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결정적 형상

송윤주 회화展   2006_1115 ▶︎ 2006_1121

송윤주_素-象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90×9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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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1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10:00am~06:00pm

공화랑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2번지 Tel. 02_735_9938 gonggallery.com

회화의 의식과 화가의 의식 : 송윤주의 그림들 ● 회화란 화가에게 있어서는 잔인한 세계이다. 거의 매일 엄청난 공을 들여, 또 그 만큼 엄청난 양을 화가가 그려댄다고 해서 소위 '위대한 그림'에의 성공이 즉각적으로, 측량에 따라 실현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 세계는 잔인하다. 심지어 성공에의 희미한 약속조차도 희박한 세계가 여기 그림이 생산-창조되는 영역이다. 그리기가 작가에게 부과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 여기서 온다. 다른 한편 그 세계는 화가 자신이 그렸다고 해서 그림이 작가의 의도나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현상하는 '투명한 거울'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잔인하다. 즉 화가의 그림은 죽은 사물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때로는 자기의 창조자인 작가의 의도를 배반하거나, 때로는 그가 숨기고자 했던 비밀까지를 드러내버린다는 데 회화의 잔인성이 있다. 예를 들어 자기 감각과 지각능력의 범위와 예술적 한계, 또는 현실 사회에서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으로서의 구차한 욕망을 낱낱이 작품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화가란 없다. 그러나 그림은 마치 숨을 뱉어 내듯 이러한 화가의 능력, 한계, 욕망을 평면 위에 고스란히 선과 터치의 결을 따라, 혹은 색채의 톤을 따라 발설한다. 이를 잔혹하리만치 엄격한 '회화의 진실성'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자, 사정이 이러하니 회화란 화가에게 여러모로 얼마나 잔인한 세계인가! ● 그러나 생각을 잠시 전환해 보니, 정말 한 수 위인 것은 정작 화가 자신이다. 왜냐하면 회화가 그리는 이에게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진실을 요구하면서도 어떤 보상도 곧바로 해주지 않는 세계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화가 자신이 그 세계를 끈질기게 부여잡고 견디기 때문이다. 화가 그 스스로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리기를 강요하거나 독려조차 하지 않는 현실에서.

송윤주_素-象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90×90cm_2006
송윤주_素-象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90×90cm_2006_부분

