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건반을 찾는 지도

최선 회화展   2006_1025 ▶︎ 2006_1031

03: 최선_다시, 어린장미를 사랑할 수 있다면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3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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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25_수요일_06:00pm

드림 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68번지 고당빌딩 3층 Tel. 02_720_4988 www.dreamgallery.org

퇴근시간, 러시아워를 뚫고 찾아 간 그의 작업실은 도심 한 복판의 외딴 방이랄까, 중심의 빈틈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선 성채라 할까, 낮게 혹은 지하로 들어가는 미궁이다. 몇 년간 쌓인 미완의 작품들이 주인의 시녀인 양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어느 해, 뜨겁게 벽을 장식했던 지난날의 전시 포스터 또한 세월의 변화를 실감한 듯, 유리창에 못 박은 채 침묵의 입멸에 들었다. 이 풍경을 본 순간 문득, 며칠 전 찾아 읽은 시 한편이 떠올랐다. 신문에 실린 몇 구절이 내내 가슴을 파고들어 전문을 구해 본 것이다. ●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 시의 첫 덩어리이다. 시가 떠 오른 것은 아마도 작가의 작업실이 내게 '몸의 내륙'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갔을 뿐인 그 미궁의 입구에서 나는 그의 '살'을 만지거나 '피부 속'을 들여다 볼 염두와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그 살과 피부라는 것이 작품과 작가의 내면일 터인데, 직감적으로 엄습하는 이 작가의 삶의 향취가 결코 유연하거나 말랑거리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작업실에 나와 있는 작품들의 대게는 화려한 '장엄(莊嚴)'의 색채처럼 빛의 파편들로 가득했다. 오호라, 나는 무엇을 직감했단 말인가! ●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가 거쳐 온 두 번의 전시는 직감의 현시처럼 나의 추론이 명료함을 얻었다. 작가 최선은 첫 개인전(2001)의 주제를 '권태를 쪼는 자아'라 명명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무언가를 그린다는 행위에 충실하지 못하다. 작품 낱낱의 얼굴은 무엇 하나 어떤 대상을 갖지 않으며, 재현을 위한 회화적 형식과 방법론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얘기는 최선의 '그리기'라는 행위가 실제 대상의 재현이라는 현상적 구조가 아니라는 것을 웅변한다. 그는 자신의 심연과 환영으로부터 떠 오른 이미지의 장면과 알레고리를 표현한다. 화면은 구름과도 같은 이 상(象)을 부여잡기 위해 요동치는 색의 난장이다. 그리고 이 색은 '얼굴-심연과 환영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질펀한 마티에르를 요구한다. 최선에게 있어 재현은, 시각적 현상이 아닌 심연 이미지에 대한 재현인 셈이다. 이러한 이미지 재현의 구조는 다분히 '추상(抽象的)'일 수밖에 없다. 몸에 각인되어 있거나, 혹은 기억되어 있는, 체화된 이미지들을 꺼내 색의 몸을 더하는 일, 이것은 그의 몸으로부터 탈각된 작은 섬을 구축하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몸의 내륙이리라.

최선_다시, 어린장미를 사랑할 수 있다면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00cm_2006
최선_다시, 어린장미를 사랑할 수 있다면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3cm_2006

