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다. 그리다.

강현덕 회화展   2007_0531 ▶ 2007_0606

강현덕_일기_장지에 채색_가변설치_2007

초대일시_2007_0531_목요일_06:00pm

제8회 광주 신세계 미술제 수상작가 초대전

광주신세계갤러리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49-1번지 신세계백화점 광주점 1층 Tel. 062_360_1630

지우기, 그리기 - '내면의 방'에서 나오기 ●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머나 먼 북부 독일의 유서 깊은 도시 브레멘과 함부르크에서 설치미술을 전공한 강현덕이 '지우기, 그리기'라는 다소 역설적인 주제의 전시회를 마련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선보인 설치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던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는 주로 평면 작업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변화와 함께 역설적인 주제를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일까?

강현덕_두개의 머리_장지에 채색_100×130cm_2005

본래 설치의 사전적 의미는 '전통적인 회화나 조소 개념에서 벗어나 표현매체를 주변 환경이나 장소와 밀접한 관계 아래 작가의 의도에 따라 배열, 배치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이러한 정의로부터 장소와 재료, 작가의 발상이 설치작업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내 안의 집' 혹은 '내면의 방'이란 제목에서 보듯, 강현덕의 귀국 이후 보여준 설치작품은 '집' 혹은 '방'이라는 공간이 중심을 이룬다. '집' 혹은 '방'이라는 장소는 한 개인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공간이자, 그의 삶에서 가장 내밀한 공간이다. 작가는 이 공간을 다양한 재료 ― 재봉된 사진, 색실, 아크릴, 채색된 주석 파이프 등 ―를 통해 형상화해낸다. 우리는 작가가 꾸민 공간 속에서 다채로운 일상의 편린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일상의 이미지는 작가 특유의 여성적 섬세함을 통해 상징화되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그 공간이 시간과 기억의 공간이자 욕망과 억압의 공간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강현덕_물회오리_장지에 채색_130×100cm_2007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충격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내밀한 공간에서 일상의 단편들과 함께 다소 불편하고 혼란스런 사색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의 심정을 이해하리라. 특히 김치와 된장에 익숙한 이가 소시지와 마요네즈를 만났을 때, 그것도 전형적인 한국의 도시에서 동양화를 공부한 작가가 중세의 전통이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유럽도시의 일상에서 하루하루 느꼈을 문화의 차이를. 그 새로움에서 오는 흥분과 그 다름에서 오는 스트레스... 작가는 그러한 경험을 '내면일기' 형식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때론 새로 배운 서양의 조형언어를 실험하면서, 때론 한국에서 체득한 전통적인 언어를 기억하면서.

강현덕_희망_장지에 채색_100×70cm_2007

유학 기간 중에 남프랑스 '라오스 마을' 미술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설치작품인 둥근 초가집은 고향의 기억과 동양적 자연관의 발로인데, 두 채가 서로 맞물리게 세워놓음으로써 하나의 형태로 합쳐지려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문화를 융화시켜야 했던 작가의 실존적 필요를 반영하고 있다. 한편 드로잉 작업에서 작가는 씨앗과 배아, 뱀, 날개, 인간 등 동서양의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적 모티프들을 마치 이야기하듯 늘어놓고 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강한 선적 요소나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점은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의 이력을 떠오르게 한다.

강현덕_상자이야기_장지에 채색_2005
강현덕_소리 / 욕심_장지에 채색_각 25×20cm_2007

귀국 이후 보여준 일련의 설치작품에서 벗어나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오롯이 평면 작업에 매진하려 한다. 유학기간의 드로잉 작업에서 보였던 씨앗과 배아, 날개, 인간 등의 상징적 모티프들은 색의 중첩과 자유로운 붓질, 물감의 부드러운 번짐과 흘러내림을 통해 그 형태가 화면 속으로 숨어버리게 된다. 이제 작가의 관심은 더 이상 자신의 내밀한 공간 속에 놓여있는 다채로운 일상의 편린들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동양화적 기법이 보여주는 발색의 과정 자체, 즉 끊임없는 붓질의 중첩이 암시하는 시간에 더 천착하는 듯하다. 이러한 발색 과정을 통해 상징적 모티프들은 본래의 형태가 지워지지만, 유화를 사용했을 때와는 달리 그 형태는 번짐과 흘러내림의 과정 속에서도 그러한 효과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형태와 더불어 희미하게 화면 속을 떠다닌다. 이처럼 작가는 새로운 평면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지우기와 그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강현덕_움직임Ⅰ_장지에 채색_100×75cm_2007

강현덕의 '지우기, 그리기'라는 다소 역설적인 주제는 그간 작가 자신의 내부에 쌓여온 욕망과 절망의 두터운 켜, 기억의 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충동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노라가 '인형의 집'을 떠나듯 '내면의 방'을 나선 작가는 이제 비로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마치고 진정한 의미에서 작가로서의 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 '지우기, 그리기' 작업을 준비하며 작가는 자신 앞에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 앞에 다소 주저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길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북부 독일의 짙은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다음 전시회를 기대해 본다. ■ 김승환

Vol.20070601f | 강현덕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