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깃든 사물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   2006_1129 ▶︎ 2006_1205

이은미_푸른 영혼_캔버스에 유채_150×180cm_2006

초대일시_2006_1129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2층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모든 것이 내 안 깊숙이 들어와서, 여느 때 같으면 끝이었던 곳에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내면을 지금 나는 가지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사물은 나와 어떤 관계인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사물들은 내 안 깊숙이 들어와서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던 내면에서 호흡할 수 있을까? 이은미의 네 번째 개인전, "숨이 깃든 사물"은 작가의 이미지 속에서 어떻게 숨을 얻고 살게 되는 것일까? ● 작가는 지금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말하는 법은 배우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 속에 그려진 많은 사물들은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작가는 사물들과 끝없이 관계를 맺고 바라보고 있지만 사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사물이 자신의 의식 외부의 무엇인가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물들은 작가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알 수 없는 소리로 끝없이 웅성거린다. 작가는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아니, 자신 속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지운다. ● 그래서 작가는 대상을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가 바라본 대상을 지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은미의 작업은 자신이 바라본 사물을 끝없이 지우는 과정이며 그림과 그림 속의 대상과 동일시되는 것을 경계(警戒)한다. 그리고 경계(境界)를 지우며 '영원'을 시간의 조각으로 찢어내어 떠돌기를 원한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사물들을 끌어내 외화(外化)했더라도 그것이 외부의 사물과 사이가 낯설다고 해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으로 다시 돌아가 스스로를 발전시키지도 않는다. 자신으로 돌아가는 형태에서 발전된 자신은 단순한 자신이 아니라 '정신'이 된다는 헤겔의 생각은 이은미의 작품과 닮아 있다고 보일지 모른다. 주관과 객관의 차이가 극복되고 대상과 주체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생겨나는 절대적인 정신(Geist)은 Ghost이며, 영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절대정신, 절대적인 것이 모든 사물에 가득 차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적 생각은 이은미의 작품 속에서 영매적(靈媒的)인 느낌의 사물들로 공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바라본 사물들은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아직 자각하고 있지 않는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경험해가는 존재로 그려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은미가 바라본 사물들은 작가의 속으로 들어와 일체(一體)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사물에 대한 절대성이라는 진리를 묻지 않으며 오히려 사물 속에 자리하고 있는 진리를 끝없이 지우며 비워내고, 다양한 관계들이 얽히며 생겨났다가 숨 쉬듯 사라지는 '흔적'만이 남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은미_상실_캔버스에 유채_60×80cm_2006

관찰자의 침묵이 그가 말하지 않은 사물들의 실체적인 그림자가 된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작가는 말하는 법 대신 말을 지우는 법을 배우고 있다. 작가의 침묵 속에서 사물의 흔적이 흐른다. 형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재현의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 사물들은 작가의 사유를 대신하기도 한다. 작가가 그린 사물들의 그림자는 끝없이 말을 건다. 이은미의 작품 속에는 구체적인 사물들의 형상이 보이지만 작가는 재현의 대상으로 사물들을 살게 하지 않는다. 평면의 캔버스 위에 붓질과 물감이 뒤얽히고 모여서 어떻게 이미지를 재현하고 의미를 가지게 될까? 구상인 경우 재현된 이미지에서 이 이미지가 세상의 그 무엇을 지시한다는 약속된 합의가 없다면 그것은 재현이 아니다. 이미지의 재현 요소를 통해 이미지를 넘어서는 것을 암시하게 된다. 하지만 그 암시는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는 이미지와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의미를 발생시켰다가 지우고 다른 의미로 옮겨가며 흩어진다. 그래서 작가는 말하는 법 대신 말을 지우는 법을 배우며, 사물들을 지우듯 흔적의 묘사를 남겼지만 그 흔적들은 끝없이 말을 건네며 이야기를 만든다. 이은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사물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끝없이 많은 상상의 말을 걸어온다. 사물들의 수많은 말들은 작품을 바라보는 대상에게 무엇인가의 이야기를 건네며 서사의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작가는 사물의 내면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이제 이야기를 품고 흔적으로 남아있는 사물들은 작가에게 있어서 대상이 아니라 서사적(敍事的) 배치물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은미_조용한 주름_캔버스에 유채_50×70cm_2006