알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작품의 제목들 ; '미열의 어둠', '다소 부드러운 우울', '나를 두둔하는 녹색줄기', '느린 균열', '이중적 외로움', '가장 지독한 슬픔-공허', 광막한 대지에 엄습하는 어둠처럼 그의 작품들은 암갈색과 회갈색이 주조를 이루며 전면을 지배한다. 작가의 삶도 자신으로부터 유리된 이 작품들과 맞닿아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는 이 시기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어디를 향해 움직이지도 않는 육체는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다. 육체를 방치함으로 인해 존재의 존엄함을 인식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 그러나 작품들의 대부분은 매우 직접적인 감정이입으로 인해 메타포의 진정성과 파동을 안정적으로 표출하지 못한 채 거친 호흡과 들뜬 감응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때로는 각각의 주제가 너무 무겁기도 한데, '불면'처럼 몇 몇 작품은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표면위에서 겉돈다. 그럼에도, 「보여지는 것」은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 하다. 화면에 대한 강한 압박, 마티에르의 적절한 배치, 색의 경영과 내면의 굴곡이 스피드하게 드러난 필선, 그리고 격렬하지만 절제된 형상성은 내적 이미지에 대한 추상의 에너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작업의지의 주된 경향이 다음 전시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두 번째 개인전(2004)까지 3년여의 시간이 교차하고, 작품은 마치 차원을 통과해 온 것처럼 탈바꿈했다. 주된 변화는 감정의 직조방식에서 조금은 구체적인 형상이미지의 주조로 변모한 것인데, 두터운 마티에르는 여전하되 색을 올리고 긁어내는 표현 형식의 실험성을 더했다. 예컨대, 드라이버로 색의 침윤을 벗겨내는 형식적 차용은 이전의 작품과 확연히 변별된다. 즉, 화면과의 마찰은 이전과 다름없이 아니, 훨씬 더 직접적인 양상이지만, '긁힘'이 만들어 내는 색의 해체와 섞임은 고유색의 명도와 채도를 줄이고 형상의 구축을 위한 '절제'를 보여준다. 이것은 이전의 작업과정에 비해 작품과의 맞대응에서 시간적 여유를 획득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즉, 작가는 이제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 안정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톤도 밝아졌다. 외에 다른 'Work'시리즈는 배면의 어둠으로부터 솟아난 화이트칼라가 표면을 장식한다. 그리고 형상들은 고대 암각화의 선화처럼 일정한 구상성을 띄고 있다. ●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 이 시기는 작품의 제목 'Work'이 보여주듯이 감정의 내러티브를 이름 짓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시간 여정을 등장시킨다. 한 색 위에 다른 색이 쌓이면 작가는 오래도록 그 앞에서 춤을 춘다. 화면의 수면 위를 쉴 새 없이 휘 저으며 상의 이미지를 건져 올리려는 그의 몸부림이다. 이런 시간이 잦을수록 화면은 시간의 지층을 형성하며 어떤 '무엇'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Work'의 이미지들은 명명될 수 없는 하나의 총체적 에너지의 표상으로 읽힐 수 있으며, 작가인 '나'와 나의 내면 이미지인 '작품'이 이제 하나이면서 제 생명을 끊고 나가는 잉태의 거친 호흡으로 탈바꿈된다. 이러한 탈아(脫我)적 변화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어느 일요일 아침의 풍경을 떠 올린다.

최선_Persona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1×53cm_2006
최선_Persona 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30cm_2006

"나는 창가로 다가가 쏟아지는 햇살과 흰 광목천 위에서 바래어져 가는 길을 바라본다. 아주 느리거나 혹은 너무 빠른 풍경 속에서 희디흰 꽃을 피워낸 저 나무의 이름을 목련이라 말할까. 아니, 그 꽃의 이름은 본래부터 목련이었을 것이다. 다시 찾아온 봄, 낯익은 배경은 위태롭고 모든 길들은 열려있거나 닫혀있다."(최선)● 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쏟아지는 햇살', '흰 광목천', '빠른 풍경', '희디흰 꽃', '봄'의 이미지는 이전의 암울함과 확실히 대비되지 않는가. 작가는 이 계기로 작품의 진동 폭을 급경사로 휘 달리며 '밝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빛'으로 대변될 수 있는 밝음이 '백(白)'에 정지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단조로워 보인다. 그래서 일까, 세 번째 개인전은 완연한 색의 만찬이다. 올 봄 3월에 개최한 이 전시의 카다록 표지에는 「오아시스를 만나다」라는 작품이 실려 있다. 나는 그의 '오아시스'가 모노에서 스테레오 색채로 변이되는 중요한 변수라 생각한다. 이제 그는 거칠 것 없이 색의 존재감을 끌어 들인다. 노랑은 노랑으로 파랑은 파랑으로, 명명된 색의 이름이 아니라 색의 발견이다. 마치 화면위에서 색은 처음 발견된 색의 가장 순수한 몸으로, 벌거벗은 색으로 약동한다. ● 이 시기의 작품들을 더 자세히 보자. 노랑과 파랑의 색조가 화면의 긴장을 이끌면서 맥놀이를 형성하고 있다. 면의 긴장은 색상의 면적과 구성적 면 분할의 선에서 비롯된다. 노랑이 전면화 되면, 푸른 색조는 한쪽으로 밀리면서 잘게 쪼개진다. 쪼개진 형국은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그림자를 닮았다. 보라! 빛으로 충만한 색의 황홀을 ; '나비를 쫓는 광대', '자화상', '공중정원', '황홀한 굴레', 전혁림이 통영 앞바다의 코발트 블루를 색의 군주로 내세웠듯이 최선 또한 빛의 군주로 이 천연한 원색의 색을 뿌리고 있다.

