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침묵, 투명한 호흡

류현희 회화展   2007_0620 ▶ 2007_0626

류현희_불편한 침묵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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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20_수요일_06: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학고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39_4937 www.hakgojae.com

불편한 침묵, 투명한 호흡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헤세,『데미안』) ● 류현희의 그림 속 앵무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작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불편한 침묵」속에서 소리들이 새어나온다. 작가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앵무새를 통하여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그것은 말이 아니다. 말과 다른 소리는 소통을 전제로 울리지 않는다. 류현희의 작품 속을 떠도는 앵무새들은 작가의 페르소나로 그를 대변한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없는 것 같지만 앵무새는 끝없이 소리를 쏟아낸다. 그것은 앵무새의 의식과 사유를 배제한 채 어떤 대상을 모방하는 소리와는 다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부리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작가의 소리는 끝없이 울린다. 그것은 복화술(複話術)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스로 앵무새로 변신하고, 앵무새에 숨어서도 자신의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 속의 타자처럼 말한다. 앵무새의 복화술로 끝없이 자신의 소리를 쏟아내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숨긴다. 그 소리는 타인의 사이를 통하는 말이 아니지만 작가는 소리를 끊임없이 쏟아내야만 한다. 자신 속에 가득차서 더 이상 쌓아 둘 곳 없는 이야기들을 해체시켜야하고, 작가 내부에 쌓인 순간의 기억과 이미지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류현희의 작품 속 이미지들은 세상의 모든 상호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솟아오른 혼돈의 이미지를 덮은 채 작가는 세상의 많은 사이를 연결시키지 않는다. 「드러난 진실」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알 수 없는 물체는 무엇인지 확인할 수도 없고 세상과 단절되어 생명력을 북돋을 수도 없는 갈라진 땅에 놓여 있으며, 「새벽 3시」에 나타나는 술래는 앵무새를 어깨에 올려놓은 채 야생의 공간에서 다른 시공간 너머에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작가의 모습을 찾지만, 작가는 언제나 숨는다. 어린 시절의 숨바꼭질은 시공간을 넘어서 이어지며, 술래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눈을 감고 숨기는 시간을 갖는다. 영원히 감추기 위해 숨기는 것도 아니고 다시 찾기 위해 숨긴다. 그리고 작가는 언제나 그 순간들을 끝없이 피해야 하는 관계 속에서 떠돌고 있다. 「핑크의 봉헌」에서 바람을 넣어서 움직이게 하는 장난감 말을 가지고 놀던 한 아이는 유년의 관계를 바라보고 있지만 장난감 말은 유년의 시간을 동력으로 기억 속 한 순간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핑크빛 유년기는 그 색이 번져가지 못했지만, 「화창한 날의 대화」에서 작가는 성인의 얼굴을 하고 아직도 아이처럼 발 위에 올라가 비행기 놀이를 하고 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지만 세상의 권위적 중심의 구조에서 나오지 못하고 피터팬 증후군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자신 속에 갇혀 '지금, 여기'의 삶의 방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속에서 작품 속으로 솟아오르는 이미지들을 작가는 부유(浮游)시키고 있다.

류현희_드러난 진실_캔버스에 유채_260.6×324.4cm_2007
류현희_새벽 3시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07

무서움. 삶의 무서움에 대해서 또 하나의 무서움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예술이다. (최인훈,『하늘의 다리』) ● 작가는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한없이 따라가면 안 된다. 솟아오르는 이미지들 사이에 선택이 있어야하고, 무서울 만큼 힘든 삶 속에서 작품은 더 무섭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은 삶의 사이에 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현희의 작품 속에서 작가의 이미지가 부유하듯 옮겨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앵무새의 복화술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내 기억의 순간을 자신의 내부에서 빼내는 것과 같으며, 솟아오른 이미지 또한 자신의 작업 속에 쏟아내고 자신을 비워둘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의 작품은 작가 자신이 되는 순간이고, 작가를 향하게 된다. 작가 내부의 모든 자아와 타자들을 분열시켜 쏟아낸 작품은 자신이 가장 큰 관객으로 그림을 바라보며 자신과 연관 된 것을 치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상상력보다 오히려 작품 내부에 숨어 있는 작가를 상상하는 빈 공간을 남겨두게 된다. 작가는 그 공간에서 비워낸 이미지들이 작품 속에서 스스로 살 수 있도록 삶의 고통보다 더 무서워지기도 한다. 자신을 스스로 분열시키는 고통을 참는다. 그래서 앵무새나 돼지의 가면을 쓰기도 하고, 새 둥지에 살고 있으며, 「수상한 징조」에서처럼 현재 자신의 얼굴이지만 유아기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세 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스스로가 정해놓은 현재의 자신을 벗어나 분열시키기기도 하고 익명의 자신을 얻기도 한다.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고통으로 얻은 작가의 페르소나는 자기 주변의 세계 속으로 스며들어 자신 앞에 놓인 다양한 세계와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한다.

