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이경훈

20주기 기념 유작展   2007_0608 ▶ 2007_0619 / 일요일, 공휴일 휴관

이경훈_다가공원에서 바라본 풍경_캔버스에 유채_50×61cm(12호F)_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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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08_금요일_05:00pm

신한갤러리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1-12번지 4층 Tel. 02_722_8493 www.shinhanmuseum.co.kr

선생님의 얼굴 MBC의 간부 한 분이 어느 날 내게 와 문득 李景薰 선생에 관해 말한다. 고등학교 때 나의 미술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캄캄한 기억의 저편에서 한 얼굴이 떠오른다. '생간난다'고 대답했다. 참말로 생각난 것이다. 두 가지다. 그 간부는 자기가 바로 이 선생님의 아들이라고 털어놓는다. 기왕에 떠오른 두 가지 기억 위에 다시 더 한 가지가 보태진다. 가지다. 첫째는 화분을 그린 나의 파스텔 그림이다. 선생님은 나의 그 화분 그림을 어느 교실에 가서든 모범적인 파스텔 그림으로 내보이시고 왜 그것이 모범이 되는가를 내내 말씀하셨다. 그 뒤부터 친구들의 '화가!', '화가!' 소리를 귀가 아프게 들어야 했다. 그래서 도리어 마음이 아팠던 날카로운 기억이 뒤를 따랐으니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회초리가, 그림만 그렸다하면 내 두 손에 내리쳐졌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면 배고프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의 '화가!'소리에 나는 그저 픽- 웃을 수밖엔 없었던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환경정리 때에 담임선생님이 이경훈 선생님 말씀을 듣고는 내게 벽에 붙일 커다란 수채화 한 장을 그려오라고 지시하신 일이다. 많이 망설였다. 그러나 무가내였으니 그릴 수밖에 없었다. 기이하게도 그림은 하나의 연극 장면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참다운 그림이 아니라는 부끄러움이 내내 내 마음의 뒤를 따라다녔다.

이경훈_제목미상-유화018_캔버스에 유채_57×103cm(40호M)_1954

하루는 이경훈 선생님이 나를 불러일으키시고는 그 그림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 "저 그림은 그림 이상이다. 모든 예술의 근본을 다 가지고 있다. 예술의 근본이 무엇이냐? 상상력 아니겠느냐!" 그만 울 뻔했다. 가까스로 참았으나 그 뒤 나는 이 말씀을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그림보다 백배나 더 배고픈,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졸업 무렵이다. 선생님은 내게 미술대학에 진학하라고 권하셨다. 어렸을 때 억압을 당한 아이는 뒷날 다 커서도 제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법이다. 무서운 일이다. 나는 미술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근처로 나아가되 밥벌이는 보장될 것이 틀림없는 미학과로 진학해서 미학교수가 되고자 결심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선생님께 터놓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잠시 침묵하셨다. 한참이 지난 뒤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왼쪽 어깨 위에 선생님의 오른 손이 내려졌다. "미학도 좋은 길이야. 다만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도록!"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선생님께서도 서거하신지 이미 오래다. 지금에 이르러 되돌아본다. 내가 왜 지금에까지도 새벽녘이나 빈 시간이면 반드시 먹을 붙들고 앉아 난초나 매화나 달마를 치고 있는지 그 까닭을 생각해 본다. 군자(君子)이어서가 아니다. 그림이어서다. 그리고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이 내 어깨 위에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 이어서다. 선생님의 유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거듭 빈다._정해년 봄 일산에서 ■ 김지하

이경훈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53×41.5cm(10호P)_1964

20세기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변화는 전국민의 주거지 파괴와 생활거점 이동이라 하겠다. 일제 식민지 수탈과 한국전쟁, 남북분단 그리고 국토개발의 기나긴 자취 속에서 어느 누구도 한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미술가를 꿈꾸고 그 길을 걸어간 숱한 사람들 또한 그러했다. ● 이경훈(李景薰 1921-1987)이란 이름도 그와같은 불행의 그늘에 뒤덮인 미술인의 한 사람이다. 고보시절 전국학생미술전람회와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재능을 과시했고 그 눈부신 미래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 동경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던 그다. 해방과 더불어 전북지역에 정착했을 때만해도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밝은 전망에 열정을 불태웠을 것이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직후 신상회, 백우회에 가담하고서 1960년무렵 경기 부천으로 이주하여 목우회에 참여했으므로 가능의 세계를 엿보았던 게다.

