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度空間

이다슬_이군展   2007_0614 ▶ 2007_0628

이다슬_향나무 이야기-고려대학교_디지털 프린트_20×20"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사진아트센터 보다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14_목요일_06:00pm

사진아트센터 보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61-1번지 한라기산빌딩 2층 Tel. 02_3474_0013 www.bodaphoto.com

나는 어릴 때 마당에 심어져 있는 정원수를 아버지와 함께 가위로 다듬어 예쁘게 만들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경험들이 이번 "향나무 이야기" 사진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이제 나는 어릴 때처럼 나무를 만질 수 없다. 만질 나무도 없거니와 만지는 방법도 모른다. 대신 가끔씩 보이는 작업복 입은 아저씨들께서 아침마다 물을 주고 잔디를 다듬으며 가위로 나무를 둥글둥글하게 잘라낸 나무들을 바라볼 뿐이다... 누구를 위해서 이 나무들은 이곳에 심어져야 했고, 왜 그렇게 다듬어져야 하는지 생각을 해본다. 나무들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 않았다. 나무들은 자연이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인공정원에서 인공적으로 키워졌다. 하지만 나무들은 나무들만의 이곳저곳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냥 가다가도 가끔은 미소를 지어주는 여유가 있으면 한다. 혹시나 나무가 말을 걸어왔을 때 흔쾌히 대답할 준비까지 되었다면 우리들이 어릴 때 나무를 잘라냈던 그 추억을 다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 이다슬

이다슬_향나무 이야기-연세대학교_디지털 프린트_20×20"_2007

당신의 향나무 이야기를 해 주세요. ● 작가 이다슬은 사진으로 '향나무 이야기'를 읽어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야기의 밑바탕에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카메라를 가지고 향나무에 대한 기억을 들여다본다. 기억 속에서, 그리고 기억의 재현 속에서 그는 특히 자생적으로 자라난 향나무가 아닌, 정원에서 가꾸는 향나무에 주목했다. 그리고 어릴 적 아버지와 정원에서 예쁘게 다듬던 향나무들을 기억해냈다. 잎이 무성해지면 반드시 깎아줘야 했을 것이고 비죽이 솟아 나온 가지를 용서하지 않았을 게다. 이들은 자연의 힘을 빌고 대지를 발판 삼아 자유롭게 자라나기보다는 환경의 요구와 길들여짐에 익숙한 삶을 향유하는 나무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시선에 안타까움이나 연민 같은 감정이 묻어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회와 제도와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가의 지난 연작 '아이들'처럼, 관공서의 정원에서 환경에 길들여진 향나무들에 대한 기억이고 관찰이다.

이다슬_향나무 이야기-한국예술종합학교_디지털 프린트_20×20"_2007

여기에서 향나무 연작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이 교차하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정원과 향나무는 제도이고 사회라는 스투디움이며, 어릴 적 아버지의 나무는 그에게 있어서 푼크툼으로 스쳐 지나간다.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전자는 사진이 재현해내는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문화적 의미를 가리키고, 후자는 보편화될 수 없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체험을 뜻한다. 두 가지 상이한 체험이 사진의 시각적 경험인 셈이다. 스투디움은 사진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는 개념이며 이것은 관람자의 주관적 감정이 아닌 외부로부터 길들여진 문화이다.

이다슬_향나무 이야기-한국외국어대학교_디지털 프린트_20×20"_2007

작가의 향나무 사진과 관람자 사이에서 향나무라는 명칭, 나무의 다듬어진 모양, 넓은 정원, 이러한 객관적인 기호들은 인간의 요구, 사회의 환경 등 갖가지 의미로서 스투디움이 된다. 반면에 푼크툼은 관람자의 감각을 관통하는 화살이며, 우연적이고 주관적인 충격이나 감정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푼크툼이란 나를 찌르는 우연성이라고 했다. 그는 듀안 마이클스의 앤디 워홀 초상 사진을 가지고 푼크툼을 설명하는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연출된 워홀의 모습에서보다는 오히려 '끝이 넓적하고 부드러우며 딱딱한 손톱'에서 '나를 찌르고 지나가는' 푼크툼을 읽어낸다고 했다. 향나무에 대한 기억을 찌르고 지나가는 푼크툼은, 작가가 들려주는 향나무 이야기의 재현을 통하여 관람자 자신의 기억 속에서 발현된다. 작가가 향나무들을 사진 프레임에 담아내면서 과거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이를 통해 관람자 역시 작가와 함께 기억을 들여다본다.

