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긴 찰나

노세환 사진展   2007_0627 ▶ 2007_0728

노세환_조금 긴 찰나_디지털 프린트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0406a | 노세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2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 마노 서울 종로구 가회동 1-71번지 Tel. 02_741_6030 www.manogallery.com

신호등 작업 (Traffic Signal Series) ● 신호등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신호등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 주려 하는가. -일상 우리는 신호등을 건너며 살고 있다. 신호등은 바쁘게 사는 도시인에게 잠시 멈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하고 있다. 잠시 멈추어 있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 길을 건너는 행위는 사람들에게 "법칙을 따르기" 교육을 하고 있다. 법칙을 따르는 것은 도시가 복잡다단한 구조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유지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게다가 도시가 그로 인해, 도시만의 효과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도시의 진짜 모습은 신호등에 서있는 사람을 통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신호등을 지키고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 본적 있는가. 아마도 아무도 없을 듯하지만, 그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신호등을 기다리며, 건너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노세환_조금 긴 찰나_디지털 프린트_2007
노세환_조금 긴 찰나_디지털 프린트_2007
노세환_조금 긴 찰나_디지털 프린트_2007

-다큐멘터리로서의 신호등 신호등작업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 한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각각의 개개인으로서 볼 수 없다. 전화 거는 30대 회사원. 신호등에 잠깐 서 있기조차 힘든 60대 아주머니. 세상살이 걱정 없이 친구들과 수다가 당면한 과제 중 최우선인 20대 여대생. 그들은 한 도시인의 일생을 수평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잔상에 대한 집착 사물들이 움직이며 남기고 가는 잔상들 그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있는 공기와도 같다. 존재하고 있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서두르기를 지향하는 도시인들의 속도감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좋은 도구이다. 신호등에 줄지어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도시의 사는 사람들. 하루에도 몇 번씩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2분 10여초. 그 일상의 행위들을 다시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다시 바라볼 수 있으며, 멍하게 보낸 2분 10여초 간의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있다.

노세환_조금 긴 찰나_디지털 프린트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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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계시 ● 노세환은 2000년대부터 달리는 차 안에서 느껴지는 도시의 이미지나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왔다. 이번 2007년도 전시 역시 그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노세환은 이번 전시에서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집약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는 우리의 문화적 시간과 공간을 사진 속에 집약화시키면서 현재 우리의 지평을 묻는다. 예술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종래부터 "진실성(authenticity)"이었다. 이 개념은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독특한 존재로서의 예술작품의 근원적 속성을 가리킨다. 예술작품은 벤야민의 설명처럼참으로 "현재 이곳의 근원성(the here and now of the original)"을 나타내는 지표인 동시에 현재 이곳의 아우라를 표명하는 "역사적 증명(historical testimony)"이다. 그러나 복제의 시기인 현재에는 아우라가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현재의 대중들은 기술복제라는양상 속에서 벌어진 대상들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친밀해지며 가까워지는 현실을 체험한다. 즉 예술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 대상으로서 특정한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증명이 아니라, 전통으로부터 또 역사성으로부터 벗어나 다수자의 존재로 이양하게 된다. 그러나 아우라의 상실이 수여하는 점은 이렇듯 부정적 차원을 넘어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다.

노세환_조금 긴 찰나_디지털 프린트_2007
노세환_조금 긴 찰나_디지털 프린트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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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아우라는 기본적으로 전통에 뿌리를 두며 제식에 그 근본을 두고 있었다. 예술의 최초, 그리고 근원적 사용의 가치는 제식적 기능에 있었다면, 이제는 그 뿌리를 타파한 상태이며 드디어 예술은 저곳이 아닌 이곳의 모든 양상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즉 "진실성이라는 규준이 더 이상 예술적 생산에 적용되지 않게 됨에 따라 예술의 전반적인 사회적 기능은 혁명화된다. 예술은 제식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 기반을 두는데 사회와 정치가 그것이다." 노세환은 확실히 현재 이곳의 양상을 다루는 작가이다. 제 각각의 사건과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호등이라는 체계와 기호에 의해 통제되며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에 갇힌다. 그리고 그 일상의 저편으로 순환되는, 볼 수 없는 기운에 대한 갈망은 접어둔 채 소비와 쾌락의 압박에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보이지 않지만 변화하며 생멸을 반복한다. 우리는 세속에 의지를 내어주지만동시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의미가 분명히 존재하리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확실히 노세환이 바라보는 우리의 세계는 "잠재적 가능성"이 점철되어 있는 곳이다. 현재의 미디어는 예술의 아우라나 근원성, 진실성을 요구하지 않지만, 노세환은 사진이라는 미디어에 잠재적 가능성을 체현하고자 한다. 이 가능성은 물질화된 사람들과 사물과 온갖 체계들을 진보적이며 무한의 기억이라는 개념에 포괄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는 우리가 사는 이곳의 의미는 노세환의 진보적이며 무한한 기억 속에 적절하게 포괄된다. 통제와 자유의 의지, 물질적인 압박과 "어째서 이곳인가" 알고 싶은 갈망, 빠른 진행과 느린 사변, 정념의 살덩이와 의지의 올곧은 뼈의 대립이라는 이원론적 긴장감의 극화(dramatization)야말로 노세환이 줄기차게 모색해 왔던 자신의 예술적 토대이다. 이곳이 우리나라든지 다른 이국의 풍경인지를떠나서, 이곳은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온갖 현상을 회태시키는 다이나믹한 생멸의 자궁이자 무덤인 동시에 노세환이 모색하는 진보적인 기억 속에피어나는 더 나은 다음을 위한 계기에 다름 아니다. 이 귀중한 기억의 계기를 "세속의 계시(profane illumination)"라고 부르고 싶다. ■ 이진명

Vol.20070627d | 노세환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