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t see do C

이혜진 사진展   2006_1024 ▶︎ 2006_1102

이혜진_야한 조합이 주는 즐거움_검 프린트_40×5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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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25_수요일_06:00pm

갤러리 온 서울 종로구 사간동 69번지 영정빌딩 B1 Tel. 02_733_8295 www.galleryon.co.kr

무의식을 표방한 정물의 부조리성과 의식적 자기 진술 ● 정물(still life)의 근간은 고전주의에 있다고 본다. 고전주의의 정의는 경직된 규칙과 이성적 완결미에만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잦은 유행과 반복에도 쉽게 물리지 않고 선호되고 계승되는 어떤 미적 성향을 포괄한다.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열거된 사물을 화폭 가득 옮긴 것으로 요약되는, 이 유구한 사물 보기의 전통은 기원전 고대 이집트 무덤에 새겨진 식료품 그림에서 연원을 찾곤 하며, 중세와 르네상스에는 종교적 주제를 매개하는 용도로 쓰였다. 정물화의 전성기로 분류되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의 주 소재는 화훼, 과실, 크리스털, 그리고 모래시계였는데 이는 널리 알려진 바, 인생무상(vanitas)을 연상시킬만한 시간 흐름에 민감한 사물들로 선별돼 도덕적 교훈을 줄 목적에서 제작되었다. 미술의 근대성(modernity) 역시 정물과 함께 도입된 것으로 알려진다. 20세기 큐비즘의 견인차로, 세잔이 완성한 구도 및 원근법 모두를 무시한 정물이 공공연히 지목되니 말이다.

이혜진_사치스런 설거지_검 프린트_40×50cm_2006
이혜진_토할 권리_검 프린트_40×50cm_2006

이혜진이 전시를 위해 배당받은 벽면에는 총 22점의 정물 사진이 걸릴 예정이다. 점진적으로 명암변화가 있는 단색조의 배경 앞에 오브제 두어 개가 조합하는 공식은 일단 고전주의의 완고함을 닮아있다. 사물들의 얌전한 열거는 물론 정물의 전통이다. 더욱이 검 프린트(gum printing)의 번거로운 공정을 통과한 그녀의 정물은 고색창연한 회화성마저 인화지에 뒤집어쓴다. 고전주의와 정물의 전통 이외에 이혜진은 유구한 이론 하나를 작품 해설에 끌어들인다. 초현실주의. 작가의 고백에 의존 않더라도 그녀의 오브제 선별과 조합은 비논리적이며, 이런 조합의 비논리성은 은폐된 리비도의 진술과 관련한다. 본디 리비도란 직설적이지만 의식 영역에 들어선 리비도는 비논리적이 된다. 1924년생 초현실주의는 2006년 정물 조합에 어울릴까? 이혜진의 유사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상관성 없는 사물 조합과 그 결과를 섹슈얼 메타포로 연결시키는 의지로 나타난다. 이때 그녀의 정물 구성 방식은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유명한 시구 "재봉틀과 양산이 해부대 위에서 만난 것 같이 아름다운 Beau comme la rencontre fortuite sur une table de dissection d'une machine a coudre et d'un parapluie"의 인용으로 대표되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기법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고, 그것이 만들어낸 성적 메타포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일반과 근친성을 띈다.

이혜진_불면증으로 익사하다_검 프린트_50×40cm_2006
이혜진_양심으로 무장한 발_검 프린트_50×40cm_2006

육면체의 핀홀 카메라와 와인 오프너의 만남, 청진기와 3층으로 쌓아올린 감의 조합, 1973년 제조된 군용수통과 석류의 직렬 배치, 잔 위에 올려진 금붕어 따위는 로트레아몽의 시(詩)가 시각화된 결과다. 모가 빠진 구둣솔 위로 올려진 브로콜리는 비일상적 조합인데 작가는 이것에 「야한 조합이 주는 즐거움」이라는 직설적 제목을 달아줬다. '털 달린' 구둣솔과 '버섯모양'의 브로콜리가 각기 표상하는 건 대개는 유추 가능한 '무엇'이리라. 목장갑 한 쌍을 포착한 「한 쌍의 이마고」도 보기에 따라 남성기와 여성기를 알 듯 말 듯 재현한다. 이쯤 되면 「오래된 연인의 초상」은 예측이 너무 쉬워지는 감마저 있다. 그렇다면 정말 이런 구성은 작가의 의식 밖에서 답을 찾아야할까? 초현실주의와 정신분석학은 각기 인문학과 의학의 영역이지만, 상이한 두 분야가 결합해 무의식과 개별 사물의 상징성에 주목시켰고 예술적 상상력에도 큰 기여를 했다. 비록 사적 소견으로는 정신분석학적 풀이법에 큰 신뢰를 갖진 않지만 말이다.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이론적으로 차용해 세간에 널리 알린 초현실주의 예술운동에 대해 프로이트는 역설적이게도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유는 초현실주의가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개념을 오해했을 뿐 아니라, 오용했다고 프로이트는 믿었기 때문이란다. 데페이즈망 기법이 만들어낸 초현실주의 화풍에서 곧잘 관찰되는 비일상적 스펙터클이나 비논리적 사물배치에 대한 흔히 작가의 무의식적이 원인으로 제시되지만, 무의식과 의식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여서 엄연히 의식 하에서 계획되고 제작된 결과물을 두고 무의식과의 연관성으로 해설을 대신하는 건 모순이라는 얘기다. 때문에 프로이트가 초현실주의에 보였던 관심은 지극히 초현실주의자의 '의식'과 관계된다. 그들이 주장한 바, 무의식의 반영은 실은 의식 상태, 즉 에고(ego)의 영역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혜진_한 쌍의 이마고_검 프린트_40×50cm_2006
이혜진_힐의 높이와 동일한 욕망_검 프린트_40×50cm_2006

결국 기이한 사물의 조합과 비일상적 화면 구성은 작가의 '의식'과 관계한다. 이혜진의 고전적이지만 초현실적 정물 제시도 동일한 문맥 속에 놓인다. 스스로를 응시하는 의식이 부조리한 정물 구성의 뒤에 숨어있다. 해서 「서른아홉 번째의 또 다른 나」와 「불면증으로 익사하다」의 경우, 전자는 작가와 유관한 사물들로 39세를 맞은 해의 작가 자신에 관해 비교적 직설적인 고백을 이미지화 한 것이며, 후자의 경우도 선명한 사물이라 할 순 없지만, 이미 제목을 통해 충분히 의식 하의 작가의 고백이 들려지는 경우이다. 무의식의 영역을 오래도록 빙자한 초현실주의에 많은 예술가들이 변함없이 경도되는 건 왜 일까? 그것이 이 바닥에서 통용되는 암묵적 약속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놓고 털어놓을 수 없는 진술을 무의식의 탓으로 돌려 상상력의 재현물로 해명하는 태도와 그에 대한 관대함 말이다. 그래서 정물과 초현실주의의 전통에 의존한 이혜진은 고전적이다. 고전적인 그녀의 '의식이 투영된' 이 부조리한 '유사-무의식적' 정물의 구성은 실은 바로 지금 작가가 하려하는 혹은 해야만 할 욕망들의 구체적인 목록을 보여준다. ■ 반이정

Vol.20061024e | 이혜진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