미술에 있어서 서사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오래도록 미니멀리즘으로 대표되었고,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했던 우리의 모더니즘의 표현방식과는 낯설다. 객체적인 사물들을 시각이나 언어로부터 분리시켜 바라보아야 했던 환원주의적인 미니멀리즘 시각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물의 상태를 물(物, thing)이라고 지칭하며 이러한 물적 대상들 가운데 어떠한 외재적 간섭이나 개입도 필요치 않는 대상들을 즉자적(卽自的) 사물, 즉 즉물(thing-in-itself)이라고 부른 현상학적 관점을 수용했다. 이러한 환원적 접근은 예술적 대상의 본원적 형식을 중시하는 모더니스트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상 자체에 대한 지식이 대상을 둘러싸고 변화하는 관계보다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상 자체에 대한 지식을 중시하는 태도는 일종의 '주체화'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상과 주체를 동일시하는 일원론적 시각을 비판한다. 주체화의 과정이란 필연적으로 세계의 객체화를 불러일으키고 시선의 위계를 발생시키며, 세계 안에서 관계를 사유화하는 주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의 관점인 원근법에 대한 비판이 생기며, 주체화를 통해 발생한 의미체계에 대한 비판, 고정된 시간의 단위와 공간적 규범에 대한 비판이 생긴다. 이제 사물들은 고정된 시간과 공간적 규범을 벗어나며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매순간 다르게 규정된다. 수많은 관계망에 둘러싸인 사물은 다양체가 되고 주체적 관점인 원근법적 시각을 벗어나 복수적 관점 속에서 각각 다르게 파악되는 대상이다. 대상은 이제 즉자적 사물이 아니라 세계의 단면으로서의 현재를 가시화하는 다양체이며, 배치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은미의 작품 속에서의 대상은 끊임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만드는 서사적 배치물이라는 변이(變移)를 갖게 된다.

이은미_펼쳐져 있음_캔버스에 유채_140×160cm_2006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 뒤에 있지 않으며, 그 자신에도 뒤가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의 표면일 뿐이다. 거기에는 그 어떤 시니피에도 그 어떤 의도도 없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이미지와 글쓰기』)● 이은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시각적 서사는 언어적 서사와 달리 구체적인 단어와 개념들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비개념적인 이미지와 사물들의 연결, 배치를 통해 함축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시각적 상관관계를 서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개념과 이미지, 사물들이 서로 바라보며 의미의 관계들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개념은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그것이 구성하는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가리키며, 이미지는 역시 개념으로 치환되려하고 대상으로서 다루어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각적 구성물로서의 작품은 분석이나 해석, 사건이나 의미의 발생 등을 통해 언어적 서사로서의 등가물이 생산된다. 시각적 서사란 바로 언어적 서사로서의 등가물이 만들어지는 생산적 형식이며 이것은 각각의 시각적 대상들이 이끌어내는 다양한 의미의 맥락과 연상, 연결, 함축, 지시 등을 통해 잠재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가능한 의미의 구성이 포함된다. 그렇지만 이은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시각적 서사는 작가의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작품 속의 사물들이 만든 서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물들이 발생시키는 잠재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그 구조를 바꾼다. 그것은 세상에 수많은 텅 빈 공간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 속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새어나오고, 다른 빈 공간으로 숨어들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말은 침묵을 포함하고, 세상의 모든 풍경은 여백을 포함하고, 세상의 모든 미로는 출구를 포함하며, 세상의 모든 문자는 수많은 의미의 관계항이 다가 올 수 있는 괄호를 포함한다. 그 빈 공간을 오고가는 모든 것이 '숨'이다. ● 그래서 이은미의 작품 속에서 생성되는 사물의 서사는 이야기를 말하거나 음성을 들려주는 서사가 아니라 '숨의 서사'다. 그 호흡 속에서 모든 이미지들이 발생했다가 사라지며, 수많은 사건들이 혼재한 속에서 끝없이 의미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재와 비실재의 공간 사이를 오고가는 들숨과 날숨으로 구성하는 잠재적 이야기들, 사물과 이미지 사이, 상상과 현실 사이, 그 경계에서 빈 공간을 발견하고 호흡하며 말없이 발생하는 서사이다. ● 작가는 사물들에게 진리로 가득해서 숨 쉴 틈 없는 공간을 지우거나, 빈 공간을 찾아 그려냄으로써 새로운 의미로의 변환을 가능하게 한다. 그 속에서 사물들은 끝없는 숨의 서사를 발생한다. 자신의 그림 표면에서 작품에게, 그리고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게, 그림 속의 사물에게 어떤 의미도 넣어주지 않는다. 작가는 그림의 표면에서 의미의 공간을 지우거나 혹은 텅 빈 공간을 찾아 그릴 뿐이다. 이은미의 작업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을 지우지만 사물의 주위를 맴돌며 나타나는 빈 공간을 그려내는 일이다. 그래서 작품 속의 사물들은 빈 공간을 찾아내며 이야기를 하고 모습을 드러내지만 작가는 의미와 형상을 지운다. 그 드러냄과 지움의 끝없는 반복이 숨이고, 이때 사물은 흔적처럼 남게 된다.

