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umulation

김진아 회화展   2007_0606 ▶ 2007_0612

김진아_Accumulation-cabbage1_혼합매체, 아크릴채색_162.1×260.6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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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06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된 세계, 인연과 관계 ●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신께서 아담을 부르신다. 신의 이 부름은 기실 우리를, 나를 부르는 소리다. 나는 과연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칠흑 같은 어둠 한 가운데로부터 투명하고 맑은 기운을 내뿜으며 밤하늘에 점점이 박혀 빛을 발하는 별들을 올려다 볼 때면, 그리고 한밤중에도 잠 못 드는 도심의 점멸하는 불빛들을 내려다 볼 때면 어김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에 빠진다. 별빛들, 불빛들, 감히 헤아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그 무수한 점들은 불현듯 가늠할 수 없는 크기와 어둠으로 육박해오면서 숭고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하고 자신의 실체를 부정하고 지우게 한다. 그 점들 가운데 한 점에 동화되게 하고, 존재의 공고한 실체를 빼앗고, 마침내는 그 점과 더불어 혹은 그 점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 나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존재한다면 그 존재감은 어떻게 선명해질 수 있을까. 나는 혹 부재하는 것이며, 존재감은 다만 착각이나 최소한 꿈은 아닐까. 나는 지금 존재와 부재,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허물어지고 지워진 경계 위에 서 있다. 이처럼 하나의 점은 어김없이 존재를 소환하고, 존재 또한 하나의 점으로 소급된다. 하나의 점은 비록 그 실체감이 희박하지만 그 속에 존재의 비의를 품고 있는 탓에 아득하고 막막하고 멀다. ● 이처럼 무한한 존재를 상기시키는 경계 혹은 경지를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실제로는 아득하고 막막하고 먼 존재의 실체가 마치 손에 잡힐 듯 현존하는 듯한 경험, 비가시적이고 비감각적인 존재의 실체가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층위로 밀어 올려진 듯한 경험이다. 이처럼 하나의 점은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허물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지우며, 유한과 무한의 경계를 넘나든다. 공기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추상보다도 더 희박한 실체 속에 우주를 품고 있는 것이다.

김진아_Accumulation-cabbage5_혼합매체, 아크릴채색_116.7×90.9cm_2007
김진아_Accumulation-cabbage6_혼합매체, 아크릴채색_162.1×130.3cm_2007

김진아의 그림은 이런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점들로써 축조돼 있다. 화면을 온통 가득 메우고 있는 그 점들이 모여 성좌를 만들고, 숲을 만들고, 배추를 만든다. 그러나 그 형상은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인 추상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한갓 점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은 것이 익히 알려진 시각정보와 우연하게 일치했을 뿐인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재확인하려는 감각의 관성을 걷어내고 보면 사물은 온통 처음 대면한 것처럼 보이고,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해 보이고, 세계 자체가 경이로운 대상으로서 다가온다. 작가의 점 그림은 형상으로 드러난 감각의 표면을 찢고 그 이면의 본질을 보도록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세계가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열어 보이는 순간에 주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 그리고 그 점들은 이동하면서 그림을 볼 것을 요구한다.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무의미한 점들의 집적이 보이고, 그림에서 멀어지면 사물의 형태가 보인다. 그림은 그 속에서 사물의 형태가 축조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하는 이중적인 결로써 구조화돼 있으며, 이것이 시점의 이동에 의해서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시점의 이동에 의해서 달라지는 그림은 그 속에 관점의 차이에 의해서 달라지는 인식을 품고 있다. 세계는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지평이 아니다. 세계는 나와의 긴밀한 상호작용성에 의해, 상호간의 지각작용에 의해 연속돼 있다. 세계 속엔 내가 투사돼 있고, 내 속엔 세계가 오롯이 들어와 있다. 나아가 세계는 내가 뱉어낸 것, 내가 낳은 것이기 조차 하다. 세계는 똑같은 실체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평이기는커녕 저마다 다른 차이를 생성시키는 지평이며, 주관적인 지평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모네가 그린 하늘과 고흐가 그린 하늘이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화가들은 말하자면 하늘이 품고 있는 잠재적인 형태를 그 속으로부터 끄집어낸 것이다. 사물은 감각적인 표면의 이면에 잠재적인 형태를 숨기고 있고, 이것이 저마다의 절실함과 만나 그 실체를 보여주고, 매 순간 그 절실함의 성질과 강도의 크기만큼의 다른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김진아_Accumulation-cabbage4_혼합매체, 아크릴채색_162.1×130.3cm_2007
김진아_Accumulation-cabbage5_혼합매체, 아크릴채색_97×145.5cm_2007

