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지배-고요함과 움직임

강구원 회화展   2007_0911 ▶ 2007_0920

강구원_우연의 지배- 고요와 움직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1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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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911_화요일_06:00pm

갤러리 쿤스트라움 서울 종로구 팔판동 61-1번지 Tel. 02_730_2884 kunstraum.co.kr

강구원의 30여 년의 집념이 「우연의 지배-고요함과 움직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다. 우연의 지배란 우리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우리의 일을 역사(役事)하는 어떤 힘이 우연처럼 작용하여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강구원_우연의 지배- 고요와 움직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70cm_2007

부제: 고요함과 움직임 ● 「우연의 지배」의 부제로 제시되는 「고요함과 움직임」은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고요함에 생명력을 일깨우는 작은 움직임을 테마로 한다.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말이다. 조는 듯, 병든 듯 움츠리고 앉은 소리개가 질풍노도와 같이 먹이를 덮치듯, 조용한 수면에 물고기의 싱싱한 도약이 물보라를 일으키듯 신선한 변화, 놀랄만한 상황의 전개를 의미한다. 그림에서 조는 듯 병든 듯한 상황과 잔잔한 수면은 여백으로, 소리개가 덮치고 물고기가 튀는 상황은 붓 터치로 상형된다. 강구원의 여백은 오랫동안 정성 들여 가다듬은 바탕화면으로 자리 잡는다. 그 바탕 위에 붓 터치라고 했지만 기실 망가진 붓이나 물감을 묻힌 꼬챙이로 화면을 파고들어 만들어진 환칠같은 선과 색채가 면을 만들고 화면의 깊이와 중층구조(重層構造)를 형성한다. 때로 덜 마른 바탕에 돌발적으로, 혹은 발작적으로 파고드는 일획(一劃)은 화면에 행위의 과정으로서의 궤적과 포말을, 결과적으로 전기충격파나 후폭풍처럼 심금을 파고드는 단속선으로 마무리된다.

강구원_우연의 지배- 고요와 움직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70cm_2007

강구원의 평온한 바탕과 발작적인 일획의 대치 및 조화의 화면은 동양적인 사고로의 변환 혹은 회귀에 대한 자기각성에서 온다. 서구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서구미술에 이끌려 다니던 세월에 대한 반성이었다. 여백이 그러하고 묵선(墨線)을 연상케 하는 까만 필선(筆線)이 또한 그러하다. 그 화면에는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으로 환원하려는 의지가 깃들이어 있다. 외면적으로 비치는 사람 좋고 배려 깊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불꽃같은 삶을 화면에 담고 싶다는 것이다. ● 차분하고 자상한 인상의 외면과 불꽃같은 내면의 만남이 현재의 여백 위에 파고 들어가는 단속선으로 상형된다면, 거기에 또 하나 화면의 주장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여백 만들기는 사실상 화면의 주장력과 처절한 투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화면은 자신에게 부여된 여백을 지키려 한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여백을 무의 상태, 혹은 아무런 인위적인 시도가 닿지 않은 최초의 화면(tableau)으로 남고자 한다. 그러므로 화면 위에 스스로의 세계를 형성하고 전개하며, 나아가 이상적인 화면질서를 꾸미려는 창조적 의지와 충돌하기 마련이다.

강구원_우연의 지배- 고요와 움직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10cm_2007

그 상충구조를 조화하기 위해 강구원은 화면을 오랫동안 정성들여 가공하여 보는 사람이 여백으로 인식하도록 하며, 나아가 화면에게도 충분한 영역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때로는 바탕화면을 만드는 데 약간의 무늬나 터치가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여백을 여백으로 남겨야한다는 화면의 자기보존 관성과 작은 충돌을 일으킨다. 아무런 터치나 시공한 흔적이 없으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여백의 화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때로 어떠한 표상적인 터치가 들어가느냐보다 심각한 고민이 될 수도 있다. ● 여백을 지키려는 화면의 아우성과 어느 정도 타협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여백을 침해하는 첫 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잘 만들어진 깨끗한 화면에 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처럼 경이적인 일이며, 그만큼 부담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구원에게 이 첫 시도는 가장 긴장된 순간이다. 화면과 자신이 정신적으로 가장 밀접할 때 만족할만한 시작이 만들어진다. 그럴 때는 모든 것이 무난하고,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손이 많이 간다. 없는 것이 좋은 것이되 적은 것은 그 다음 좋은 것이고 많은 것은 마음이 정화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강구원이 생각하는 첫 자국의 속성이다.

