서 주체의 구성에 관해서도, 인지능력과 인간의 생물적 기관들에 대해서도, 또는 사물의 본질에 관해서도 논의는 진행되었지만, 결국 어느 것도 완결된 결과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 세상을 향한 인간의 1차적 인식/감각 기관은 눈이다. 그것을 통해 사물을 감지하는 능력과 범위는 다른 감각기관을 통한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고 중요하다 . 눈은 실체를 투사하지만, 인식이 그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에, 문제는 복잡해진다. ● 인간의 존재가 곧 인식이라 믿었던 데카르트의 후예들에게 눈과 뇌는 어쩌면 동일한 도구이자 인식의 장치로 여겨졌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思惟'의 근거가 시각과 연결된 '뇌'에 국한되기보다는 인간의 다양한 경험과 결부되어있다는 이견이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제기되었다. 현상학은 사용하는 철학자나 문맥에 따라 조금씩 다른 내용을 의미하지만, 적어도, 관념적인 단계에 머물던 우리의 인식의 공간적, 물적 차원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과연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 사고하는 유일한 기관을 통해서 행해지는 단선적 과정일까? 대상을 파악하는 방법은 시각외에 다양하고 , 그 행위를 완성하기 위한 여러 기관들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 후설(Husserl)을 위시한 일군의 현상학자들은 사고를 완성시켜주는 데는 신체의 다른 기관들, 예를 들어 손, 발, 귀나 코 , 그 밖의 감각기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각자가 가진 경험 (지식을 포함한)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적인 과정이 함께 수반된다고 주장한다. ● 그것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인식을 둘러싼 논의의 철학적 깊이를 잠시 접어둔다면, 시각예술에서의 '보기'와 '인식'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도 역시 데카르트식 단선론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이다. 작가들은 사실적 형태의 무게에서 자유로와진 후, 통일된 시점과 화면의 일치를 벗어버리고(추상), 투명한 작품의 성격도 거부하며 (뒤샹), 때로는 사물을 뒤집기도 하고 (올덴버그, 크기와 물성에서), 예술작품의 존재 방식이나 감상 방식을 파괴하며, 작가대신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작품이 완성되는 (미니멀리즘, 환경조각, 해프닝) 등, 일방적인 작품의 구성이나 수용을 전복시킨다. ● 또한 새로운 매체의 유통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을 필두로 기계적 복제가 가능한 매체의 탄생이후 예술가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와 무엇을 볼 것인가, 그것이 만들어낸 변화된 시각의 차이에 집중해왔다 . 그러나 지난 세기 작가들이 과거 작품의 존재에 대한 도전을 예술의 조건으로 여기거나 재미와 순간적 비틀기를 통해 새로움의 전통에 기여했다면 『현상학적 보기』 전시의 젊은 작가들은 기존의 예술 작품의 표현 방식에 존경을 멈추지 않은 채 , 보기와 연관된 사고의 층위를 넓히고, 그 단계를 실험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진지하고 일관되어있다.

최중원_스치던 풍경_디지털 프린트_50×50cm_2004

사진기로 담은 이미지를 화선지에 프린트함으로써 감각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최중원은 그의 짧은 이력에도 불구, 최근 많은 전시에 초대되고 있다. 그의 사진은 소박한 주제를 , 대담한 구도로 표현하면서 빛바랜 교과서의 삽화 같은 색감으로 감성을 자극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도 일상적 소재를 다루는데, 그의 작품 속 공간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생경한 느낌을 주는 상이함을 갖는다 . 공간은 또한 측량할 수도, 환원될 수도 없는 깊이와 크기를 갖고 있는데, 평면적이라는 설명보다는 다른 세계 같은 묘한 느낌을 준다 . 과거의 어느 때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관객의 기억을 자극하는 작품 속 시점들도, 우리의 뇌리에 존재하지만, 실재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지점을 가리키는 것 같다. 관객이 경험했던, 그러나 벌써 추상적으로 변해버린, 익숙하지만, 낯선 그곳은, 시각적 감각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감을 자극한다.

