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각 共感覺

유영운 개인展   2007_0131 ▶︎ 2007_0206

유영운_배트맨_잡지, 전단지_150×100×8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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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131_수요일_05:30pm

갤러리 도스 기획 공모전

갤러리 도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55-1번지 2층 Tel. 02_735_4678 www.gallerydos.com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은 각각 한 가지 특징을 통해 단일 감각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화려한 색채의 꽃이 달콤한 향기와 함께 기억되고 율동감 있는 곡선이 언젠가 들어본 선율을 연상시키듯, 복수(複數)의 요소들이 뒤섞이고 이렇게 혼재된 요소들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감각을 동시에, 그리고 복합적으로 자극한다. 시각예술에 있어 공감각은 보이는 것 안에 청각, 후각, 미각, 촉각적 요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시각적 표현만으로 여러 가지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고 충족시킨다는 일차적인 해석 외에도 평면과 입체, 시간성과 공간성의 조화 혹은 이질적 재료들의 결합과 같은 형식적 측면에서의 공감각적 접근이 가능하다. 갤러리 도스에서는 '공감각-共感覺' 이라는 주제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표현을 통해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감각의 자극을 시도하는 여섯 명의 작가를 선정하였다. 이경민의 사진작업은 고요하고 정적인 느낌의 구도 속에 흐릿한 사물의 형상을 배치하고 있다. 희뿌연 화면에 마치 blur 효과를 준 듯 흐릿한 유리병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초점이 어긋난 듯이 보이지만 작가는 눈에 보이는 사물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기운(氣, energy)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카메라로 담아 정적인 화면에 조용한 파장을 만들어 낸다. 그에 비해 강민영의 회화는 자극적이다. 수풀이 우거진 밀림의 원시적 풍경 속에는 욕망을 자극하는 관능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머리를 풀어헤친 듯 무성하게 우거진 숲, 약육강식의 논리와 생존본능 속에 살아가는 동물들, 위협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독초들 가운데에 현대 실내생활을 상징하는 샹들리에를 배치함으로써 현대사회의 숨은 논리를 원시적 생태계에 비유한다. 김지윤의 영상작업은 보는 것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다른 방법으로 보기(seeing)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눈이 아닌 손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 장애인과의 인터뷰작업에서 작가는 스스로를 관찰자 혹은 듣는 자의 위치에 고정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관적 판단을 최대한 배제한 어조로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보는 방법과 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지현은 관광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홍보물이나 엽서속의 풍경 또는 랜드마크(landmark) 사진을 수집하고 이들을 콜라주(collage) 기법을 이용하여 재조합한다. 조악하게 다듬어지고 포장된 관광 홍보용 이미지는 대중에게는 매우 친숙한 것이지만 사실상 실재의 풍경과는 동떨어진, 하나의 꾸며진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들을 오려내고 재조합함으로써 낯설음을 극대화시킨 새로운 이미지들은 자본주의로부터 기인한 대중문화, 그 중에서도 관광지 문화를 대변한다.

유영운_미디어맨_잡지, 전단지_175×210×290cm_2005
유영운_미디어의 눈_텍스트, 전단지, 영화포스터_150×100×100cm_2006

대중적이고 친숙한 이미지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이지현과 비슷한 면을 보이는 유영운은 배트맨, 짱구, 슈퍼맨과 같은 대중적 아이콘을 끌어들여 거대 인형을 만든다. 모자이크 기법으로 잡지와 전단지 조각을 붙여서 완성한 이 캐릭터 인형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하나의 기호로 작용한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매스 미디어로부터 일방적으로 세뇌당한 의미들을 떠올리게 되는 현상을 지적하면서 미디어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송은의 설치작업은 중심을 향해 몰려드는 물고기 떼를 공중에 매달아 전시장을 환상적 수중공간으로 재탄생시킨다. 머리가 잘려나간 물고기들은 그 단면이 거울로 되어있으며 따라서 물고기 떼 가운데에 서는 관객은 작가가 제공하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김송은은 이 곳에서 가식적 허물을 벗고 물고기들이 비춰주는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말한다.

유영운_욕망 (복어인간)_잡지, 전단지_50×70×80cm_2006
유영운_똥, 꽃_텍스트, 색지_50×65×65cm_2006

고래와 공룡과 용은 모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다만 이들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래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고래는 현재 그 물질적 실체가 존재하며 아무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공룡은 눈으로 본 사람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남아있는 증거들을 통해 공룡이 과거에는 분명히 고래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용은 어떨까?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용은 공룡처럼 그 물질적인 실체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도 없고, 고래처럼 현재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본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키마우스는 어떤가? 배트맨은? 슈퍼맨은 존재하는가? 용의 존재처럼 미키마우스나 배트맨, 슈퍼맨도 상상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용을 보고 저기가 중국집이라거나 하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미키마우스나 배트맨, 슈퍼맨도 각기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존재 양상을 '사회적 실재'라고 한다면 이런 사회적 실재를 만드는 것은 누구일까? ● 작가 유영운은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 기호작용과 배트맨과 같은 사회적 실재들,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미디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결코 무겁지 않다. 그의 작업들은 오히려 가볍게 공중에 떠 있다. 가장 일반적인 기호인 언어를 예로 들면 'DOG'라는 글자는 기표이고 그것이 나타내는 바, 살아 움직이는 '개'는 기의이다. 관습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기표와 기의 간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 그것은 자의적이고 관습적이다. 유영운은「똥, 꽃」에서 기표와 기의의 문제를 통해 이 같은 자의적인 연결을 드러낸다. 작품에서 꽃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반면 똥은 무척이나 화려하다. 우리가 꽃을 꽃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묻게 된다.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은 산을 산이라고 부르면 이미 산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기의(실제 산)는 기표(산이라는 이름)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이름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름을 넘어선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유영운_19세 짱구_잡지, 전단지, 텍스트_60×65×70cm_2006
유영운_메스미디어_잡지, 전단지_35×35×35cm_2005

유영운은 또 배트맨과 같은 사회적 실재를 형상화했는데 흥미롭게도 이것은 광고용 전단지로 만들어졌고,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부풀어 있으며, 공중에 떠있다. 앞서 질문한 사회적 실재를 만드는 것은 광고용 전단지, 즉 미디어다. 이런 사회적 실재들은 미디어 없이는 존재할 방법이 없다. 미디어 덕분에 사회적 실재들은 고유의 기호작용을 할 수 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모습에서 우리는 이런 사회적 실재들과 그것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미디어의 팽창욕구를 느낄 수 있다. 미디어와 그것이 만들어낸 사회적 실재들은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들어서 미디어 없이는 세상을 인식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또 이 작업들은 공기로 꽉 찬, 다른 말로 속이 비어있는 풍선처럼 공중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런 풍선 같은 형상화는 이들 사회적 실재가 속이 비어있는 허구의 이미지라는 것을 말하는 것만 같다. 보들리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무언가 있음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음을 감추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로 유명한 맥루한이 기술 결정론과 낙관론을 대표한다면 보들리야르는 시뮬라크르 개념을 통해 '이미지가 실체를 대신한다.'고 이야기하며 미디어 발달의 비관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우리는 지금 맥루한과 보들리야르의 사이에서 길을 묻는 작품들을 보며 서 있다. ■ 오정아

Vol.20070131c | 유영운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