강구원_우연의 지배- 고요와 움직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00cm_2007

어느 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생명의 잉태와 전개를 창출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언제, 어느 정도의 과정에서 손길과 붓질을 원하는 조형의지를 멈출 수 있을까라는 문제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림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는, 이른바 카타르시스에 이르는 길을 찾는 순례자의 역정과 같다고 표현될 수도 있다. 화면에 보여지는 것과 보는 사람과의 소통은 스스로의 정화를 거쳐 숙성된 화면에서 비롯될 것이기 때문이다. 강구원의 동양적인 회화에 대한 갈망이 화면의 여백으로 나타났다면, 오랜 각고의 세월동안 가다듬는 여백으로서의 화면은 흉중구학(胸中邱壑)을 화면 위에 쏟아내는 동양화가의 기개를 닮았다. 흉중구학이란 언덕과 골짜기 혹은 도랑으로 상형되는 산천 경개를 눈이 시리도록 보고 마음에 담아둔다는 뜻이다. 또한 천석고황(泉石膏) 혹은 연하고질(煙霞痼疾)이라고도 했으니, 샘과 바위, 혹은 연기와 노을로 표상되는 산천 혹은 자연에 대한 집착이 고황, 즉 가슴 아랫부분과 명치 끝 사이에 끼어 들어 고칠 수 없는 병이 되었다는 이른바 자연찬가요, 자연예찬이다.

강구원_우연의 지배- 고요와 움직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97cm_2007

옛 사람의 산천과 자연사랑은 강구원에게 산천이 아니라 나무의 잘려진 모습,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사각형, 원, 또는 점 등 단순화한, 또는 본질환원된 요소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심상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형상과 색채, 그리고 공간의 문제가 가장 통제되고 억제된 상태에서 표출되는 조형의지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자연 대신 조형요소가 내면에서 숙성하여 어느 순간 화면으로 옮겨지는 것이 강구원의 흉중구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하기에 '네 그림에는 분노와 사랑이 공존한다'라고 지적할 수 있었던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 그렇게 강구원의 여백과 화면의 질서, 그리고 조형의지는 심적, 내면적 심상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화면의 주장력과 타협한 결과 조형성과 창의성은 행복하게 어깨동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강구원은 수평선이 죽음, 수직선은 삶이라는 조형적 해석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면, 동양화적인 맛에 대한 조형의지의 요구를 화면에 거부감없이 수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 화면상의 대 타협 위에 강구원 회화의 대전제인 「우연의 지배」가 설명될 수 있다.

강구원_우연의 지배- 고요와 움직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00cm_2007

주제: 우연의 지배 ● 동양화의 지취(志趣)를 도입하고자 하는 강구원의 의지는 화선지나 장지를 연상케 하는 밝은 화면과 그 위에 깔리는, 묵선을 연상케 하는 까만 선묘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화면에는 독필(禿筆) 즉 몽당붓으로 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선과 행위의 과정이 돌발적인 터치와 붓자국이 남기는 속도감, 그리고 비산(飛散)하는 포말로 자리잡는다. 고요함이라 할 수 있는 동양화적인 화면은 그러나 동양화에서의 일획(一劃)이나 일필휘지(一筆揮之), 혹은 파묵(破墨), 갈필(渴筆)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타쉬즘(Tachisme)을 연상케하는 대담한 붓자국과 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전기적 충격파같은 움직임에 의해 역동적인 화면으로 거듭 나게 된다. ● 이 상황에서 우연의 지배는 사실 제한적이다. 돌발적인 터치가 남기는 속도감, 날렵한 필선(筆線)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려나가고 튕겨 나가는 물감들의 궤적과 포말 등은 사실 예기치 않은, 상상할 수 없는 우연은 아니다. 그렇게 우연이라는 개념을 예견될 수 있는 반응, 예측가능한 궤적으로 규정하는 데는 유래가 있다. 그리고 그 우연, 그리고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현상계, 우연을 지배하는 필연이라는 종교적 체험과 종교관은 경우에 따라 모순명제로 비칠 수도 있다. ● 강구원은 오래 전 깊은 산중에서 작업했을 때의 체험을 토로한다. 마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86-1944)가 석양에 비친 자신의 작품에서 추상화면을 보았듯이 강구원은 어떤 우연적인 힘에 의해 작품이 완결되었던 경험을 토로한다. 실패작이라 생각하여 밖에 펼쳐 두었던 작품에 비와 이슬이 내린 후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었던 어떤 일에 우연처럼 이루어지는 어떤 필연의 역사(役事)가 있다는 생각은 이어 성경 안에서의 자유, 불교 안에서의 부처와 같은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고백이었다.

