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cape

이성희展 / LEESUNGHEE / 李星暿 / photography   2006_1122 ▶︎ 2006_1208

이성희_Still 1-bush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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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22_수요일_06:00pm

갤러리 온 서울 종로구 사간동 69번지 영정빌딩 B1 Tel. 02_733_8295 www.galleryon.co.kr

더욱 더 먼 시선의 거리- 이성희의 사진 속 '그들'과 '우리들' ● 사진에는 움직임도 없고, 소리도 없다.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력으로 보여줄 수도 없으며, 거기 그 시간에 실제 존재하는 것을 부재(不在)로 만들 수도 없다. 이렇게 부정 어법으로 사진을 정의하면, 사진은 별로 힘 '쎄'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현실에서 사진의 힘은 아주 '쎄'다. 온갖 현란한 멀티미디어 영상이미지의 원천이 바로 사진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이 한 명의 미적 감상자에게든 사회 집단에게든 어떤 특별한 효과를 거두려면,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사진을 찍는 작가 주체마다 다를 것이고, 사진의 감상자-수용자-사용자-소비자가 사진에 대해 기대하는 바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의 사진이 개인의 내면을 관통하고 사회의 집단의식을 흔들 정도의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 이유는 사진가가 사진 속에서 자신의 심미적이거나 정신적인 활동과 사진 찍기에 수반되는 물리적 활동을 엄밀하게 교차시켰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사진에는 작가의 주제의식이나 의도만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찍기 위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 헤매고, 오래 기다려 발견하고, 대상에 밀착해 들어간 작가의 실천이 필수적으로 현상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사진이 그 매체의 특수한 조건, 즉 현실(reality)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 디지털 사진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일단, 사진이란 존재하는 것만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것을 찍기 위해서 사진가는 그 존재에게로 움직여 가야한다. ● 한 장의 사진이 진정 어떤 언어, 어떤 감수성, 어떤 행동을 보는 이로 하여금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사진 찍는 이의 '현재 상태'가 현상되어 있어서다. 그/녀가 어느 장소의 어느 자리에서 어떤 사고 혹은 심정으로 피사체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것을 찍었는지 알알이 감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진은 보는 이를 예민하게 만들고, 자신이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엇인가를 하도록 충동질한다. 그런 의미로 나는 이성희의『Lifescape』연작 사진들을 보고 있다. 핑크빛 셔츠를 입은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는 한강고수부지 사진(「still 6-stickers」)은 그 남자의 사연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남자의 허약한 목덜미나 그 머리 위로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스티커들 같은 세부에 주목하게 하는데, 어쩌면 내 마음은 이미 한강의 그 거대한 교각 밑으로 달려가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상상 속에서. 그런데 이것이 또한 사진의 딜레마이다. 사진은 나를 움직이도록 충동질하지만, 또 그와 동시에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이미지를 자세히 관찰하고 심미적으로 감상하는데 그치게 한다. 마치 사진가가 어떤 정황을 찍기 위해서는 그 사건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사진은 그것을 감상하는 주체에게도 '필연적 거리'를 강제하는 것이다. 이때의 '거리(距離)'는 물리적으로 대상과 떨어짐이기도 하지만 심리적·심미적·지각의 거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으로 보겠지만, 이 거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성희_Still 6-stickers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5
이성희_Still 4-cigarette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4

