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산수/白衣山水

조인호 동양화展   2007_0905 ▶︎ 2007_0911

조인호_0701(북한산)_순지에 수묵_162×52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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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905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삶의 아픔에 대한 치유로써의 산수 - 조인호의 체험산수 ● 조인호의 작업은 대자연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화면 가득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은 카메라 옵스큐라로 잡아내는 경치가 아니라, 개인적 체험을 따라 시간의 궤적이 투영된 시공간의 기록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그가 경험했던 시간과 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 그가 경험했을 공간과 바로 그 시간에서 그가 느꼈을 삶과 인생에 대한 고뇌와 환희 그리고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조인호_0706(송악산)_순지에 수묵_190×390cm_2007
조인호_0711(용머리해안)_순지에 수묵_190×390cm_2007

미술사에서 대자연의 풍광이 독자적 그림의 소재로써 등장하게 되는 것은 서양에서는 17세기, 동양에서는 문헌상으로 4세기에 출현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수천 년이 넘는 동서양 그림의 긴 역사 속에서 보자면 그리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리기 시작하여, 18세기 프랑스의 로코코 화가들과, 19세기 자연주의, 인상주의 화가들을 통해 독자적인 '풍경화(Landscape)' 장르를 개척하게 된다. 물론 그 풍경화 발생의 뒷면에는 근대 서구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데카르트식 합리주의, 즉 "사물에 대한 인간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의식이 숨어있다. 우리의 인식조건인 감각은 때로 틀릴 수도 있고, 믿을 수 없는 것일지라도,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나'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출발한다. 서구의 풍경화에서 그 '나'에 대한 의식을 지평선이나 수평선에 남겨 놓았다. 이때 지평선은 작가의 눈높이가 되고, 오직 하나인 실체로써의 '나'는 작품 속의 눈높이에 존재한다. 이에 비해 동양에서 대자연을 소재로 삼아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식, '산수화'의 출현을 종병(宗柄)의 「화산수서(畵山水序)」가 쓰여 지는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 보면 대략 4세기 후반이 혹은 5세기 초가 된다. 종병이 「화산수서」에서 산수화를 그리는 목적과 그 효과에 대하여 "와유(臥遊)"와 "창신(暢神)"을 말하는 것처럼 동양에서의 산수화의 출현 역시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과 예술의 발견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대자연 속에서 심신의 도야와 심미적 인식의 주체의 발견이 산수화를 탄생시킨 원동력인 셈이다. 서양의 풍경화와 동양의 산수화를 탄생시킨 배경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공통점이란 '나'에 의한 심미적 주체의식의 발견이다. 모든 인식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차이점은 서양의 그 확고한 '나'의 개념에 비해 동양의 '나'의 개념은 매우 느슨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화면상에 그 '나'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와유(臥遊)"는 철저하게 감정이입을 토대로서만 이루어진다. 작가의 의식은 사물과 함께 표유(漂游)하며, 고정적 실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종종 동양적 세계관의 대표적 표현양식으로 언급하는 "이동시점(遊目)"을 예로 들어보면 비교적 쉽게 이것을 이해해 볼 수 있다. 산수화에는 서양의 풍경화처럼 하나의 소실점으로 귀납되는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다양한 시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심미적 주체의 시간적 경험의 추이에 따라 변해가는 의식의 변화를 표현한 것이다. 때로는 여기에 또 다른 예술적 상상력에 의한 시각이 존재한다. 산수화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간적 경험을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는 그림이다.

조인호_0721(도봉산)_순지에 수묵_130×324cm_2007

조인호의 산수에 대한 관심은 제한된 현실에서 벗어나 순간과 영원이 만나는 지점과의 해후로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의 그림의 대부분은 제주의 풍광이거나, 서울과 서울 주변의 산들이다. 그는 직접 이들 산에 올라 체험하고 느낀 것을 그림으로 옮긴다. 체험에서 비롯된 풍광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자연을 소재로 그린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주어진 삶의 무게와 화가로써의 앞날에 대한 고뇌로 머리가 어지러울 때, 문득 눈앞에 펼쳐진 산. 처가가 있는 제주의 산을 오르며, 또는 서울의 탁한 공기 속에 솟아있는 북한산을 오르며, 그는 그 속에서 삶의 자유를 보고, 희망을 보고, 삶의 원리를 배운다. 산속에서 만나는 인공적 가탁의 흔적이 없는 수많은 존재들, 바위와 풀과 나무들, 그리고 하염없이 부는 바람, 정처 없이 정형화된 틀이 없어 자유로운 말 그대로 "자연(自然)"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과 마주한다. 그의 그림은 바로 그가 직접 체험하며 만났던 자연의 존재들과의 대화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담고 있다.

조인호_0609(제주도)_순지에 수묵_162×130cm_2006
조인호_0610(제주도)_순지에 수묵_162×130cm_2006

이러한 개인사적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작업은 어찌 보면 삶의 아픔에 대한 치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그가 인위적 가치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연으로써의 산수를 마주하는 순간, 그의 의식은 이미 저 의식 너머 산수의 자연 풍광이 인도한 또 다른 자아와 만나고, 현실에서 상처받은 그의 영혼은 자연과의 화해를 통해 고정적 틀을 지닌 '나'가 사라지고 자연과 합일하는 경계의 또 다른 자아와 마주한다. 자연과의 화해의 순간 여기에서 마주친 개인의 체험은 이미 한 개인의 특수한 삶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정서인 아픔과 기쁨과 맞닿아 있다. 개인의 격정과 아픔이 걸러지고, 담담한 흑백의 그레이로 순화된 수묵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의 화면은 전통적 산수화의 이동시점이라는 시방식(視方式)을 따르면서도 전통산수가 보여주는 화면과 좀 다른 차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시간의 추이에 따라 변해가는 수없이 다양한 시각을 감정의 크기로 하나의 화면에 수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정의 울림에 따라 때로는 작게 때로는 크게 비례는 무시되고, 화면은 감동의 크기에 따라 또는 정감의 리듬에 따라 사물이 배열된다. 감정의 진폭에 의해 모든 형상이 해체되었다가 조인호의 예술적 상상의 음률 속에서 다시 재구성되어 하나의 새로운 형식으로 구조화된다. 서구적 합리주의가 일반화된 세계에서 조인호의 그림이 여전히 삶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두드리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삶이란 논리에 의해 실체 없는 이상 속에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체험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 김백균

Vol.20070905e | 조인호 동양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