강구원_우연의 지배- 고요와 움직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00cm_2007

우연의 역사(役事) 이면의 종교적인 필연이라는 모순된 명제는 다시 종교성이 포함된 진실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작업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내 작품 앞에서 모자를 벗을 수 있는 작품'을 원했던 루오(Georges Roualult, 1871-1958)의 두껍고 신심 깊은 작품이나, 천상의 음악이라도 들려올 만큼 경건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oti, 1475-1554)의 「천지창조-Genesis」라기보다는 일견 '환칠'처럼 보이는 돌발적 터치와 우발적 흔적을 통해 그 종교성에 접근하려 한다. ● 그 종교성이란 시대성이다. 우리 시대의 종교는 도상과 상징에 의해 경건함을 줄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인스턴트 식품에 익숙한 세대에게도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가벼움이 있고, 그러면서도 그 뒤에 언제나 새로운, 또는 지루하지 않고 싫증나지 않는 어떤 세계라는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첨필(添筆)이나 가필(加筆)이 허용되지 않는 일필휘지(一筆揮之), 혹은 석도(石濤)가 말하는 일획(一劃)의 정미(精微)한, 그리고 절대적인 힘에 대한 신념이 강구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석도는 그림이야 사람이 그린다지만 일획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그림을 그릴 때 귀한 것이 생각이고 생각이 일관되면 마음이 상쾌하여 정미(精微)하고 예측할 수 없는 깊이가 나온다는 것이다. ● 석도류의 그러한 신념을 뒷받침하는 명제는 그리하여 지극히 명상적이고 철학적이다. 모순 명제를 정면 돌파하여 종교적인 경건함으로 인도하는 우연의 지배라는 명제가 먼저 그러하다. 그리고 우연의 지배에 따른 부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상을 문학적, 서술적, 또는 수필적 가벼움으로 펼쳐내어 보인다. 1996년 전시의 부제였던 '고기잡이를 위한 씻김'에서 강구원은 마치 물밑에서 노니는 물고기 떼의 위에 물로 태우는 소지(燒紙)를 띄운 것 같은 이중구조의 화면을 보여준다. 거기에 분할된 화면을 접합하는 부적같은 도상, 그리고 화면의 설명과는 무관한 문자가 조형요소로서 자리한다. 이 모든 것이 어울어져 전해주는 메시지는 가벼움 속의 진지함이다. ● 2005년 '마음으로 세우는 탑'에서는 탑을 세우지 않았던 송광사에서 본 마음의 탑을 소재로 했다. 공들여 만든 바탕 화면 위에 탑은 실제의 이미지를 본 따거나 연상되는 탑의 모습을 재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탑은 중력이나 구조와는 무관한 마음의 탑이다. 현상에서 본 이미지들은 때로 탑이라는 괄호 안에 갇히거나 실제의 모습에서 해방된 점이나 색반점, 또는 의미를 수반하지 않는 문자나 숫자로 나타날 수도 있다. 가필하지 않는 화면은 현재에서의 완전함을 무상등정각(無上等正覺)이라 일컫는 해탈의 경지를 표방한다.

강구원_우연의 지배- 고요와 움직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70cm_2007

대전제: 우연의 지배를 지배하는 필연 ● 그리고 이번 전시의 부제인 '고요와 움직임'이 있다. 여백은 시원해지고 표상적인 이미지와 비서술적(Non-narrative)인 문자 사인은 여백과 행복하게 조화된다. '고기잡이를 위한 씻김'의 초월적인 중층구조는 대담한 배색의 확신있는 구성으로 대체된다. '마음으로 그리는 탑'의 도발적인 마음 탑은 그렸다가 지운 형상의 그림자와 같은 완충공간을 통해 여백과 교신하면서 더욱 유연해진다. 포말-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포말이 강구원의 확신을 극대화한다. ● 인터뷰를 끝낼 즈음 개구리들이 여백 속의 터치처럼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연의 지배를 표방한 필연의 찬가를 부르는 강구원의 화실 바깥에서는 여백처럼 조용한 전원 산골의 평온을 깨는 개구리들의 합창이 화면을 파고드는 단속선의 전기적 충격파처럼 강구원의 일상과, 대화와 그리고 정신의 안정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 김영재

Vol.20070917h | 강구원 회화展

2023/10/2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