송윤주의 그림들과 그녀의 작업방식과 회화에 대한 태도를 보고, 듣고, 접하면서 드는 가장 지배적인 생각은 '이 작가가 회화에 대해 맹목적인 신뢰와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닌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현대미술을 하는 지금 여기의 모든 작가들이 예술에 대한 신뢰와 자기 예술세계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는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 시스템이나 특정 유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이해관계나 속된 말로 '뜨는 경향'에 따라 자기 예술세계를 정립-해체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유명-인기작가'로 포지셔닝 하기를 원한다. 날로 미술이 기분전환용 오락에 가까워지고, 그림이 팬시 인테리어 장식이나 고부가가치상품이 되어가는 것도 이러한 작가들의 태도와 일정 부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송윤주의 그림들에서 어떤 지적 유희의 계기나 어떤 세련된 문화 산물(culture+product)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작가의 면모가 현대미술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자극적이고 유동적이며 쿨한 성격과는 거리가 있고, 그녀의 회화가 소위 현대미술의 트렌드와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 화가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기 작업에서 수공(手工)의 양과 기법의 연마를 중시한다("나의 작업이 진행되는 방향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한다."-작가노트). 그리고 그 수행의 과정을 바로 자기 예술이 형성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어떠한 정답을 갖고 거기[그림]에 접근한다기보다는, 대략의 방향만 설정하고 작업을 진행하면서 중간에 변화들을 수용하면서 근접해 들어가려 한다."-작가노트) 그래서 송윤주의 그림들은 동시대 미술 담론 내지는 정치학의 내용들로 해석하거나 그에 편입시키기에는 일견 적당하지 않게, 자기 지시적이고 형식적이다. 즉 여기 이 그림의 내용이 지시하는 대상은 개인의 감상도, 일상의 소회도, 사회적 현실도 아닌 바로 회화 그 자체의 문법, 그리고 그 회화의 물질적 ? 형식적 조건과 작가의 수행이라는 점에서 자기 지시적이며 형식적인 것이다. 이와 상관하여 송윤주의 작가적 정체성을 굳이 정의해 보자면, 모더니스트에 가깝다. 그녀가 예술 자체의 힘이 예술 내부로부터 발현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회화란 화가의 수공업적 노동이며 그 작품이란 예술 형식과 표현의 산물이라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유독 송윤주는 자신의 작업 방식과 다루는 물질의 성격, 그리고 표현 기법에 집요하게 천착하고,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그림의 감상자에게도 그러한 형식과 요소들에 주목할 것을 요구해왔다. 지난 2002년 첫 번째 개인전에서부터 얼마 전까지 해왔던 「素」연작들은 특히 이러한 성향들이 두드러졌던 작품들인데, 장지 위에 흰색 안료를 얇게 반복해 발라 두터워진 그 표면을 송곳으로 파내면서 선묘한 백색 모노크롬 회화가 그것들이다. 이 그림들은 화면 전체를 균질화 하는 흰색의 정취와 그 표면 밑에서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먹색 선묘의 단아함이 특징적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림들에는 감상자가 읽어 낼만한 특정 내러티브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스크래치의 흔적은 기성의 사물과 유비시킬만한 선명한 단서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작품의 추상적 미감에 충분히 젖어들지 않는 경우, 이 그림들 속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작가의 지난한 육체노동의 흔적이며, 혹 나쁜 경우 작가의 모호한 태도나 관성적으로 그림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만을 발견하게 된다. 「素」표면 위 스크래치 흔적은 모더니즘 회화가 결국 도달했던 그 지점, 백색 텅 빈 캔버스에 힘겹게 남겨진 모더니스트의 작가적 의식(consciousness)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素」에 대한 이러한 감상은 정신을 집중하여 예술작품을 관조할 능력이 현저히 줄어든 우리 감상자의 형편 때문이기도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송윤주의 「素」 연작들이 그만큼 회화의 형식문법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어떤 그림에 많은 공력을 투여했다고 해서 그 그림이 즉각적으로 '성공적인' 그림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많은 경우 그 그림은 작가 자신이다.

송윤주_素-象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130×130cm_2006
송윤주_素-象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135×145cm_2006

작가 스스로도 이러한 난점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회화가 잔인한 것은 금세 어떤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으면서 작가의 빈곤한 상태를 낱낱이 발설한다는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그 세계를 쉽게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게 한다는데도 있다. 그리기의 경험은 화가의 몸에 걸린 일종의 마술적 각인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림을 그려본 이는 그 회화 세계가 주는 특이한 육체적 경험과 정신적 움직임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송윤주의 최근작은 그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며, 우리 감상자에게도 그녀의 그림들에 접근할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최근작들은 지난 「素」연작의 형식과 기법을 승계함으로써 송윤주가 '벗어날 수 없는' 혹은 '이미 자신의 몸과 정신에 각인된' 회화적 방법론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전히 장지 위에 흰색 안료를 반복적으로 포수(泡水)하여 화면을 만들고, 그 두꺼운 화면을 송곳으로 부조(浮彫)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최근 그림들에는 중요한 변화가 있다. 백색 평면 위에 '형상'이 들어선 것이다. 이제 평면은 더 이상 흰색의 얇은 한 꺼풀로 그치지 않고, 여러 선과 겹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보인다. 흰색 배경은 회화의 관념적 평면공간이 아니라 화면 중심에 들어찬 특이한 유기질 덩어리 혹은 비정형적 형상의 활성 공간이 되고, 그림은 무엇인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에 의해 규정된 말을 건넨다기보다는 감상자가 주체가 되어 그림 속에서는 아직 비결정적 상태인 형상으로부터 말을, 또 다른 이미지를 길어 올리도록 자극한다. 가령 해저 식물이 옆으로 유영하는 것처럼 그려진 그림을 보자. 이는 물론 그림의 이미지로부터 유추한 하나의 해석일 뿐으로, 이 형상은 해파리일수도, 여성의 틀진 머리일수도 있고, 여러 가닥의 선들이 묶인 덩어리일수도 있다. 형식적으로 보면 그저 표면을 긁어 만들어진 수많은 선들, 날카로운 송곳이 지나간 흔적에 불과한 것이 양감이 있는 사물처럼 보이고, 겉과 속, 안과 밖의 깊이가 있는 공간의 환영(illusion)을 감상자의 시각에 불러일으킨다. 어떤 것은 허공에 툭 던져진 짐 꾸러미처럼도 보이는데, 가까이 접근해 들여다보면 그 꾸러미처럼 보이는 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자락 선들은 난(蘭)의 줄기 같이 정갈하지만 매서운 획을 그리고 있다. 그림을 보는 이에 따라 그림 속 형상은 다르게 유비 또는 해석될 것이고, 그림과의 거리에 따라 화면의 공간은 다르게 지각될 것이다. 수많은 선들이 만들어낸 가닥들은 면(面)들이 되어 또 다른 가닥들과 얽히고설키며, 그 얽히고설킴 가운데 수많은 세부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감상자가 그림에 밀착해 볼 경우 이 세부는 카오스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화가의 의식, 그림의 의식과는 별개인 감상자의 의식에 달려있다.

