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Studio

신은경 사진展   2007_0905 ▶ 2007_0911

신은경_Photo Studio-Chair_디지털 프린트_94×119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덕원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905_수요일_06:00pm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www.dukwongallery.com

가짜에의 기림 ● 서른 개의 바퀴살은 하나의 바퀴 축으로 모여든다. 축 중간에 뻥 뚫린 빈 구멍이 없다면 그것들 모두는 쓸모가 없다. 진흙으로 그릇을 빚지만 그릇 안의 텅 빔만이 쓸모 있다. 벽에 구멍을 내 창과 문을 만든다. 그런 구멍이 없다면 방은 쓸모없다. 하므로 이익은 있음에서 나오고 쓸모는 없음에서 나온다. -도덕경 11장

신은경_Photo Studio-Chair_디지털 프린트_94×119cm_2007
신은경_Photo Studio-Chair_디지털 프린트_94×119cm_2007

원본의 위의에 대해 최초로 시비를 건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다. 그런 시비에 그가 증거자료로 제출한 것은 사진이었다. 무한한 복제가 가능한 사진이었다. 그의 시비는 오늘도 그런대로 진행형이지만, 여러 곡절을 겪은 지금, 사람들은 좁은 의미의 사진을 넘어, 원본과 사본은 구별되지 않음을 거의 깨닫고 있다. 그래서 19세기의 사진 발명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다. 요컨대 어떤 실체로서의 원본은 이제 없어져 버린 것이다. ● 공간성과 시간성의 파괴는 사진으로부터 처음 왔다.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유일하게 붙박여 있던 상상력과 이미지는 사진을 통해 복제되어 장소와 시간을 이탈한다. 그런 사본에 의해 여러 무한한 가능의 조합이 생긴다. 기존의 의미는 뿔뿔이 흩어지고 재조립된다. 종래의 모든 존재들, 이른바 실재라고 여기던 것들이 다 파편으로 부서진다. 이리저리 재조합되어 엉뚱한 모습을 새롭게 나툰다. 그런 모습들은 전혀 영속적이지 않다. 미립자의 형태로만 존재하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없어진다. 생각해 보라. 사진이 없다면 현재의 이른바 가상공간이 존재할 수나 있겠는가. 우리의 모든 삶은 사본인 사진에 잇대어 있다. 사본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숨조차 쉬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사본에 인이 박인 삶을 우리는 산다. 사본인 사진이 없다면 꿈조차 꿀 수 없는 삶을 산다. 공기처럼 너무 편만하다. 그래서 그것의 존재를 잊고 산다. 수천 년의 문자가 이백년 정도 된 사진에, 그 사본에 자리를 내준 시대를 우리는 산다

신은경_Photo Studio-Chair_디지털 프린트_94×119cm_2007
신은경_Photo Studio_디지털 프린트_94×119cm_2007

사본, 그 가짜가 없으면 우리의 지금 삶은 없다. 우리 몸 60조의 세포들에는 그 사본에 의한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 그런 기억은 매 순간 생멸하다가 7년이 지나면 완전히 몸을 한 번 바꾸게 되지만, 그렇다고 새롭게 완전한 원본으로 태어날 수는 없다. 그 낱낱의 세포들조차 진짜의 실체라는 것이 없고 다만 진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모든 물질을 이루는 미립자는 일초에 4조에서 17조에 이르는 진동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미립자는 결코 고정된 실체로 파악될 수 없고 다만 하나의 에너지, 하나의 기억의 상태로만 파악될 뿐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손으로 쥘 수 있다는, 어떤 실체가 있다는 생각은 하나의 허구, 하나의 가짜의 믿음일 뿐이겠다. ● 결코 이름이 실체를 가리킬 수 없고, 다만 그 이름의 차이에 의한 가리킴의 유예만이 가능할 뿐임을 알게 한 사람은 데리다였다. 의미는 허공을 떠돌고 있어서 결코 손에 잡히거나 형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형상으로 고정되면 이미 죽은 것이고 의미는 그 죽음에서 이탈해버리고 난 뒤다. 그리하여 의미란 것은 어쩌면 아예 없다고 말한다. 줄기찬 현상만 있을 뿐 고정된 의미는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 저 20세기 말 서양의 지식들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사실이다. 그저 보이는 대로를 볼 뿐, 거기에 의미의 윤색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겠고, 이제까지의 모든 의미라는 것은 인간이 다만 제 깜냥으로만 해석해서 오히려 소유하고자 한, 이기적 발로의 투사일 뿐이라는 지적이겠다. 해서 휴머니즘이란 말 역시 인간중심주의란 말로 이제야 비교적 적확하고 겸손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 고달프게 살아남아 있는 몇몇 제대로 된 사회주의자들이야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후의 포스트구조주의의 폐해만을 여직 지적하고 있지만, 그 일견 거친 사상들에 의한 일깨움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상 보기에 또 그것에 근거한 실체라는 허구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어느 사상들이 해낸 업적보다 더욱 크다. 인간이 스스로를 의미의 주인으로 생각하던 시대에 진저리를 치고 그런 야만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한 사람들은 푸코와 데리다 들이었다. 좀 더 좁은 영역에서는 더글러스 크림프의 이런 말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아우라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창작품이어야 한다는 환상은 이미 있는 이미지들을 전용, 인용, 요약, 집적, 반복하는 것 등에 의해 대체되었다. 미술관에서의 잘 짜여진 담론에 필수적이었던 원작성ㆍ진품성ㆍ존재감 등의 개념은 붕괴되었다. 또 앤디 그룬버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진짜의 경험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개별 예술가의 신성한 시각이 있다고, 천재와 독창성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지상의 모든 사상(事象)은 다 소모되었고 현재의 우리는 줄의 끝에 서 있으며 우리 모두는 우리가 이미 본 것의 포로라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은 불안케 하고 혼란하게 하며 급진적인 생각임이 틀림없는데, 이미지에 대한 무차별의 생산자라 할 수 있는 사진이야말로 이런 현상에 큰 부분 기여를 했다는 사실 역시 힘들이지 않고 알 수 있다. 예술을 하되 이제 진짜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하라는 말이 되겠다. 또 그런 인식의 과정에 사진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서양의 경우를 예를 들어 좀 그렇긴 하지만, 저들은 1980년대에 이미 이런 깨달음을 통과해갔다.

