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과 '읽기'

정상곤 판화·회화展   2006_1025 ▶︎ 2006_1031

정상곤_인왕산에서 본 서울_디지털 프린트_270×26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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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25_수요일_05: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22_9883 www.topohaus.com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읽었던 수많은 연대기적 사료와 이미지 자료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일상들을 끊임없이 인용의 형태로 분류 정리하였다. 그는 파리의 거리와 아케이드, 산책가(Flaneur), 철로 만든 구조물, 현대성, 새로움과 파괴 등 그가 살았던 도시의 삶을 규정하는 각종 메모와 인용구를 수집함으로써 현실에 대해 엄밀히 사유하였다. 벤야민은 해석의 과도함이나 주관적인 감정이입 없이 신중하게 현실과 사물에 개입하는 수단으로써 '인용의 몽타주'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역사적 자료와 인용구들을 수집하여 백과사전적으로 분류함으로써 "침묵하는 과거가 (도저히 풀 길 없는 복잡함을 유지하며) 제 스스로 말하게 한다"는 생각이었으며, 또한 인용이라는 현실-텍스트로서 보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세상 읽기(literacy)에 몰입하는 방법론이었다. ● 오늘날 우리는 대중매체에 보도된 기사와 사진이미지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또한 각종 미디어로 중개된 현실로써 삶의 가치를 판단한다. 현실의 사건과 이야기는 미디어의 내부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진 강력한 이미지가 되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에 의해 표상되는 삶과 내러티브는 미디어의 매개과정과 반복의 속성에 의해 현장감을 강조하는 유사-현실이 되고 점차 무감각한 일상이 된다.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현실의 장소인 사회적 실재(Social reality)가 미디어에 의해 이미지-현실로 대치되는 "상징적 교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감각은 황폐화된다. 현실과 삶에 있어서 슬픔, 비참함, 공포, 어두움 등 우리의 사유를 맑게 정화하는 반성적인 감정조차 미디어의 매개속성과 언어적인 정보의 과잉으로 인해서 표피적인 감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현실 속의 사건이 관점을 달리하는 미디어의 시선 속에서 왜곡될 수 있으며 그것의 범주와 상황에 따라서 다른 맥락으로 읽힐 수도 있다. 미디어를 소비하는 관점과 장소가 달라지고 용도가 수정됨에 따라서 사건의 내용과 의미가 전도될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바라보는 매체현실 속에서 단어와 문장과 이미지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것에 가려진 현재의 사실과 진실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정상곤_인용-2006 TV_옾셋 프린트_70×100cm_2006
정상곤_세 사람- Exodus_디지털 프린트_390×210cm_2004

나는 신문이나 TV 등 대중매체에 게재된 현실-이미지를 '인용'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본다. 그것은 마치 벤야민이 꿈꾸었던 "인용구로만 이뤄진 비평문, 그래서 무심코 일어날지 모를 감정이입까지 배제된 비평문을 쓰는 것"처럼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다. 작품의 시선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부터 삶의 양태를 담고 있는 현실의 이미지로 이동시킴으로써 현실 그 자체를 바로 보려는 것이다. 현실-이미지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형이며 우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현실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거리를 확보해준다. 나는 미디어로 재생되는 사건과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눈앞의 그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읽으려 한다. 미디어 속의 현실은 뉴스 가치에 의해 편집되고 현실성이 강조된 과잉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이미지는 그것과 붙어서 가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의미의 통합체이며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시대의 메시지가 스며있다. 나는 편집되고 강조된 과잉 현실의 껍데기를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미지와 함께 거울처럼 드러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현실이 진실하게 드러나도록 표현하고자 한다. 또한 현실공간의 깊이와 그곳에 각인된 삶의 흔적을 부가하여 이미지가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이고 투명한 본래의 모습과 의미가 드러나도록 한다. 작품에 인용된 현실-이미지는 우리를 드러내는 원천이며 새롭게 가공될 크리스털 이미지이다. 따라서 나의 작품에 있어서 이미지의 출처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결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 없도록 변형되거나 지워져 있더라도 말이다. ● 나는 현실-이미지를 인용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내 작품 속의 이미지는 현실과 맞닿아 있으며 나는 이 현실이 바르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이미지를 다른 맥락 속에서 재구성한다. 현실 속에서 일상화하여 황폐해진 이미지의 의미를 작품에서 회복하고자 한다. 인용의 방식에 의해 디지털의 공간으로 이동한 이미지는 현실과 함의관계에 놓여진다. 작품 속의 이미지는 배치가 달라지거나 이미지가 지워져 그 닮음의 정도가 손실되어도 여전히 현실과의 관계가 지속된다. 디지털 데이터로써 정보의 압축과 손실 혹은 이미지의 변형과 밀도의 차이조차도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생성된다.

정상곤_흐린 물__디지털 프린트_270×390cm_2006
정상곤_어두운 강_디지털 프린트_210×130cm_2005
정상곤_어두운 바다- k_디지털 프린트_150×150cm_2004

나는 대중매체에 보도된 사건 속의 이미지의 흐리게 하거나 애매한 관계 속에 놓이게 함으로써 사건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무력화한다. 「어두운 강」은 신문에 게재된 사건의 장소인 한강 이미지를 통해 우리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고자한 작품이다. 기사의 정황을 설명하는 사진의 배경에 그저 있었던 한강의 모습을 확대하여 작품의 중심으로 이동한 후 인쇄의 망점을 제거하면서 이미지의 경계를 흐리게 제시하였다. 디지털 공간으로 들어온 한강의 모습을 커다란 화면으로 확장시키고 두개의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이 작업 과정에서 생긴 상처의 흔적은 물의 출렁이는 흐름처럼 작품에 남게 되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서의 한강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으로서의 한강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어두운 바다-K,J,C」연작은 현실의 이미지를 완전히 소거함으로써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국가와 국경 등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자한 작품이다. 동해에서 해상훈련중인 한국 잠수함의 사진과 같은 바다에 새로 도입되어 배치되는 일본 자위대의 군함과 헬리콥터 사진을 보도한 양국의 신문에서 각각 인용한 이 작품에서 이미지의 제거는 이미지의 출처를 지우는 행위이다. 사건의 장소였던 바다를 남겨두고 그것을 설명하는 코드화된 이미지를 제거함으로써 이미지가 지시하고 있었던 고정된 의미를 반성하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실들을 무정형의 얼룩과 흔적으로 제시하여 시각적인 충격을 주고자하였다. 「인용-2006 TV」연작은 비디오테이프에 파편적으로 녹화된 TV 중계를 하나의 정지된 프레임으로 분절하여 결합하는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현실 속의 이야기는 작가가 임의로 정한 하이퍼 텍스트적 공간 속으로 들어오면서 한순간에 그 의미가 복잡한 상호 관계의 맥락에 놓이게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삶을 과거라는 일상으로 소비하는 무감각한 우리의 현실을 작은 단위로 나누고 다시 조립하면서 현실 이미지가 누락하고 있었던 지나가버리는 순간들을 작품에 가두고자 하였다. 반복되는 삶의 간극을 채워주는 순간들의 합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 정상곤

Vol.20061025e | 정상곤 판화·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