이다슬_향나무 이야기-헌법재판소_디지털 프린트_20×20"_2007

여기에 작가는 몇 가지 장치를 설정해 두었다. 우선 컬러를 배제하고 사진의 톤을 흑백으로 선택했다. 온갖 색채로 가득한 현실 공간의 구성이 아닌 마치 꿈 혹은 무의식의 공간을 더듬고 있는 듯이, 그리하여 사진은 더욱 비현실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또한 작가는 사진을 찍어내는 도구로서 플라스틱 렌즈를 끼운 토이카메라를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사진의 가장자리에 마치 우리의 눈이 무엇인가 들여다보는 듯 검은 실루엣을 만들어냈고 렌즈의 초점을 중심에만 맞추어 주변 부위가 흐릿해지도록 했다. 검은 실루엣과 흐릿한 초점, 카메라가 만들어낸 이러한 분위기들로 인하여 우리는 또 한 번 현실 공간을 빠져나간다. 이렇게 작가가 설정해 둔 몇 가지 장치가 만들어낸 효과는 마치 기억 속의 장면을 재현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관람자에게 전달한다. 아마 사진을 보면서 관람자는 작가가 전하는 향나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향나무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다. 작가는 관람자에게 향나무 연작의 스투디움을 제공함과 동시에, 푼크툼의 경험을 슬며시 안겨줄 것이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관공서 정원의 향나무를 기억하기 어렵지 않을 터이고, 누구든지 간에 사진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관통하는 화살을 가질 테니까 말이다. ■ 임보람

이군_서안의 성벽_디지털 프린트_11×14"_2004

서안의 성벽 ● 나는 시안이라는 중국의 고도(古都)에서 2년 동안 객지(客地) 생활을 하였다. 처음 시안 기차역에 도착하여 시안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풍경은 나의 시선을 압도적으로 만들어준 커다란 성벽이고 회색 벽돌로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 이 도시는 현대적인 공간과 역사의 유물들이 함께 공존하는 도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첫 인상이 계속 나의 정소(情燒)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적 공간인 성벽과 그 밖의 현대적인 공간과 다른 거주 공간들로 구성되고 있지만 나는 본인의 정소를 담은 성벽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였다. 시안 성벽은 완벽하게 에돌아진 네모난 구역을 구성하고 있다.

이군_서안의 성벽_디지털 프린트_11×14"_2004

여러 왕조의 도읍으로 거듭 나면서 수 백년 동안의 시간을 거쳐 커다란 몸집으로 자기의 도읍 왕권 사람들을 외래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해주고 있다. 갖은 풍상과 고초를 겪었지만 예전의 풍범(風范)은 그대로 남아 있고 현대의 삶은 살아가는 지금에 와서도 나름대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이 성벽은 고대문명과 현대문명의 견증인 이고 수호자이면서도 포용의 태도를 지닌 커다란 도량(度量)의 소유자이다. ● 이 사진작업은 나의 눈으로 보는 시안의 랜드마크적 공간의 표현이고 개인 정소의 표출이다. 성벽을 의인화하여 그의 내심과 작용을 털어놓는 다면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그 답이고 그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군_서안의 성벽_디지털 프린트_11×14"_2004

성벽의 자백서(自白書) ● "나는 고대서부터 이 땅의 도읍인 왕권과 사람들을 포용하고 외래 침략에서 지키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현대의 발전과 새로운 문명의 우세로 전통과 역사를 소홀히 하고 잊혀 지는 것들을 지켜주고 조화를 이루는 역할을 하고 있다... "라고 성벽은 자백하고 있다.

이군_서안의 성벽_디지털 프린트_11×14"_2004

나는 그가 쌓은 업적에 대해 인정하는 태도이고 시안에서 하나의 랜드마크적 공간으로서 그의 기능을 다하고 포용적이기까지 한 그로서 외래 문명과 외래 민족, 타향인 들에게 객지에서 짐을 풀어 놓고 삶의 터전이 되게 해주는 넓은 도량을 다시금 인지 할 수 있다. 나도 그중의 피 수혜자로서 그의 수호와 포용을 받고 있다. ● 시안의 성벽내의 현대적인 공간과 성벽 밖의 현대적인 공간이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나는 그런 공간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군_서안의 성벽_디지털 프린트_11×14"_2004

나는 이 사진작업을 하면서 역사와 전통에만 묶여 사는 자라고 인지되는 것이 우려되었다. 본인은 분명 현대의 삶을 살고 있고 이 시대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시대의 발전을 음미하고 즐기는 자임은 틀림없지만 시안 성벽에 대한 나의 인상과 성벽이 나에게 주는 그런 은총적인 정소가 나를 지로에서 밀고 당기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런 양면적인 이슈도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것이 나의 작업의 컨셉이기도 하다. ■ 이군

Vol.20070615c | 異度空間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