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애 수묵展   2007_0516 ▶︎ 2007_0522

장영애_靑島_순지에 수묵담채_104×14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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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16_수요일_05: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www.noamgallery.com

線의 遊戱 ● 용필은 용묵과 더불어 수묵화의 두 축으로서 수묵화가 단지 먹과 물과 종이의 어울림에 머무르지 않는 정신의 구현인 바에 그 정신은 필을 의지해서 비로소 구체화된다고 하겠다. 붓의 놀림이라는 일관된 명제는 수묵화의 뼈대인 필을 통해 수묵의 정신을 육화해내는 조형적 시점을 전개한다. 화면전체의 규칙적인 또는 자유로이 가해진 선들이 작품구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고, 이러한 선들은 一자가 지닌 함축적인 상징성과 같은 필획의 환원적 성격을 지님으로서 그 자체로서 변화무쌍한 용필의 상징적 기술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장영애_黃山_장지에 수묵_197×106cm

붓끝이 나아간다. 붓은 이리저리 나를 이끌면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앞에는 산이 펼쳐져 있다. 이 붓의 놀림연작은 바로 물의 흐름, 속성을 보여준다. 붓에 의해, 먹에 의탁해 이리저리 흐르고 휩쓸리고 지나가는 물의 이동과 경로가 들어온다. 수묵은 필법에 묵법으로 궁극적으로는 수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동양에서의 물이 흐르는 것이 바로 법이다. 물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물이 있어야 산 것이다. 동양에서 그림은 결국 물이다. 물이 한지 위에서 짓는 표정이 바로 그림이다. 붓을 가지고 노는 가장 기본적인 유희충동을 자극하는 이 gesture를 받아들이고 광할한 화면, 적막과 공허함을 안고 있는 텅 빈 화면에 선하나가 그어지고 연이어 수많은 선들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장영애_父母石_순지에 수묵담채_130×187cm

산수를 그린다는 행위는 우선 산수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것을 신앙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산수를 그리는 화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산수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묻는 물음의 태도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산수화는 우주적인 원리를 확인하는 이른바 궁리의 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산수를 그린다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자연학을 탐구하는 일과 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장영애_雪江圖_순지에 수묵담채_126×160cm
장영애_雨後山如沐_순지에 수묵_104×147cm

선의 향연에서 유희를 일으키고, 그 유희는 오랜 숨 가품으로 쌓아왔던 기억의 단편들을 화폭 안에 토해낸다. 작품 안에서 산은 혹은 바위는 이런 유희라는 돌림판으로 발굴림하여 빚어낸 백자이다. 여기서 선은 하나의 의미로, '하나(一)의 원리'는 모든 우주 만물의 최초의 근원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하나란, 수의 세계에서는 비로소 모든 수가 생겨나는 지점이고, 진리를 이루는 법칙으로 보면 그러한 법칙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지점을 말한다. 즉 一은 본래부터 있는 것으로서 만물이 비롯되는 근원이다. 만물은 모두 一로부터 갈라져 나간다. 一은 二로, 二는 三으로 점점 가지를 쳐 커지고 많아지며, 그 움직임이 오묘하게 무성해지고 흘러나가 반복과 움직임을 끝도 없이 반복하지만, 근본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이를 그 안의 무수한 하나의 선들의 엉킴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장영애_高峰?天立_순지에 아크릴채색_192×1690cm

먼길을 돌아서는 행보가 멀미를 일으킨다. 아래동네에서 나는 바쁜 톱니속의 부속처럼 시계를 돌리기 위해 달려야하는 부속품이다. 산위에 오르면 나는 산이 주는 포만감에 나는 그냥 산, 그 위에 얹혀진 먼지가 된다. 나무가 된다. 흙이된다. 산은 내게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준다. 귀멀고 눈멀었던 겨울내 가지들이 봄이 되면 빼꼼히 실눈을 뜨고 눈요기 , 귀동냥하며 기지개를 펴듯이 산은 그러하다. 내 붓 끝에 묻어나는 얼룩이 그리는 수묵의 세계가 그러했으면 싶다. ■ 장영애

Vol.20070516f | 장영애 수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