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of Artist

지호준 사진展   2006_1122 ▶︎ 2006_1128

지호준_서양화가 강형구_잉크젯프린트, 글로시_110×14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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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22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강형구_지석철_김영원_서정근_김희수_임권택_전무송 홍성훈_낸시랭_이두식_김일해_이주용_이경자_김인희 최병훈_신상호_이한종_정현숙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B1 Tel. 02_736_1020 www.ganaart.com

예술가들은 내면의 세계가 강하다. 자신만의 세계가 형성되어 있는 듯 어쩌면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표현하기 더 쉬울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이 창조한 예술작품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분위기만으로 그 작가의 성격이나 내면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난 그 내면의 세계를 느끼고 표현해 내는 것이 이번 작업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와의 교감이다. 잦은 대화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한 몫을 한다. 그냥 카메라만 들고 가서 찍는 것은 의미가 없다. ● 다양한 분야속의 거장들을 만나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예술에 대해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작업은 사진의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찍히는 작가들이 나에게 작가로 성장하면서 갖추어야할 넓은 시각과 작가에게 필요한 아우라가 무엇인지 느끼게 해주었다. ■ 지호준

지호준_최병훈 퍼니쳐 아티스트_잉크젯프린트, 글로시_140×110cm_2006
지호준_연극인 전무송_잉크젯프린트, 글로시_각 100×110cm_2005

예술가와 예술 사이의 신호● 젊은 사진가 지호준의 전공은 광고사진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에서는 무엇을 설득하고 구매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진들을 제작하지 않았다. 또한 앞으로도 그의 설득력 있는 광고사진을 볼 수 있을 성 싶지도 않다. 까닭은 그가 꿈꾸는 세계는 좋은 사진예술을 하는 것인데 공부하고 있는 것은 뜻밖에 광고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호준이 그의 사진예술에 광고사진 기법을 끌어들인 까닭은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현재보다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이미지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겠는가? 광고에 대한 이런 이해로부터 출발한 사진은 일견 견실해 보인다. 예술과 광고 이미지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던 사라 문, 헬뮤트 뉴톤, 리차드 아베돈의 사진처럼 눈 밝은 이들의 시선을 붙잡아둘 수 있는 사진을 향한 첫 발을 이 사진가는 내딛고 있다. 찍혀진 낸시랭의 도발적 사진처럼, 그의 젊음이 새로운 사진예술을 하고 싶은 욕망과 용기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첫 개인전은 그의 사진이 어떤 점이 새롭고 가능성이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자리이다. 거기에 사람이 있다. ● 찍히던, 찍던, 인물을 모델로 사진을 찍어본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사진관에서 찍는 것처럼 얼굴을 중심으로 상반신만 나오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을 가거나 졸업, 결혼 같은 기념이 될 만한 것을 남기기 위해 찍는 사진이다. 전자의 역사는 1870년에서 1880년까지 유럽에서 대유행했던 사진이다. 그 뿌리는 18C 이전 궁정과 귀족사회에서 신분과시를 위해 제작했던 초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18C 중엽, 신흥중산계급의 등장과 함께 시민사회로 빠르게 넘어올 무렵, 사진기의 등장으로 초상화는 초상사진으로 대치되었다. 나다르가 찍었던 꾸밈없고 직선적인 사진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사회적 위상과 개인의 존엄성을 드러나게 찍는 이 촬영법은 오늘날까지 인물사진을 찍는 모범적 선례로 남아있다. 한 인물의 순수한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빛에 대한 이해, 예술적 직관 그리고 주제에 대한 본능적 이해가 따라야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초상사진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급증하고 제작비용이 값싸지면서 특징 없는 초상사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들 사진은 영감이 없는 비역사적인 사람들을 찍은 것으로 '포켓에 넣을 수 있는 초상사진'이란 뜻으로 포트레이트(portrait)와 구분하여'에피지(effigy)'라고 했다. 나다르식의 인물촬영 기법은 파인 아트의 영역에서, 에피지 역시 여권사진 같은 증명사진의 현장에서 여전히 중요한 촬영기법으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인물을 찍는 기법은 인물을 중심으로 좀 더 많은 장식물들이 등장한다. 이들 사진에 등장하는 찍는 장소와 장식들은 인물이 입고 있는 의상, 헤어스타일, 장신구과 함께 찍히는 자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 혹은 내적세계를 은연중 드러내는 지표로 쓰인다. 이때 초상사진은 개인의 사회적 가면을 표출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지호준_도예가 신상호_잉크젯프린트, 글로시_110×160cm_2005
지호준_팝아티스트 낸시랭_잉크젯프린트, 글로시_140×110cm_2006