이경훈_제목미상-수채화 010_종이에 수채_34×25cm_제작년도미상

한 예술가의 운명은 그 시대와 사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거니와 바로 이무렵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격변의 갈림길에 맞닥뜨려야 했다. 중앙과 지방의 격차가 심화되고 추상과 구상의 우열이 확연해지던 시절 이경훈이 선택한 길은 지난날의 역사였다. 발전의 신화에 뒤덮인 미술계의 풍토는 지방과 구상을 그늘로 밀어냈고 어느덧 미술계 서열구조가 완고한 성벽처럼 굳어졌으니 이경훈은 어쩌면 젊은날의 열정을 추억으로 간수하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자신이 발딛고 있는 땅 부천에서 후진을 육성하며 화단활동을 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자신이 그리도 열망했던 화폭의 아름다운 형상화 작업을 추억으로 돌려놓은채 땀흘리기를 거절하였으니 그 눈부신 꿈을 후배들의 몫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일게다. ● 20세기 미술사를 공부하며 나는 이와 같은 선택을 해 온 미술가들의 이름을 숱하게 발견했다. 낡은 자료 사이에 수도 없이 인쇄된 그 이름을 보고 있노라면 뒷날 명성을 획득하여 영예를 누린 이름에 눈길 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누군지 알 수조차 없는 그 이름들이 부지기 수인데 그저 흘러가는 구름과 같을 뿐이니 인생의 허망함에 숨이 막히는 것이다. 인쇄된 조선미술전람회 전시도록에는 그 이름 앞에 '전북, 강원, 함북'과 같은 출신지를 표기해 두었는데 만약 그 지역마다 해당 작가연구가 이뤄질 수 있다면 20세기 미술사는 엄청나게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환상일뿐이다. 앞서 말해두었듯 정착과 보존은커녕 이주와 파괴로 점철된 사회에서 무엇하나 남아있는 자료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경훈

오늘날 근현대 미술사는 뒷날 명성을 획득한 미술가들의 이름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른바 세속의 성공을 거둔 미술인들만을 서술 대상으로 삼고 있거니와 그 기준은 서울 화단을 무대삼고서 중심부에서 활약한 작가이다. 미술사의 평가를 반영하는 미술시장에서도 그러한 가치기준은 여지없이 관철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문화가치의 서열화, 예술평가의 권력화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이러한 시각은 다원문화주의가 대안이념으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 21세기에도 여전히 굳건하다. 기존 서열구조의 시각에서 벗어나 가치를 다원화시키는 개방주의 관점으로 보자면 지금 이경훈이란 이름을 복권시키는 일은 이경훈 개인의 불행을 극복하는 의미를 뛰어넘어 20세기 미술사를 다원주의 시각으로 재편성하는 역사서술방법론의 경장(更張)이란 의미를 갖추는 것이다. ● 이러한 의미의 발굴이 유족의 뜨거운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임에 경탄어린 찬사를 드리거니와 나와 같이 게으른 미술사가의 시각과 관점에 대한 반성의 계기이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 최열

이경훈_제목미상-스케치 031_종이에 연필_26.8×19.6cm_제작년도미상

동창 선생님의 20주기, 그러나 한 예술가의 죽음은 생명의 다함과 무관하다. 아마도 동창 선생의 예술세계는 20주기를 넘어 서 있거나, 20년을 더 채운 세월의 켜로 쌓여 있을 것이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당연하게도 들추어보게 되는 동창 선생의 예술가로서 개인사는 빛나는 순간과 빛이 닿지 않은 어둠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끼어드는 것은 아마도 빛나는 순간을 본 이후부터 일게다. 삶이 가장 화려한 청년시절에, 예술혼이 온 몸을 지탱하게 했던 그 시절에 모든 추억들은 동창선생에게 죽음처럼 기억의 소자로 남아있었다. 화가에게 자신의 전 작품이 불살라지는 것을 목도하는 일이란 생멸의 순간을 지켜보는 신의 모순과 같다. 그러나 예술가는 자신의 혼으로 의지를 키운다. 그런데 다시 일어서는 두 다리에 큰 힘을 싣고도 그는 겨우 십 수 년 만에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그 영혼을 다시 불러 세우지 못한다. 작품은 그의 일생을 영화처럼 내 보이며 그렇게 진솔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유화작품 외 찾아보게 된 많은 수의 드로잉과 스케치에서 동창 선생은 자신으로부터 달아난 예술혼을 연민으로 바라보며, 숨김없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때로 예술가들은 자신이 벼리는 칼끝을 숨긴다. 그의 말년 작품 중에는 빛나는 드로잉 작품들이 보잘 것 없는 학습지나 시험지, 교무실 사용 서류 뒷면에 남겨져 있었다. 그 중 몇 작품만을 골라내어 이번 전시를 기회 삼아 액자에 가둔다.(*'액자에 가둔다.'는 뜻은, 사실 이런 종이 작품은 액자방식으로 보관되기보다 전문적인 관리 방식 하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경훈_제목미상-스케치 034_종이에 목탄_33×20.3cm_제작년도미상

유작전은 큰 즐거움을 준다. 이 독설은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을 과장하여 설명하기에는 안성맞춤과도 같다. 잊혀 지거나 잠시 감추어졌던 온존한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이 즐거움을 만끽 할 수 있었다. 유화작품으로, 작가 사인이 있는 완성품이거나 미완성작품까지 포함하여 찾아내거나 빌리게 되어 전시에 내 놓게 된 것은 총 41점이다. 이번 유작전은 동창 선생이 소천하신지 20년 만에 만들어지는 전시이거니와 그의 첫 개인전, 1947년 6월 이후로 따지자면 무려 60년 만에 가지는 개인전이다. 작품의 양과 질을 모두 살피어 동창 선생이 지향코자 했던 예술 세계를 온전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시의 미덕이겠지만, 세월의 두께 때문에 모아지는 모든 것을 내 보이고자 한다. 단지, 모아진 것뿐이다. 아마도 지금 어디에선가 아쉽게도 동창 선생의 작품이 개인의 집이나 창고에서 낯가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데로 다음 기회에 그런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인연을 남겨둔다. ■ 이섭

Vol.20070608d | 이경훈 유작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