이은미_거기에 있는 것들_캔버스에 유채_140×150cm_2006

전 가끔 완전한 고요 속에 깨어납니다. 부족한 게 없는 완벽한 천체. 하지만 조심해야죠. 형태가 갑자기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외젠 이오네스코, 『의자』) ● 작가는「 숨 쉬는 정물」이 들려주는 흔적을 본다. 푸른색으로 뒤덮인 책이 창가에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숨 쉬듯 새어나오는 이야기는 방안을 채운다. 방안을 가득 채운 이야기는 호흡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방 안에 살고 있는 빈 공간에서 이야기를 꺼낸다. 쏟아지는 이야기들은 오독(誤讀)도 없이 읽히고, 어떤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채 흩어진다. 만약 방안에 살고 있는 모든 빈 공간이 채워지고, 이야기가 끝나거나 의미가 멈춰진다해도 작가는 그 속에 다른 이야기를 담지도 않으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사물을 지우거나, 빈 공간을 그려주거나, 그림 속의 창문을 조금 열어 둘 것이다. 그 틈으로 숨이 깃들고 작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으로 사물들의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창문 밖에는 숲이 있고, 그곳에는 소파가 놓여 있다. 「호흡하려하는 사물」은 숲 속의 나무 아래서 나타날 것 같기도 하고 사라질 것 같기도 하다. 그 소파는 실재의 세계와 비실재의 세계를 옮겨 다니며 살고 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소파가 나타난 실재의 세계이며, 사라지는 세계는 비실재의 세계이다. 하지만 호흡하려고 하는 소파에게는 실재와 비실재의 구분이 없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나타났다가 다른 세계로 이동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호흡하려는 소파를 바라보는 작가는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현실 사이의 빈 공간에 존재한다. 작가는 부족한 게 없는 완벽한 천체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형태를 지운 소파에 앉아서 현실을 벗어나 또 다른 현실로 옮겨가기를 꿈꿀지 모른다.