최선_Persona 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06
최선_Persona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3cm_2006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워크맨은 귓속에 몇 천 년의 갠지스를 감고 돌리고 창틈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 냄새가 올라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 냄새가 도시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여관의 말뚝에 매인 산양은 왜 밤새우는 것일까 ● 그는, 도시의 빈틈, 그 외딴 방에 다시 수인(囚人)과 같은 골방을 만들어 기숙한다. 한 치 아니라 두 치의 빛이라도 새길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그런 방을. 그러나 색의 비늘이 활개 치는 외딴 방은 햇살 가득한 창을 두고 가로수가 늘 염탐을 꿈꾸는 그런 방이다. 그러니까 입구는 지하계단인데, 창 밖에서 보면 이층집이 그의 작업실이다. 사실, 창이 너무도 전면적이어서 커튼으로 가려야 할 정도이다. 입구와 창이 소스라칠 정도로 이중적인 이러한 구조 속에서 그가 도달한 것은 창으로 상징될 수 있는 빛이요, 꿈이다. 나는 그의 빛에서 강물 냄새를 맡는다. "해질 무렵 강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이 불현듯 나로 하여금 일련의 잠재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다. 어느 사이엔가 의식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들이 감성의 문을 밀고 들어왔다. ● 이번에 전시될 작품들은 3월의 빛에서 더 잘게 부서진 모습이다. 색조는 푸른색과 보랏빛이 더 많아졌다. 색과 색이 서로를 밀거나 당기면서 긴장을 형성하던 화면 구성도 잦아들었다. 아주 작은 푸른빛들이 여유롭게 화면을 유영한다. 두터운 마티에르도 순간 사라졌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최선의 작품들은 종잡을 수 없는 회로를 가진 듯이 이쪽과 저쪽을 왕래한다. 사실, 난 그의 이런 작가적 태도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번엔 '얼음 건반을 찾는 지도'가 전체 주제이다. 그 안에서 ; '기억 재생 실험실(연작)', '다시, 어린 장미를 사랑할 수 있다면(연작)', 'persona(연작)', '얼음 건반을 찾는 지도(연작)'와 같은 소주제를 기획했다. 첫 회 개인전에서 추론했듯이, 그는 재현을 위한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잠시 살폈듯이,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상황이겠지만, 그의 이미지들은 추상의 상태로 전이될 수밖에 없는 제작구조를 취하고 있다. 중간에 구상성이 드러나는 지점도 실상은 내면의 이미지 구조에서 비롯된다. 떠오름의 상태가 구체적일 때 이미지는 사실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성도 종국엔 체화된 이미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직시하면 추상적 결과로 표출된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얼음 건반을 찾는 지도'는'몸의 내륙'에서처럼'지도=몸'의 구조로 파악된다. 나는 그의 지도가 그의 몸이며, 이때 그는 모든 '나'로 확장될 수 있는 상징체라 생각한다. 즉, 모든 '나'의 몸에 깃든 분절적 구조체로서 소주제들이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몸'과'빛'이 부딪혀 만들어 내는'소리'에서 근거한다. 망막이라는 스펙트럼으로 내 몸의'안'과 '통'하는 빛의 소리들. 그 소리의 색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구조가 이번 작품들의 낱낱이 아니겠는가. 그의 작품들은 몇 년 동안 무수한 부침과 탈각의 여정을 거쳐 왔다. 내면 이미지에서 색, 그리고 빛으로. 우리는 그 안에서 최선이라 하는'존재'의 실존을 거짓 없이 발견한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위 글에 인용된 시는 김경주 시인의 내 워크맨 속 갠지스이다. ■ 김종길

Vol.20061029c | 최선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