신은경_Photo Studio_디지털 프린트_94×119cm_2005
신은경_Photo Studio_디지털 프린트_94×119cm_2007

. 진짜는 없고 가짜 역시 없다. 그저 진짜와 가짜라는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저 있을 뿐,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구별하는 것은 그야말로 의미 없다는 말이겠다. (도덕적인 말이 아니다.) 사진은 그런 사실을 그냥 보여준다. 삼차원의 공간이 이차원으로 구겨져 들어와 사진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데 다시 머리속에서 그 차원의 수를 분별해본들 무엇 하겠는가. 차원이 뭐 대수인가. 앗제나 잔더나 에반스의 사진이 왜 그리 중요하게 기림 받는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진의 한계와 흠결 그대로를 이차원으로만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고대의 벽화와 닮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대의 벽화가 그랬던 것처럼 그냥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일 조금이라도 기예와 분별이 가외로 개입된다면 오래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사진이 인간 의지의 분별에서 한 발 빗겨나 그 가짜와 진짜의 가치 판단에서 면제될 때, 사진은 그것대로의 생명을 획득한다. 기록이라도 좋고 패션이라도 좋고 예술이라도 좋다. 다만 무심하고 자신을 주장하지 말 뿐이다. 스스로의 의미를 다른 곳으로 흔연히 날려 보내는 기개가 있을 뿐, 진짜와 가짜의 구분에 목을 매지 않는다. 작가가 사라져도 좋고 작품의 이름이 잊혀도 좋다. 서양의 유형학 사진들에서 다만 그 동기에서, 다소나마 이런 모습이 드러나긴 했다. ● 신은경의 사진에서 그런 진짜와 가짜에의 상념이 일어선다. 작가는 어떤 의도였을까. 진짜를 기리고 가짜를 고발하려는 마음이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 우리 걸치고 사는 옷가지의 안감을 뒤집어 거기 사는 작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가볍게 다시 걸치고 안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색(色)의 카타르시스로도 볼 수 있겠다. 얼핏 샌디 스코글런드의 초현실주의적 세트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효용들로서만 이 사진들이 있다면 좀 서글프겠다. 어쩌면 보는 사람 쪽의 분깃이 더 많아진 때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터이므로 감히 다음처럼도 본다. 신은경의 사진에서 진짜와 가짜가 전혀 솔기 없이 잇대어져 있음을 본다. 진짜의 사진과 가짜의 의식, 진짜의 의자와 가짜의 배경막, 진짜의 카펫과 가짜의 개, 진짜의 베르사유 혹은 디즈니랜드와 가짜의 사진관, 진짜의 시간과 가짜의 공간, 이런 것들이 이 작은 종이 한 장 한 장에 아름답게 섞여 있음을 본다. 그리하여 진짜는 가짜가 없으면 있을 수 없음을 사진들은 보여준다. 우리 눈이 허상을 찍듯, 우리 뇌신경이 허구의 픽셀로 인식하듯, 사진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넘어 그저 현상으로서 왕래하고 소통한다. 역사에서의 위치와 미술관에서의 위치는 그 다음이다. 그것은 예쁜 그릇이나 강건한 바퀴살과 같은 것이다. 그릇의 빈 공간이 없다면, 바퀴 축을 꿸 가운데 빈 구멍이 없다면, 그릇과 바퀴는 무용이다. 다만 가짜의 상태로 스스로는 빈 상태로 고대의 벽화에 버금가는 사진의 쓸모를 생각한다. 신은경의 사진을 보면서 늘 천대받는 가짜에의 기림을 생각한다. ■ 김우룡

Vol.20070906h | 신은경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