『Lifescape』사진 연작에서 두드러진 점은 피사체와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이다. 이 거리가 물리적으로는 '멀리', 심리적으로는 '가까이', 변증법적으로 작동하면서 이성희 사진에서 특정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연작 사진들은 작가가 삶에 대해, 타인에 대해, 풍경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그녀의 눈과 카메라가 어떤 관점에 위치해 있는지, 그녀의 가슴과 머리가 리얼리티 속에서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 감상자에게 별다른 과장도, 거짓도, 윤색도 없이 그것을 노출시킨다. 사진에서 보건데, 이성희는 피사체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고, 사진 속 인물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심정적으로) 다가가고 싶어 한다. 대형카메라로 찍은 정사각형 프레임의 사진 속에 고립된 점처럼 존재하는 '그들'은, 모두 혼자이고, 어느 정도는 넋을 놓고 있으며, 예상컨대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으로 저기 먼 곳의 사람들이고, 심리적으로 '우리들'과 가깝지 않은 낯선 '타자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는 말의 어감상, 실제로는 중심에서 벗어난 존재들, 혹은 주도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되거나 배제된 어떤 존재들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단적으로, '그들'은 마이너리티 타자들에 대한 지시어이다. 이성희가 찍은 '삶-풍경(Life-Scape)'은 이 사회화된 언어, '그들'이라는 낱말의 뉘앙스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찾아내고 현상하는 사진들로 보인다. 이 사진들은 역설적으로 '우리들' 안에 '그들'이 있음을, '그들'이 삶-풍경의 일부임을 딱딱한 프레임의 평면 위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이 사진들을 보며, 현실사회의 세속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에 대한 소외와 배제가 보다 큰 차원, 즉 인간과 그 인간을 둘러싼 주변세계라는 체계로 보자면 성립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의 편의상 또는 습관상 '그들'이라고 부르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이 사람'은 작가 이성희의 사진에서 보면 환경에 둘러싸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핑크빛 셔츠를 입은 고개 숙인 남자는 회색빛 한강과 그와 유사한 빛깔의 서울 대도시의 하늘, 콘크리트, 비둘기에 둘러싸여 있다. 그는 다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뿐, 그를 둘러싸고, 받치고 있는 것은 이렇듯 많다. 공사장 인근 수풀만 우거진 공터 속의 한 남자도(「still 1-bush」), 대낮 복도식 아파트의 난간에서 구부정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다른 남자도(「still 4-cigarette」), 송도 리조트의 텅 빈 공원에서 홀로 벤치를 지키는 어느 젊은 청년도(「still 5-ring」), 모두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다질적(多質的)이고 다양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있다. ●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성희『Lifescape』사진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작가가 위치해 있는 사진의 '현재장소'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가 찍은 이 사진들은 '그들'을 피사체로서 멀리 떼어두고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알고 싶고, 다가가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사진들인 것이다. 또한 이 사진들은 '사회로부터 배제되거나 소외된 그들'이라는 개념을 주제화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삶의 풍경'을 존재하는 상태로 보여주는 사진들인 것이다. 이는 이성희가 위치하고 사진 찍은 '현재장소'가 대상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물리적 거리가 상당하기 때문에 사진에는 모티브일 법한 '홀로 외로이 있는 사람'만 부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 가능하면 모티브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삭제하고 싶은 부수적인, 그러나 엄연히 현존하는 풍경들이 모두 고스란히 한 장의 사진 속에 담겨지게 된다. 예컨대 저 멀리 건설 공사 현장의 크레인이라든가 일률적으로 그어진 주차구획선이라든가 전경에 드리워진 시커먼 나무 그림자라든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포착되어 있다. 이것들은 만약 작가가 '혼자 있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에게로 전진해 카메라를 들이댔다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들이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사진에서 어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미를―사회적 소수자의 입장, 실업·파산·노숙자 등등의 사회 문제에 대한 제도적 개선―읽고, 그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으면서 이 사진들을 소비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이 지점에서 당신은 연말 의례적으로 열리는『보도사진전』의 사진들에 클로즈업으로 표상된 지친, 슬픈, 분노한 얼굴들을 떠올려 보아도 좋다.)

이성희_Still 5-ring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5
이성희_Still 9-boats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5

이성희는 삶의 풍경을 찍기 위해 카메라가 설 자리를 더욱 더 멀리 뒤로 물려버림으로써 피사체와 물리적 거리를 만든다. 이 거리가 감상자의 심리와 지각의 차원에서는 변증법적으로 전도되어 가까워진다. 즉 이미지에 대한 감상자의 미학적 향유를 부추기는 것이다. 동시에 지적 소비 혹은 사회비판적 의미의 투사를 막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는 대상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둔 사진, 즉 "사회적 시선"이 드러난 사진이 "섬세한 미학의 중계"를 거치게 되면서 그 비판성을 소실해 버린다고 논한 적이 있다. 우리가 그러한 사회비판적 사진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 정치적 힘을 무효화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타당한 말이지만, 지금과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비판들이 상투화되어 버렸고, 그것이 예술창작에 있어서까지 하나의 전형이 된 시점에서 우리는 다른 생각과 모색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진으로부터 전형화 된 모티브 채집이나 주제의식을 걷어내는 것, 나아가 사진을 이미 익숙해진 담론의 독법으로 읽어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희의『Lifescape』사진들을 보면서 도심 곳곳에 넋을 잃고 앉아있는 마이너리티들의 처지를 말할 수 있다. 직장을 잃고, 가족으로부터도 도외시된,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진 '그들'에 대해 우려스럽게 떠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수다 속에서 실제로 '그들'의 문제는 휘발되어 버리며, '우리들'이 속해 있는 복잡다단한 현실은 추상(抽象)되어 버린다. 이 지점에서 나는 오히려 작가에 의해 섬세하게 미학적 중계를 거친 사진의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그러한 사진은 성공적인 경우, 우리 감상자를 생각에 잠기게 할 것이다. 그 생각이 당장에 어떤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지라도, 앞서 분홍빛 셔츠를 볼 때의 나처럼 상상 속에서만 행동할지라도, 우리는 이미지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길 필요가 있다. 바르트가 또 논했던 바, "결국 사진은, 두려움을 주거나 격분시키거나 상처 입힐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기게 할 때, 파괴적인 힘을" 갖기 때문이다. ■ 강수미

Vol.20061121e | 이성희展 / LEESUNGHEE / 李星暿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