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풍경

박병춘 수묵展   2006_1026 ▶︎ 2006_1105 / 월요일 휴관

박병춘_새벽 하늘을 날다_한지에 먹_135×183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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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26_목요일_05:00pm

금호미술관 기획 초대전 후원_디키스코리아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실경과 진경 사이 혹은 실재와 그림 사이에 흐르는 풍경 ● 풍경은 나와 무관하게 저 홀로 펼쳐진 객관적 지평이 아니다. 풍경과 나는 상호 내포적인 관계에 놓여 있으며, 나의 주관적 전망 안에서만 그 형태와 의미를 갖는다. 풍경은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주관의 소산인 것이며, 주관이 자기를 열어 보이는 비전의 한 종류인 것이다. 그 속에 내가 내재된 나의 일부이며, 나의 연장이다. 이를 메를로 퐁티는 '우주적 살'이라고 부른다. 나와 풍경 사이에는 나의 육화된 의식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로써 풍경은 나의 하늘, 나의 나무, 나의 바람, 나의 공기가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네가 본 하늘과 고흐가 본 하늘이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람들은 이런 연유로 저마다 다른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들의 그림에 나타난 실재와의 객관적 닮은꼴은 다만 이를 유형화된 풍경으로 읽게 만드는 의식의 간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실재가 한갓 붓질자국으로 환원될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은 어떻고, 또한 공기는 어떤가. 결국 모든 실경(객관적 지평으로서의 풍경)은 사실은 진경(주관적 전망으로서의 풍경)일 수밖에 없다. 풍경은 그 자체 객관적 실재가 아닌, 실재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소산인 것이다.

박병춘_거제도를 날다_한지에 먹_130×162cm_2006
박병춘_낯선, 어떤 풍경_한지에 혼합재료_135×390cm_2006
박병춘_페러글라이딩을 타고 흑산도를 날다_한지에 먹_87×137cm_2006

박병춘에게 있어서 풍경은 저절로 주어진 객관적 지평이 아니라, 작가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는 창 그 자체이다. 그 동안 작가는 기억의 풍경, 금빛 풍경, 흐린 풍경, 검은 풍경, 낯선 풍경이란 창을 통해서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철저한 사생에 바탕을 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풍경들은 실재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선, 실재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소산이다. 즉 실재에 기생하면서도 궁극적으론 작가의 관념이 만들어낸 풍경인 것이다. ● 그 풍경들은 작가로 하여금 오랜 사진첩 속의 색 바랜 흑백사진을 뒤적이듯 사사로운 기억을 들추어내게 했으며, 노란 색(금빛) 필터를 통해 본 세상처럼 현재를 과거 속으로 밀어 넣게 했다. 그에게 풍경은 다만 그 지정학적 위치가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 속해 있는 것일 뿐, 그 실질적인 위치는, 특히 그 시간적 위치는 언제나 과거 속으로 되돌려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과거로부터 불러낸 그 풍경이 작가에게 때로는 흐릿한(흐린 풍경), 때로는 암울한(검은 풍경), 때로는 낯 설은(낯선 풍경) 기억으로 남겨진다. 이 모든 정서의 계기들은 사실상 작가가 자신을 투사한 풍경의 지점들, 자신의 주관을 투사한 삶의 성분들에 다름 아니다. 아득한 풍경이 자신의 주관과 삶의 성분에 따라서 흐릿하게도, 암울하게도, 낯설게도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결국 그 풍경의 변화된 주기는 그대로 풍경에 대한 작가 자신의 주관이 변화된 지점들을 엿보게 한다. ● 그리고 이제 작가는 흐르는 풍경 속에다가 이 모든 풍경의 계기들을 흐르게 한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풍경의 계기들이 그 경계를 잃고 함께 흐르는가 하면, 마치 주름처럼 주체의 성분들이 하나의 지층으로 포개지게 한 것이다(작가에게 풍경과 주체는 동격이다). 그렇다고 흐르는 풍경이 단순히 구분의 경계를 넘어 무구분과 통합의 단계로 도약하는(도사연하는) 논리적 비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 있어서의 실경(지금 여기에 현재하는 풍경)이 진경(그 풍경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간여의 소산인)과 혼연일체이듯이, 흐르는 풍경은 (마치 유기체와도 같이) 흐르는 기억과 사유와 개념의 생리(주관의 생리)를 암시한 것으로 읽을 일이다. 일면적으론 흐르는 풍경이 지금까지의 풍경 시리즈의 결정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전 풍경 시리즈에 나타난 풍경의 의미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실경과 진경 사이, 혹은 실재와 그림 사이에 흐르는 풍경이랄 수 있을 것이다.

