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혼합

박용식_신치현展   2006_1125 ▶︎ 2006_1206

박용식, 신치현_너무나 단단해서 바람에 전혀 움직이지 않는 나무와 가벼운 바위 아크릴판, 발포우레탄, 에폭시,구슬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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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25_토요일_05: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전력홍보관 1층 Tel. 02_2055_1192 www.kepco.co.kr/plaza

박용식+신치현: 상상혼합-낯선 것조차 익숙해진 지금무엇보다도,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뜻밖의 만남과 같이 아름다운 것! (로트레아몽) ● 조화로운 전체'는 고전주의의 불변의 미적 원칙이었다. 작품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세계로 구축하되, 현실에 있는 듯한 없는 듯한 유토피아 이미지를 그곳에 뒤집어 씌웠다. 평화롭고 안전하게 펼쳐진 풍경에 감추어진 소실점은, 보이지 않는 권력의 손길이자 감시의 눈길이었다. 당연히 여러 이데올로기가 이곳에서 어김없이 작동했다. 물론 그것들이 균등하게 운동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종교의 경우 옛날의 좋았던 시절과 비교해 본다면, 한가로운 풍경들은 명백한 후퇴처럼 보였을 것이다. 성인과 성서를 직접 인용하며 주체를 호명했던 종교는, 저 멀리 아련한 유토피아의 형태로, 일회적 존재의 형식으로, 한발 물러나게 된다. 이러한 '조화로운 전체'의 이념적 뿌리는 봉건주의 지역공동체였다. 사람과 공간과 사물은, 위에서 매겨놓은 가치의 체계에 따라서, 자신의 가치를 굳건히 지키며 서로를 규정한다. 이것은 고전주의의 미적 원칙과 정확히 대응한다. 화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위계관계를 맺는 것처럼, 공동체의 존재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의 신분제도와 지리적 상징체계를 떠올리면 쉽겠다. 농노는 여기까지 영주는 저기까지, 무엇은 주변에 있고 무엇은 중앙에 있고 하는 식이다. 한마디로,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것이다.

박용식, 신치현_결코 적지 않은 사이(틈)_나무에 아크릴채색, 아크릴판_2006
박용식, 신치현_너무나 단단해서 바람에 전혀 움직이지 않는 나무와 가벼운 바위 아크릴판, 발포우레탄, 에폭시,구슬_2006

이러한 양상은 고전주의 작품을 현대의 사진과 비교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전자는 부분을 자르면 전체와 부분 모두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지만, 후자는 부분을 잘라도 손질만 잘하면 둘 다 훌륭한 작품이 될 만 하다. 사진에 중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고전주의처럼 끌어당길 만한 형이상학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양의 법칙 정도일 것이다. "양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마르크스 이 철학적 테제는 예술작품을 상품구조로 불러들인다. 상품처럼 생산과 재생산이 용이한 구조를 띠지 않는다면, 존재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자본공화국의 주민등록증 같은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가 사진처럼 새로운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예술에 침투해 들어와 형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소실점의 감시는 사라졌지만, 상품이 옭아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것의 효과가 단숨에 나타나진 않았지만, 나타난 후에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팝은 창조자 예술가의 신위를 기름냄새 풍기는 작업장의 기술자로 만들었고, 고독한 유일신처럼 유일한 작품의 존재를 언제나 재생산 가능한 구조로 탈바꿈시켰다. 워홀의 「마릴린 몬로」를 생각해 보라. 전체는 부분을 끌어당길 구심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아예 중심 없는 부분의 관계로 변환되어 버린다. 우리가 『상상혼합』에서 주목할 사항도 그것이다. 이 전시는 여느 2인전처럼 작품과 공간을 사이좋게 배분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서로의 작업을 견주고 맞추는 등등, 좀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진척시키려 했다. 뒤집어 말하면, 독립된 작품이 일부러 부분이 되어 '새로운 전체'를 구성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전체는 오히려 전체보다 부분을 강조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오랜만에 귀향한 고향이 수몰된 꼴이라고 할까. 따라서, 문제는 흔적도 희미한 중심이 아니라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이다.

박용식, 신치현_뱅뱅 雲 위의 산책_아크릴판, 레진_2006
박용식, 신치현_초록 머리와 하얀 병_나무에 아크릴채색, 아크릴판_2006

「상상혼합」은 평범한 결합방식을 선택했다. 서로 공평하게 주고받는 것이다. 때때로 한쪽이 주연이 되고 한쪽이 배경이 되기도 하지만, 지배적 관계는 아니다. 예를 들어, 「초록머리와 하얀 병」에서 박용식의 머리와 신치현의 병은 어느 쪽도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 「한가로운 이곳에 그들은 이렇게 등장했다」 역시 신치현의 「소나무」를 배경으로 박용식의 소품들이 등장하지만, 날선 충돌은 보이지 않는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다. 알다시피, 박용식은 소인국(小人國)에서 벌어지는 소극(笑劇)을 연출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소인국인 것은 작아진 주체가 동물의 탈을 쓰고 곧잘 등장하기 때문이며, 소극인 것은 주체가 작아진 결과 현실과 불일치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일종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아이러니의 원래 어원은 '에이론eiron'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자기를 비하하는 인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직접 조각으로 연출되기도 하나, 사진으로 표현됐을 때 훨씬 효과가 좋게 된다. 주체를 줄여놓는 현실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서, 담담히 거리를 두고서 응시하는 탓이다. "아이러니양식의 실재투사는 아마도 실존주의 그 자체이리라."(프라이) 반면에, 신치현은 다분히 형식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작가다. 최근 그는 디지털이미지의 시각적 무의식(화소)을 전통적 방식으로 소환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렇게 2차원의 평면구조를 3차원의 입체구조로 끄집어낸 결과, 상당히 낯선 효과가 발생한다. 고충환이 '회화적 조각'이라 명명했듯, 평면과 입체가 교묘히 얽혀 있기 때문에, 회화와 조각의 익숙한 통념이 일순간 헝클어진다. 불가피하게 묘사된 대상보다 방식자체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두 작업이 서로 결합될 여지는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섣불리 박용식과 신치현의 작업방식의 공통점을 뽑아내서 근거를 확보해 보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박용식이 입체적 상황을 평면적 화면으로 옮긴다고, 신치현이 2차원의 구조를 3차원에 번역한다고, 없던 매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신치현이 「소나무」처럼 현실을 줄여놓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에게 존재의 '하강'을 문제 삼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리 보고 저리 재도 답은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유념할 것은 그런 식으로 결합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현재의 상황이다. 생산된 작품의 결과도 그것을 소비하는 감각도 지금은 익숙하다. 연결할 매개가 없어도, 형성된 작품은 충분히 볼만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앞서 '중심 없는 관계'를 언급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초점은 달라져야 한다. 「상상혼합」은 침묵으로 말하는 것, 보이는 작품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박용식, 신치현_한가로운 이곳에 그들은 이렇게 등장하였다_레진, 나무_2006

저 옛날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결합이 과연 아름다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는 충격을 불러일으켰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충돌시켜, 기존의 오래된 습관을 깨부수고 전에 없던 의미를 창조해냈다. 마치, 뿌리를 상실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낯선 사람들이, 인공으로 구획된 대도시의 광장에서, 공통의 이념을 내걸고 반란을 모색했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낯선 것조차 익숙해진 지금은 아름답지 않다. ■ 김상우

Vol.20061126a | 상상혼합-박용식_신치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