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화-graffiti

김진의 회화展   2006_1101 ▶︎ 2006_1107

김진의_춘화-graffiti_실크에 먹_110×16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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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01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2층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춘화-graffiti ● 동양의 춘화든 서양의 포르노그래피든 대강의 뜻풀이를 하자면 남녀 간의 성교장면을 묘사한 그림 내지는 사진이다. 과거 동서양에 걸쳐 이름 모를 화가들을 포함하여 사람들 사이에 익히 알려진 대가들조차 광범위하게 다룬 주제이며 현대에는 더욱 다양하고 사실적인 새로운 매체들이 과거 춘화가 사람들을 흡족하게 만족시키던 역할을 대신하고 있을 뿐 예술, 문화에서 sex는 불변의 흥행카드이다. ● 첫 개인전의 포문을 여는 화가 김진의의 전시서문의뢰에 내심 글쓰기 만만한 추상화나 풍경 그림 따위에 대한 기대를 했건만 그녀의 작업실에서 작품들을 접하는 순간 대충 추상적이고 포괄적으로 희망이나 자아니, 성찰이니 하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쓰기 쉬운 서문은 글러 터졌단 압박을 느꼈다. ● 그녀의 작품은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적 특성을 기본으로 몇몇 남녀 간의 성교가 아닌 얼굴 없는 불특정 다수의 집단 성교를 보이는데,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림 속 공간과 배치에서 브르겔(Bruegel)(1525~69)식 16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 이것이 작가의 의도든 아니든 과거 브르겔의 작품 '바벨탑'의 기괴한 풍경과도 같이 그녀의 작품은 현대인들의 대표적 주거지인 아파트라는 닫힌 공간속에 단절된 체 살아가는 얼굴 없는 개인들 간의 형식적 성교에서 상징성을 찾을 수 있다. 브르겔의 작품이 인간의 무지함과 오만을 풍자적으로 그렸다면 그녀의 작품은 춘화를 통해 상징주의의 색다른 방향을, 즉 인간의 가장 기본적 소통 방법이자 최후의 목적인 성교의 방식으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이기와 병폐를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진의_춘화-graffiti_실크에 먹_110×160cm_2006
김진의_춘화-graffiti_실크에 먹_110×160cm_2006
김진의_춘화-graffiti_실크에 먹_160×110cm_2006

수동적이며 외소한 남성들에 반해 거대한 여성들의 능동적 자세는 현대사회의 강한 여권신장에 따른 남녀간의 교감(대화)방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여성들의 자신감과 강한 자아 그리고 독립심이 빨간 구두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지는데 반해 남성들은 외소한 성기만큼이나 보잘것없이 무방비로 그리고 여성에 의존적으로 발가벗겨져 있다, 그것은 여성적 시각의 포르노그래피의 개념적 존재여부에 대한 찬반양론을 떠나 기존의 남성적 시각의 관음적, 폭력적 춘화들과는 상이한 차이로 느껴진다. ● 요 몇 년 사이 국내파든 해외파든 전통적 미술의 cross-over식 성격의 작품들의 출현은 3류식당의 방대한 메뉴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의 성공여부를 떠나 다양한 먹거리를 내놓는 신세대 주방장들의 노력에는 한 푼의 덤이라도 던져주길 주저치 않다만, 그렇다고 퓨전음식과도 비견할 수 있는 그림의 색다른 시도들에 일반적으로 따라붙는 전통의 현대화라든지, 작품 소재나 재료의 재발견 내지는 해석이라 얼버무린다는 것은 작품평가에 있어 직무유기라 여겨진다. 이런 이유에서도 그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아파트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많은 인물들 간의 성교를 굳이 새로운 동양화의 재해석이라니 하며 평가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을 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다. ● 시대 변화에 따라 식생활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적 관습이 바뀌듯 지금의 퓨전 음식들 또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과거에서부터 쓰이던 것들의 변화일 뿐이기에 현재 미술해석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전통 재해석 논리 귀결은 하루살이 간에 내일 보자는 약속만치나 한심하게 들린다.

김진의_춘화-graffiti_실크에 먹_160×110cm_2006
김진의_춘화-graffiti_실크에 먹_160×110cm_2006

한 작가의 작품을 하나의 장르 속에 단언하듯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을터-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만큼의 다양한 사고가 있듯 한사람의 화가에게 있어서도 차별된 작품 경향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나무가 하나의 뿌리를 통해 다채로운 줄기, 가지를 쳐나가듯 미술가 또한 자신을 뿌리삼아 pop이든 classic이든 개념이든 행위든 별의별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과거의 미술가들이야말로 multi player였기에 미술가가 다양한 작업을 보이는 것은 전혀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다만 현재 그녀의 작품이 갖는 독창성과 위치가 앞으로 보여줄 더 다양한 많은 작품들의 방향을 제약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과 함께 약간 우려스럽다. ● 쉽게 말해 그녀의 작품은 춘화다. TV와 사진에 자리를 뺏긴 춘화의 재출현은 지금의 상투적인 동양화의 cross-over적 지루함에 돌 던지는 재미를 느낄 수 있기에 너무 반갑고 지금의 김진의의 작품이 갖는 다양한 상징주의적 요소들의 유기적 맞대응에서 느껴지는 신선함이 앞으로 10년이든 20년이든 사람들의 유쾌한 변태적 상상력에 끊임없는 자극을 준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 이화백

Vol.20061102a | 김진의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