박병춘_풍경 위를 날다_한지에 먹_172×270cm_2006
박병춘_검은 풍경_한지에 먹_190×960cm_2006_부분
박병춘_집이 있는 풍경_한지에 먹_155×135cm_2006

박병춘의 그림에서의 특징적인 사실은 실경을 바탕으로 해서 이를 스케치한 사생(寫生)첩의 작은 그림이 거의 그대로 크게 확대되어 그려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크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스케치 당시의 생생한 현장성이 큰 화면에도 그대로 옮겨지고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붓으로 그린 먹그림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목탄 그림과도 같은 표면질감이 특징이며, 또한 몽실몽실한 특유의 준법이 발견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명 몽준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어떤 이는 작가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특유의 준법을 라면준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만큼 작가의 준법이 자유자재하다는 뜻일 게다). ● 작가는 이 특유의 준법으로써 거의 화면이 꽉 차게 그린다. 주로 화면의 위쪽과 아래쪽에 가로로 좁고 길게 드리워진 하늘과 강을 제외하고는, 그 주요 대상인 산세(산의 형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처럼 꽉 찬 화면에서 여백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대신에 여백은 그려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 주름과 주름 사이, 준과 준 사이로 파고들어서 일종의 내적 울림을 만들고, 그 파동이 그림 전체에 퍼지게 한다. 이는 그림이 결정적이고 고정된 실체로서 느껴지게 하기보다는, 그 자체 잠재적인 운동성, 잠재적인 움직임을 내포하고 암시하는 형태로서 느껴지게 한다. ● 그리고 풍경의 특성상 옆으로 긴 그림들이 많은 점도 눈에 띤다. 원래 자연이란 이처럼 풍경이 옆으로 전개돼 보이며, 화면 뒤쪽이나 안쪽으로 중첩되면서 전개된다. 이는 대개 수직적 구도로 나타나기 마련인 문명이 그린 풍경과 비교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 자체는 그림에 쉽게 동화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 모든 그림을 하나의 붓으로 그린다(물론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 똑같은 농담의 먹을 찍어 붓을 세워 그리는가 하면 옆으로 뉘어 그리기도 하면서 대상에 대한 묘사와 함께 원근과 음영, 이 모두를 표현한다. 무수히 많은 붓의 움직임에 의해 생성된 필과 획이 엉킨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평면화의 경향성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평면화 자체는 구상(형상)보다는 추상의 경향에 가까운 것으로서, 이는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실경 사생에 바탕을 둔 생생한 현실감과 부닥치면서 상당한 긴장감을 연출해낸다.

박병춘_길이 있는 풍경_한지에 먹_270×171cm_2006
박병춘_몽환적 풍경_한지에 먹_172×278cm_2006
박병춘_낯선, 어떤 풍경_한지에 혼합재료_172×540cm_2006

이와 함께 작가는 풍경 속에다가 사사로운 경험이나 공적 사건을 그려 넣어 풍경의 지평을 일종의 시대적인 풍경, 시사적인 풍경, 서사적인 풍경으로까지 확장한다. 가족여행 장면이나, 여행하다가 들른 동료의 결혼식 기념촬영 장면을 그려 넣어 마치 사적인 일기나 일지와도 같은 일면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대통령 순방장면, 서울시장 후보들의 기념촬영장면, 데모 진압장면, 유기된 아이 등의 신문이나 매체를 통해 본 뉴스를 그림 속에다 끌어들인다. 작가의 풍경 속에는 이처럼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그 사회적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이고 공적인 사건 이외에도 패러글라이딩이나 거대한 풍선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이나, 숲 속에서 성행위에 열중하고 있는 연인들과 같은 해학적인 모티브를 그려 넣기도 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모티브들 자체는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단순히 자연을 대상으로 한 풍경을 넘어서게 해준다. 따라서 주제인 흐르는 풍경이란 이처럼 여러 이질적인 제 요소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녹아들어 있는 풍경을 말하며, 하나의 풍경 속에 여러 서사적인 계기들, 시사적이고 일상적인 계기들을 숨겨 놓은 마치 일기 혹은 일지처럼 읽히는 풍경을 말한다. ● 박병춘의 그림은 이처럼 실경에 대한 사생에 바탕을 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림에서의 정황 자체는 단순한 실경을 넘어선다. 예컨대 그림 속에서처럼 모래사장 위에 빨간 소파가 놓여져 있을 리가 없고, 화분이 놓여져 있을 리가 없다. 이것들은 차라리 집의 실내에나 놓여져 있을 법한 기물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다른 시간대가 그림 속에서 서로 중첩된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사생이 진행되는 현장과,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작업실에서 큰 그림으로 옮길 때의 시간대가 중첩되고, 실경과(현장에 속한) 생활 모티브가(일상적 공간에 속한) 중첩되는 것이다. 이렇듯 풍경으로서의 실경 속에다가 사사로운 생활사를 슬쩍 밀어 넣는 행위는 작가 자신이 풍경을 일종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비전의 한 형태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과 풍경을 동격으로 놓고 있음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 이외에도 작가의 근작에서는 전통적인 민화에 대한 재해석이 느껴진다. 예컨대 부부애를 상징하는 원앙 한 쌍이 산수를 배경삼아 유유자적하게 날고 있거나, 화려한 나비 한 마리가 허공을 날고 있는 그림에서의 민화적 모티브가 수묵으로 그려진 흑백의 화면과 대비를 이룬다. 그림 속에다가 일종의 의외성, 일탈성, 해학성의 계기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박병춘의 그림은 이처럼 점점 더 그 모티브가 확장되고, 때로는 논리마저도 넘어서는 여러 이질적인 계기들이 중첩돼 나타난다. 이는 실경에 대한 탄탄한 사생에 바탕을 둔 것이란 점에서, 실경과 진경이 긴밀하게 짜여져 그 표현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 고충환

Vol.20061026e | 박병춘 수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