그리고 김진아는 점을 통해서 세계를 보고, 점 속에서 세계를 본다. 이로부터 세계의 최소입자, 이미지의 최소단위원소, 세포, 모나드, 단자에 대한 인식이 엿보이고, 이러한 최소입자들로써 구조화된 세계의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이 엿보인다. 세계는 이러한 한 점, 이데아(플라톤), 일자(플로티누스)로부터 유래했고, 모든 존재는 이 한 점으로 모인다. 나는 작게는 세포(그 속에 생명을 품고 있는 소우주)의 집합이며, 크게는 우주와 동격이다. 한 점으로서의 나는 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이면서, 이와 동시에 다른 점들과 연속돼 있다. 나는 말하자면 타자와의 관계와 인연(공간적 개념이면서 이와 동시에 시간적 개념이기도 한)으로 연속돼 있는 것이다. 타자는 나에게 알려진 존재일 수도 있고,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고, 피상적으론 무관한 존재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존재가, 그 존재들이 나와의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관계 맺어져 있고, 내 속에 들어와 있고, 내 인격의 일부가 되고 있다. 점들이 똑같은 것처럼 나는 타자와 똑같고, 점들이 다른 것처럼 나는 타자와 다르다. 나는 타자이며, 그 속에 차이를 품고 있는 타자인 것이다(랭보는 자신을 타자와 동격으로 본다). 작가의 점 그림은 이처럼 주체가 타자와의 유기적인 관계(인연)로 연속돼 있음을 주지시키고, 나아가 주체 자체가 이미 타자와의 긴밀한 상호작용성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 것임을 주지시킨다. ● 이처럼 작가의 점 그림은 그 이면에서 생명의 떨림을 감지케 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는 하나의 점 속에 내재된 상징적 의미 곧 생명의 최소단위로서의 세포로, 점과 점과의 관계 곧 인연으로, 그리고 특히 그 점들의 집합이 일궈내는 형상 즉 성좌나 숲 그리고 배추의 형태로 변주되고 중첩되고 심화된다. 형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이 일련의 그림들은 그 자체 자족적이고 완결된 체계에 대한 신뢰를 의심하게 하고, 이를 지지하는 이분법적 체계(특히 자와 타를 구분하는)를 회의하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껴안는 관계의 원리, 통합의 원리에 그 바탕을 둔 생명사상 혹은 생태미학과도 통한다. 그러나 이처럼 작가의 그림이 일깨워주는 생명사상은 정작 생명을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한 고도로 문명화된 현재에 제시된 것이란 점에서 아이러닉하며, 오히려 그만큼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김진아_Accumulation-cabbage6_혼합매체, 아크릴채색_116.7×90.9cm_2007
김진아_Accumulation-cabbage7_혼합매체, 아크릴채색_116.7×90.9cm_2007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된 김진아의 점 그림은 세계의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주지시키고, 주체가 타자와 연속된 인연의 계기를 떠올려주며, 이를 지지하는 생명의 비의를 열어 보인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신뢰를 강화시켜주기도 하고 의심하게도 한다. 존재에 대한 자존을 일깨워주기도 하고 회의하게도 한다. 나는 한갓 점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이기도 하고 우주이기도 하다. 불현듯 나는 별빛 속의 한 점으로 환원되고, 불빛 속의 한 점과 더불어 사라진다. ■ 고충환

Vol.20070607g | 김진아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