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기의 추억

임흥순 영상展   2006_1018 ▶︎ 2006_1107 / 월요일 휴관

임흥순_기념비 monument_디지털 프린트_20×3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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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_2006_1031_화요일_05: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서울문화재단_경기문화재단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구기동 56-13번지 Tel. 02_396_4805 www.altpool.org

2006년, 대안공간 풀은 구기동으로 이전하여, 새로운 대안제시와 활동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기획대관프로그램을 폐지하고 기획전에 집중하여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작가들을 발굴 지원하고, 학술, 세미나, 프로젝트 등을 확대하여 한국미술 담론 생산을 위한 지반을 다져나가고자 합니다. ● 「기획 초대」는 대안공간 풀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작가에 대한 비평적 인식을 확장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며 임흥순을 세 번째로 초대하였습니다. 임흥순의 「매기의 추억」展은 한국 근대화와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의 연장입니다. 작가는 왜곡되고 압축된 근대화를 통해 터부시된 죽음과 전쟁의 기억을 개인적 가족사를 통해 드러냅니다. 작업에서 가족은 아버지의 기억으로 나타납니다. 작가는 가족이란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연명하는 자들의 명분으로서 마치 유령과 같은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또한 가족이 사회적 관계를 습득하는 최소단위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가치에 대한 욕구로 인해 외면당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주체는 가족과의 자기 대면의 과정을 통해야만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환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통을 수반한 자기 대면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작가는 오랜 기간 동안 기록해왔던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업을 통해 가족이란 미시적 영역의 자기반성을 넘어 굴절된 한국 근대화와 역사에 대한 재인식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 대안공간 풀

임흥순_환영 an illusion_단채널 비디오_00:05:00_2006

임흥순의 전시는 혼란스러워 보인다. 한 쪽에 보수우익의 비분강계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 쪽에는 월드컵의 함성이 있고, 이런 집단적 분출 사이에서 한 개인의 죽음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이질적인 기억의 단편들을 한 자리에 회집시켜 공명하게 하는 힘은 대체 무엇일까? 유령들이라도 불러들인 것일까? 실재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 비실재성의 힘으로 우리를 무장 해제시켜 버리는, 그런... ● 아버지-국가-동일자의 심문 한 국가의 그 형식적 틀은 국가적 강제에 대한 수용의 미학적 태도로부터 완성된다.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로 취급해주는 사회적 태도가 그 적절한 예일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형성된 것은 겨우 30년 안팎의 일이다. 영구불변이라고 생각하는 국가의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면 이는 놀랄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축적된 국가폭력을 고려한다면, 30년이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다.해방 전후의 폭력과, 전쟁기간 동안의 민간인 학살을 포함하여, 군사독재기간에서 5.18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의해 자행된 폭력을 열거해 보면, 한국은 긴급조치로 유지된 비상 국가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폭력을 통한 지배와 종속이 문장이 되고 노래가 되면서 국가에 대한 미적 태도는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 태도 속에서 폭력이 내면화되고, 국가는 초월적 지위로 상승하게 된다. 이제 권위로서의 국가, 즉 아버지-국가를 위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전 국민적 애도 속에서 치러진 독재자의 장례에서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아버지-국가는 나에게 묻는다. '넌 누구냐?'

임흥순_행사 후 Subsequent Events_단채널 비디오_00:04:00_2006
임흥순_승리의 의지 Triumph of will_단채널 비디오_00:04:20_2004

정체성 ●「행사 후」,「승리의 의지」는 각 각 보수집회와 2002월드컵 때의 상황을 기록한 영상이다. 화면을 흑백으로 처리함으로써 마치 과거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환영」에 등장하는 헬기는 마치 5.18 광주학살 당시의 풍문 속의 그 헬기를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그것은 풍문 속의 헬기를 실제화 시키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헬기는 우리를 5.18이라는 특정한 사건에서 멈추게 하지 않고, 보다 더 근원적인 폭력으로 우리를 잡아당긴다. 이 폭력의 힘이 전시장에 산재된 이질적 사건들을 하나로 공명시키는 것일까? 폭력의 톱니바퀴와 서로 이빨을 물고 있는 것이 바로 동일성의 논리이다. 동일성은 자신 안에 내장되어 있는 배타성을 이용하여 눈 먼 폭력을 외부로 돌린다. 그리고 집단적 기억을 통해 내부에 벌어진 상처를 꿰맨다. 이렇게 작동되는 동일성의 논리 속에서 아버지-국가는 질문을 반복한다. '넌 누구냐?' 이 질문에는 단 하나의 대답만이 존재한다. '나는 당신의 자식이오.'

임흥순_잘 가시오 Good Bye_비디오 설치_00:24:00_2006
임흥순_기념비 monument_디지털 프린트_20×30cm_2006
임흥순_기념비 monument_디지털 프린트_20×30cm_2006

아버지-당신-타자의 질문 ● 나는 작가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를 기록한 「잘 가시오」를 보면서 당혹스러웠고, 불편했다. 보고 있는 동안 내내, 대면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 내 주위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질문, 고쳐 말하자면, 아버지가 죽었을 때 내가 과연 상가 집 곡쟁이들처럼 통곡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말이다. 이 질문의 곤혹스러움은 아버지의 죽음을 상상하는 불경스러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서로 남이면서 남이 아닌 모순적 관계로 묶여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당신'으로 고쳐 읽어보자. 아버지-당신은 내가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되는 최초의 당신, 즉 최초의 타자이다. 그가 타자라는 바로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자문해야 한다. 저 사람과 다른 나는 누구인가? 그러므로 아버지-당신은 나에게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최초로 던지는 자이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항상 실패로 끝나고 만다. 왜냐하면 혈육의 정을 끊을 각오가 서지 않는 이상 나는 나의 나 됨을 증명할 수 없고, 당신의 자식이라는 대답 속에서 나는 나의 나 됨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자식이 주고받는, 이 무모한 질문과 대답의 악순환이 증명하는 것은, 결국, 타자와의 관계의 원초적 실패를 증명하는 것인가? ●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실패를 봉합하기 위해, 자신을 폭력에 내던지고, 집단적 기억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꿰매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나는 당신의 자식이오.'라고 답하면서 아버지-국가의 품에 안기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질적 기억들을 한 자리에 회집시켜 공명하게 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원초적 실패에 대한 불안이 만들어 내고 있는 주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집단적 분출 속에 조용히 자리한 '아버지의 죽음'은 해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 잘 가시오. 나는 '잘 가시오' 라는 제목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 실패가 불러일으킬 그 불안한 전조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을 엿본다. 그리고 그것에 무임승차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잘 가시오'라는 말 속에서 편안하다. 하지만 아버지-당신이 던지는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잘 가시오'라는 말로써 유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던진 자의 장례는 치룰 수 있어도, 그 질문을 그와 함께 떠나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다른 가족 모두가 입회한 아버지의 장례식에 정작 작가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관찰자적 작가 시점이라고 해야 하나?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 해야 하나? 아버지는 남이지만 남이 될 수 없기에 관찰의 대상 또한 될 수 없다. 아버지-당신-타자와 나 사이에 관찰자적 거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불가능성에서 하나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면, 이 장례식에서 작가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를 위한 자리가 거기에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실패에 대한 근원적 불안 속에서도, 타자가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주체의 자리에 작가가 앉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고승욱

Vol.20061030e | 임흥순 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