이지원_Light space 8_컬러인화_27×36cm_2006

이지원은 공간과 빛, 그리고 화면 안에서의 오해 또는 거짓에 대해 탐구한다. 그의 사진 작품은 격자의 구조 안에서 그것을 반복하는 상자모양의 공간안에 광선과 그림자의 대조를 담고 있다 . 양과 방향이 각기 다른 광선에 의해 섬세하게 차이를 보이는 공간을 열심히 파악하다가, 문득 그것이 자연 안에 놓인 소소한 크기의 공작물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언제나 평면 속 입방체에 '속기'를 자처하는 관객들에게 평면과 입체의 환영을 알려주는 작가는 사진이라는 기계적 매체의 감정 없는 표현 속에서, 다시 실체와 재현된 이미지간의 오해의 관계를 보여준다. ● 「light space 8」에서 장소를 옮긴 작은 입체는 실제 건축물의 공간 속에서 과감하게 부딪치며, 인공 광선과 장소안의 공간이란 다층적 조건을 보여준다 . 공간과 빛, 그들의 실체가 존재해도, 여전히 관객들은 화면안의 내용을 통해 꿈을 꾸고 , 상상의 영역을 확보하길 원하지만, 이지원의 작품은 그것마저 거부하면서 , 빛에 의한 공간 구조의 가장 기본적인 물성부터 차근히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박진아_로모그라피시리즈 섬_캔버스에 유채_135×196cm_2006

박진아는 4컷짜리 사진 찍기에서 구성과 내용의 힌트를 얻어오지만 전통적 유화를 구사한다. 그녀의 대상들은 4컷의 장면에 담기는데 , 마치 시간의 경과가 드러나는 듯, 움직임이 더해지고, 사물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조금씩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도상인 격자 안에 든 이미지들은 그러나 고전적 회화가 보여주었던 통일된 구성을 거부한다 . 시간도 사물도 관객들에게 분명한 모양을 전달하지 않고, 시간만큼의 거리를 둔 이미지들은 우리의 통일된 인식구조의 단단한 벽을 깨면서 '보기'의 다양함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녀의 작업은 관객들에게 어떠한 흥분이나 감성적 취향을 배제시킨 채 , 시각적으로 파악된 대상과 인식의 과정을 그대로 화면에 옮겨놓으면서 끈질긴 회화성의 힘을 전달해준다.

문성식_직사각형 정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324cm_2004

문성식은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 미성의 작가이다. 전통적 원근법에 적용받지 않는 그의 언덕과 정원은 언뜻 친절해 보일정도로 , 섬세하고 작은 터치로 이루어져있다. 공간은 분명 제시되어있지만, 동시에 생략되어있고, 충분하지만, 완전하지 않다. 살아있어 작가에게 말을 걸어오는 나무들과 , 비었지만 사고의 전제가 되는 풍경은 고전적인 그림 속 풍경화와 구체적으로 궤를 달리하면서도 설명을 배제한 채, 그것의 유기적인 자생력을 드러낸다. 그 정원, 그 나무들은 작가의 구체적 경험과 기억을 거쳐 , 관객들의 그것을 자극한다. 작가의 시각적, 경험적, 시간적 인식을 반영해주는 작품들은 그리기와 보기의 꼼꼼함을 수반하는 또 하나의 흐름/과정으로, 현상학의 단면중 하나로 보인다. 생동감과 낯선 생경함을 가진 , 그래서 이야기(narrative)의 함축에 적절한 문성식의 그림들은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회화 표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보기와 연결된 확장된 인식론으로 규정한 이번 전시에서의 현상학은 재현과 개념 사이의 복잡한 여러 담론들을 넘어서는 실마리를 보이며, 관객들에게 각자의 기억과 감성을 돌아보게 해준다 . 관념론적 한계를 벗어나 사물의 새롭고도 총체적인 경험으로 유도하는 인식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전시의 작품들은 긍정적이다. 그것을 제시하는 젊은 작가들은 때문에 한때 위기를 맞았던 평면작업 속에서 다시 '보기'의 기술을 강조한다. 그것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외적 요소들 -생산력이나 매체의 발달-을 포함하면서도 미술사적 지식과 지적 성찰이 반드시 전제된다고 믿기에 철학적이다. 믿음위의 새로운 미술 언어들은 관객들의 감상 요소의 확대와 잠자던 감각을 동시에 깨워주며, 앞으로 미술의 중요한 줄기가 될 것임을 알려준다. ■ 진휘연

Vol.20061020b | 현상학적 보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