류현희_핑크의 봉헌_캔버스에 유채_97×162.2cm_2007
류현희_화창한 날의 대화_캔버스에 유채_145.5×112.2cm_2007

그가 화보(畵報)에서 오려내어 훌륭한 금박액자에 끼어놓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변신』) ● 카프카는 벌레로 변신한 주인공을 꽤 침작하게 그려놓는다. 기이하게도 벌레로 변한 모습에 그렇게 놀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 자신이 오려놓은 탁자 위쪽 방안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본다. 그림 속의 장면까지 자세히 묘사한다. 류현희의 작품 속에서 작가가 변신했다고 가정 할 수 있는 앵무새를 비롯한 동물들은, 작가를 세계와 관계 맺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작가 역시 자신이 그리는 그림을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변신 때문에 그는 오히려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실존적이고 부조리한 작품으로 주인공이 벌레로 변한 것은 일상에서 느끼는 소외감 같은 것을 이미지화하여 자신을 자신이 아닌 듯 표현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카프카의 변신을 아버지가 가족을 부양할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가족을 책임지고 집을 위해 모든 것을 참고 일하는 아들이라는, 아버지·어머니·아들의 오이디푸스 삼각형(Oedipus triangle)에서 그레고리가 탈출하는 이야기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 세계를, 틀에 박힌 이미지라고 한다면 벌레의 잡음과 움직임이 세계의 어떤 이미지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인간 존재를 우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벌레로 변한 것이 인간에게 초래된 소외의 상징이라고 말하지만, 들뢰즈는 오히려 이것이 자유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류현희에게 있어서 그의 변신, 혹은 가면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는 실존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작품 속에서 그것을 끊임없이 말하고, 이미지화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들뢰즈식으로 고정적 측면에서 세계의 모든 관계를 탈출한 것이며 자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을 끝없이 분열시키며 오히려 자신의 내부를 비우고, 「초록 커튼 뒤의 풍경」에서 나타나는 인형의 머리는 화염에 둘러싸여 사라진다. 자신의 생각을 파괴 시키고, 세계의 고정된 이미지마저 비워낸다. 작가가 비워낸 세계는 화염에 쌓이고, 폭발음이 들릴 것 같고, 연기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고통의 빈 공간이다. 그 공간은 작가가「서른 한 살, 어느 일요일 오후의 꿈」에서 만든 공간이다. 그 공간은 작가 자신을 파괴시켜 만든 폐허이기도 하지만, 모든 생명들이 다시 시작하는 시원의 공간이기도 하다. 폐허의 고통스러운 빈자리는 오히려 예술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한다.

류현희_수상한 징조_캔버스에 유채_145.5×112.2cm_2007
류현희_초록 커튼 뒤의 풍경_캔버스에 유채_112.2×145.5cm_2007
류현희_서른 한살, 어느 일요일 오후의 꿈_캔버스에 유채_227.3×227.3cm_2007

벨라스케스는 쉰 살이 되자 사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대상 주변을 맴돌며 빛과 공기, 텅 빈 공간과 그림자의 매력, 색의 두근거림들로 그의 고요한 교향곡의 보이지 않는 중심을 만들었다. (장 뤽 고다르, 영화『미치광이 피에로』) ● 이제 작가는 그 빈 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니며 이미지들을 세울 수 있다. 무서움 가득한 삶을 칠할 수도 있다. 자신을 분열시켜 내부를 비웠고, 단단하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세계를 빈 공간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고,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 속에 그려진 이미지들과 작가의 작품은 아마도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생태학적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작가가 그림 속에 표현된 이미지를 바라 볼 수 있게 됨으로써 호흡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일지 모른다. 그리고 작가 자신은 대상이 되지 않고 투명한 호흡이 된다. 수많은 이미지 속에 스며들고 변신하며, 스스로 분열하고 지우며,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그림 속과 현실 속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무수한 이야기를 흩어 놓으며 다양체의 수많은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 이병욱

Vol.20070620c | 류현희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