이은미_호흡하려 하는 사물_캔버스에 유채_120×150cm_2006

구석에서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는다. 구석에 있었던 시간들을 기억해 보면, 침묵이, 생각에 싸인 침묵이 기억될 따름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작가가 바라보는 사물들은 대부분 자신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이다. 캔버스와 의자, 물감, 가위, 탁자, 병, 수건, 음반, 오디오, 컵, 쇼핑백 등은 구석이라는 공간에 놓여 있다. 구석에서 사물들은 침묵으로 웅성거린다. 구석진 공간은 웅크려있지만 상상력에 대해서는 무한한 공간을 열어준다. 그 구석에서 사물들은 완결된 이야기의 전개가 정해지지 않은, 파편 같은 혼돈의 소리들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의미가 정해지기 전에 의미들이 또 생성되는 그 사이의 상상력 속에서 말은 생각에 싸인 침묵이 되고, 또 다른 이야기가 얼굴을 내민다. 그러므로 블라인드가 쳐있는 강의실 구석의 「침묵 옆에」서 나타난 푸른 사물들은 침묵 옆에 있지 않다. 푸른 사물들이 만드는 이야기가 침묵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침묵 옆에 있는 것은 그 공간 속에 스며든 사람들이다. 작가는 침묵으로 서사를 만들어내는 사물을 지워가며 그 사물의 옆의 공간을 보고 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물들은 스스로 얼굴을 가린다. ● 소파에 누워서 이불을 덮어 쓴 채 얼굴과 몸 가린 「푸른 영혼」에겐 숨이 붙어 있다. 그 숨은 푸른 이불 바깥으로 나왔다가 또 다른 세상을 안타깝게 붙든다. 그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는 이승과 저승 사이의 빈 공간을 옮겨 다닌다. 영혼은 하나의 본질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으로부터 거리와 간격을 둔다. 그리고 동일하지 않은 수많은 자신의 이미지를 호흡한다. 작가는 그 이미지 사이를 푸른 막으로 가리면서 자기일탈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 세상 속에서 붉은 빛의 막을 덮어 쓴 「모호한 더미」는 일상의 한 공간에 건물을 세우는 흙더미로 쌓여 있으면서도 일상 한가운데 무덤 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는 일상이 포함되어 있다. 도서관 복도 한 구석에서 「놓아 둠」이라는 제목으로 살고 있는 파란 색의 책 더미는 일상의 모습을 지운다. 그리고 감추어진 일상을 노출시킨다. 그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얼굴들이 스며들었을까? 「조용한 주름」은 그 얼굴들을 기억한다. 수건의 주름 속에는 얼굴들이 숨어 있다. 과연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주를 떠올리는 것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얼굴은 우주 자체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우주가 잠시도 쉬지 않고 얼굴 속에 겹쳐지기 때문이다. 수건의 주름 속에 묻은 우주는 익명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작가의 인연과 닿지 않지만 같은 현실을 떠돌고 있는 중이다. 펼쳐진 수건의 주름에는 낯익은 얼굴이 현실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현실은 어떻게 얼굴을 바꿀지 모른다. 어쩌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사물들의 침묵의 이야기가 경험으로 드러나는 세계, 작가의 몸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놓을지도 모른다.

이은미_놓아 둠_캔버스에 유채_120×90cm_2006

방들이 열리고, 모든 것은 서로 통한다. 방들은 여러 각도로, 이동하는 장소에서 분할된다. 방들은 자유롭게 된다. 창문들은 그리고 빛은 '안에서처럼' 사물들을 비추기 위해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사물들에게 쏠린다. 보다 간단하게 말하면 더 이상 창문이란 없으며, ...사물들 또한 자신의 기초가 되는 실체를, 자신을 담고 있는 형태를 잃어버린 것이다. ... 이제 사물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작용하고 사물들의 관계와 '가치'의 보편적인 기능으로 존재하는 것은 공간이다. (장 보드리야르,『사물의 체계』) ● 이제 사물들이 이야기가 떠도는 구석의 공간이 열리고 모든 것들이 서로 통한다. 「숨 쉬는 정물」의 창문은,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은 사물들을 비추기 위해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사물들에게 향한다. 방의 공간은 확대되어 열린 공간으로 바뀐다. 사물들은 흔적으로 남아 있으며 수많은 현실 세계를 향한 무한한 상상의 생각에 싸인 침묵으로 작가에게 기억된다. 그리고 작가는 「공간을 마련함-든든한 배경」속에서 살게 된다. 그렇지만 작가는 「도달하기 어려운」 또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다.

이은미_침묵 옆에_캔버스에 유채_130×150cm_2006

K와 (프란츠 카프카,『성』) ●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며 시작과 끝이 없는 계단을 오르는 익명의 사람이 도달하려는 곳은 어디인가? "성"의 텍스트를 펼치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K'는 셀 수 없이 분열되어 복수관점으로 성을 바라보고 있다. 'K와' 세상을 끝없이 관계 맺게 하는 'K'사이의 문자 '와'는 언제나 세상의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다. 그 관계 속에서 'K'가 도달하려고 했던 성의 공간은 항상 변화하며, 수많은 이미지들이 얼굴을 지우며 살면서 텅 비어 있을 것이다. 'K'가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의 주변을 끊임없이 떠돌았던 것처럼 작가자신 역시 쉼 없이 계단을 오르는 것은 텅 빈 공간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며 작가 자신 앞에 다가서는 현실세계를 맞이해야하는 운명일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마저 연소(燃燒)하고, 세상을 호흡시키는 숨이 깃든 빈 공간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리라. ■ 이병욱

Vol.20061130c |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