송윤주_素-象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140×160cm_2006
송윤주_素-象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130×130cm_2006

미리 밝히지 않았지만, 송윤주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작업의 질료와 방법론만 따져보자면 동양화를 하고 있다. 장지와 먹을 쓰고 있으며, 예컨대 흰색 안료에 아교를 개어 화면을 반복적으로 밑칠 하는 행위를 '포수'라 하는 데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장르와 양식에 대한 구분이 희박해진 현대미술의 마당에, 작가가 동양화를 전공하고, 그 장르의 매질과 기법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새삼스럽게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송윤주의 이전 「素」연작회화에서부터 현재 형상이 새겨진 그림에 이르기까지 앞서 언급했던 태도와 성향이 이 작가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그리기의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태도, 그러한 수행의 과정이 어떤 몸과 정신의 고양으로 이어지리라는 믿음이 그 하나이다. 자신의 회화를 물성(物性)을 통해 탐구하는 성향이 그 둘이다. 전자가 동양화 화론의 기초라면, 후자는 형식주의 모더니즘 미학의 핵심이다. 근래 송윤주의 그림들에 감상자가 어떤 다른 사물이나 이미지와 유비시킬만한 형상이 등장했다고 해서, 회화에 임하는 그녀의 근본적 태도와 입장이 바뀐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근작의 어떤 그림들은 여전히 동일한 방법론으로 형태만 변주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품게 하기도 하고, 어떤 그림들은 작가의 지난한 수고와 맹목적인 그리기 수행만을 증거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이러한 판단은 아마도 작가 송윤주에게는 잔인한 말처럼 들릴 것이다. 혹은 '그렇다면 무엇이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가?'하고 내게 항변하고 싶어질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회화는 그저 정신의 작용인 것이 아니라 물질과 인간의 육체적 활동이 만나는 과정이며, 그런 한에서 다루는 매질의 속성과 그리기의 수행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 작가의 내부에서 물신(物神)이 되어버린다면, 그리기라는 행위가 관성이 되어버린다면, 작품 속에 정작 '회화'는 없을 것이다. 송윤주가 최근에 하고 있는 비결정적 형상 연작이 내용의 구체성과 더불어 각 그림의 개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화면 위에 긋는 선을 더 금욕적으로 단속하고, 자신이 그림의 수면으로 부상시키는 형상을 더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는 것은 우리 감상자의 몫이지, 화가의 관습적이거나 모호한 회화의식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 강수미

Vol.20061113f | 송윤주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