지호준이 찍고 있는 촬영형태는 후자의 경우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세밀하게 사진을 보면 이미 익숙한 서구식 촬영기법의 비판 없는 수용이 아니라 그것과 다른 화면구성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흥미롭게 만든다. 먼저 사진 찍기 위한 준비과정을 보자. 그는 이 사진들을 찍기 위해서 몇 단계의 촬영계획을 세웠다. 촬영인물에 대한 조사(그들의 작품세계, 개성 등)와 만남을 통해 촬영할 장소와 구도를 스케치하고 조명계획을 세웠다. 여기까지 보면 특이할 것도 없다. 마치 무대 연출과 유사한 연출 된 인물 찍기를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촬영의 매너리즘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아직 신인이어서 그가 받은 학습의 흔적을 무심결에 내비치는 것인가? 그러나 안도하는 것은 학습의 흔적이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드러나지만, 다른 일탈의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사진에서 사람(예술가)을 본 것이 아니라 동양적인 산수화를 인물사진의 틀로 변용하여 끌어들이고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동양적인 산수화(작품)속에 스며있는 자연(예술가)이었다. 자연이라니! 그렇지 않은가? 서양의 자연주의 예술에서 인간은 그 자체가 미(美)다. 그러나 동양의 자연주의에서 사람은 하늘, 땅, 바위, 나무, 풀 등 세상의 모든 것과 같은 하나의 자연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조상들은 산수화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서로 하나로 아우른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작업을 보는 지호준의 시각은 어떨까? ● 우리는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서 그에게 다가가지만, 마치 창조주처럼 예술가는 숨어버리고 예술만 드러난다. 예술가의 정신으로 충만한 작품을 통해서 비로소 그는 우리에게 하나의 의미로 남는다.'예술가는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 한다'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작품과 그것을 빚은 사람은 불이(不二)이다. 지호준의 사진은 자연과 인간이 불이(不二)이듯이 예술가와 그의 작품이 불이(不二)임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예술가를 찍었지만 사진 속에서 도드라지게 보여 지는 것은 예술가의 작품이다.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서 예술가의 정신과 작품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을 융합시키는 산수화의 기법이 은연중 드러난다. 예술가의 작품은 단순히 인물을 드러내는 들러리가 아니고 이들 작품을 통해서 한 예술가에게 들어가는 통로이다. 작품 속의 인물은 개별적이고 독립적 가치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작품과 삼투되고 있다. 지호준이 의식했던 안했던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의 앵글은 생태적으로 그렇게 동양정신과 생명줄을 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호준_서양화가 이두식_잉크젯프린트, 글로시_140×110cm_2006
지호준_서양화가 김일해_잉크젯프린트, 글로시_110×150cm_2006

그 사람을 보았다.● 롤랑 바르트가 쓴「카메라 루시다」의 첫 페이지는 작가가 우연히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놀라움을 느낀 감정을 쓰고 있다. 그 사진이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웨스트팔리아의 왕인'제롬'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지금, 황제를 직접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바르트의 이 놀라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받지 못한 바르트는'삶이란 이처럼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루어져있다'고 스스로 자신을 다독거린다. 바르트처럼, 나 역시 예술가를 만났던 흔적인 사진을 보고 있다. 거기에 영화감독 임권택이 있고, 도예가 신상호도 있다. 화려한 색을 자유 분방하게 캔버스에 묻혀가는 이두식도 있고, 작은 의자들을 낯선 장소에 쌓아두는 지석철과 연극인 전무송도 보인다. 그들은 자기세계에서 하나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성주들을 나는 대형으로 인화된 사진을 통해서 보고 있다. 개성 강하고 유쾌한 이 성주들은 모두 그들의 작품이라는 성 속에서는 성주이겠지만, 촬영은 단순히 이들이 성주임을 드러내고 재현하는 시시한 사진으로 마감하지 않는다. 사진가는 드러내고 싶은 것만 드러냄으로 은연중 사진가의 세계를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의 사진은 전면적 빛의 도입이나 꽉 찬 화면구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어두운 부분의 세밀한 묘사나 잘 정리 된 구도는 번번이 낭패를 본다. 그것은 무엇을 드러내기보다 전체적인 아우라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개의 다른 층위를 보게 된다. 하나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작업을 바르트가'제롬'의 사진을 보고 놀라움을 느끼듯이 퍼즐처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즐거움이고, 또 다른 층위는 이 젊은 사진가가 어떻게 당대의 예술가들을 앞에 사진기를 세워두고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카메라 앵글을 구사하는 가를 보는 즐거움이다. 그는 예술가들을 그들의 작품 뒤로 밀쳐놓고, 자신만의 당당한 사진 찍기 방식을 보여준 것이다. 이 당찬 사진가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작업합니다. 그리고 촬영할 때는 항상 행복합니다."모든 사진가가 꿈꾸는 작업태도이다.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과 재미있는 사진 찍기가 유효 하는 한 다음 사진에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 최건수

Vol.20061122e | 지호준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