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다

정혜령 개인展   2007_0920 ▶︎ 2007_1003

정혜령_기억하다-엄마_판넬에 나무옷걸이를 태운 재, 재에서 나온 금속, 아교_122×8×60cm_2007

초대일시_2007_0920_목요일_05:00pm

갤러리 영 기획초대展

갤러리 영 서울 종로구 삼청동 140번지 Tel. 02_720_3939

실재와 부재의 사이에서 ● 정혜령의 작품은 개념적이고 지각적이다. 공간 너머에 있는 공간을 지각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공간을 입체로 표현하려 했던 작업에서 실재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인 물질, 장소, 공간을 주목했다면 최근의 사물을 태우고 남은 숯과 재를 이용해 원래의 사물을 재현하는 작업은 과정과 서사를 통해 추억을 재구성하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정혜령_기억하다-나무_판넬에 나무옷걸이를 태운 재, 아교, 캔버스_220×185cm_2007
정혜령_기억하다-등촌유치원_의자를 태운 재, 재에서 나온 금속, 아교, 캔버스, 아크릴박스_ 150×150×200cm_2007

그녀의 작업은 버려진 물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용도폐기된 사물들, 말라죽어버린 분재(盆栽)처럼 생명을 다한 생명체, 옷걸이, 의자, 개집 등 사소하고 주변적인 사물들을 수집하는 행위는 추억을 채집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어느 신혼부부의 침실에 놓였을 목각 기러기 장식품이 머리만 분리된 채 쓰레기처럼 길거리에 버려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에게 이것은 그 부부의 행복한 신혼시절을 상상하게 만드는 사물임에 분명하다. 또한 학교나 학원과 같은 교육시설에서 사용했을법한 의자는 여기에 앉았을 많은 사람의 체온을 떠올리게 만든다. 버려진다는 것은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놓인 장소로부터 추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잡다한 것을 수집함으로써 먼저 그것이 놓였던 장소를 기억할 수 있으며, 그녀의 작품은 그것을 사용했던 사람이나 개집처럼 그 속에서 살았던 백구를 추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을 가져온 그녀는 이 버려진 사물들을 조심스럽게 태운다. 실제로 그녀의 작업실에는 온갖 잡동사니를 태우면 나오는 부산물인 숯과 재를 담아놓은 그릇들이 마치 실험실의 용기처럼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어느 날 사라져버린 백구가 살았던 개집을 태우고 남은 것은 한 움큼의 재와 38개의 못이다. 그녀는 이것을 곱게 갈고 체에 걸러 중탕한 후 아교를 섞어 화면 위에 그 집의 형상을 재현한다. 아교를 섞었기 때문에 점착성 있는 숯은 불에 달궈진 못과 함께 화면에 안전하게 부착된다. 실루엣으로 재현된 개집 옆에 이 버려진 사물을 채집할 당시 촬영해 놓았던 실물 사진을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이 작품의 '잃어버린 시간과 장소'를 재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정혜령_기억하다-가족_테이블을 태운 재, 아교, 캔버스_170×120cm_2007
정혜령_기억하다-오래된 방_판넬에 줄자를 태운 재, 재에서 나온 금속, 아교_120×5×44cm_2007 정혜령_기억하다-오래된 방_불에 태우는 과정사진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영배나 밀라노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박선기처럼 숯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많지만 정혜령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숯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앞의 두 작가가 숯을 소재이자 매체로 활용하는 반면 정혜령은 이미 지나간 시간과 사물을 복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요셉 보이스(Joshep Beuys)의 돼지비계 덩어리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의 석탄은 비천한 사물을 통해 부르주아 취향의 고급예술에 대해 풍자하고 있으며, 언젠가 녹거나 재가 되어 형태가 사라져버릴 가변적인 물질을 통해 예술작품의 무상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정혜령은 죽어버린 것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태운 재를 재생한다. 어쩌면 의사(擬似) 연금술 같기도 하고,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죽은 사물을 정화하는 다소 종교적인 행위 같기도 한 이러한 과정은 죽어버린 사물의 그 버려진 시간을 연장하거나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므로 주술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그녀의 복원작업은 질량보존의 법칙을 따르고 있으므로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신을 화장을 하는 힌두교와도 상관없고, 더욱이 신비한 마술과는 더더욱 관련이 없다. 태우고 남은 숯을 이용해 실물의 형상대로 재현해 놓은 의자와 그 뒤에 놓인 발견 당시 의자를 촬영한 사진은 이 작품이 개념적이자 지각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정혜령_기억하다-그녀_나무문을 태운 재, 재에서 나온 못, 아교, 캔버스, 아크릴박스_100×196×240cm_2007 정혜령_기억하다-그녀_부분사진
정혜령_기억하다-그들_기러기 장식품을 태운 재, 아교, 캔버스_42×80cm_2006

사진이 실재인가, 아니면 그것을 태운 재로 다시 만든 의자가 실재인가. 이 애매한 경계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이미지로만 남은 의자는 소멸된 것이 아니라 기능이 없는 사물인 재현된 의자에 의해 지속되는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있다. 이 두 대상 사이에 가로놓인 것이 '기억'이므로 숯으로 만든 의자는 실물의 미라가 아니라 그것을 환기시키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창을 통해 실물이 누려온 시간과 그것이 본래 있었던 장소를 지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작가는 우연하게 발견된 사물(objet trouve)을 태우는 과정에 대해 탈시간성이라고 규정한다. 시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재치 있는 해석임에 분명하다. 추억은 늘 과거지향적이기 때문에 감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서 감상은 아주 작은 부분에서만 작동한다. 다만 포도주의 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코르크병마개를 태운 재로 그린 포도주병을 통해 파티를 추억하는 것은 개념적이면서 동시에 감상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숯으로 실재했던 사물을 재현해 놓은 작품들은 이미 죽어버린 시간을 기억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고착시켜 놓음으로써 탈시간적일 수 있다. 여기에서 작품이 환기하는 시간은 과거형이라기보다 현재형이며, 박제된 것이라기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가능한, 한 바퀴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속성을 지닌 것이다. 마치 일정한 주기로 진동하는 진자(振子)처럼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연속되는 그런 시간이 이 작품 속에 있다고 할까. 그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시간이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작업의 과정을 추론할 수 있도록 구성한 화면이다. 발견으로부터 소화(燒火)를 거쳐 한 줌 재로 남은 과정을 병치시킨 화면은 작품의 질료가 실재했던 사물이 남겨놓은 부산물인 숯과 재일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개입된 시간임을 말하고 있다. 분절된 이미지들이 증언하고자 한 것은 존재도 부재도 아닌, 그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이자 작가에 의해 새롭게 부여된 의미인 것이다. 최태만

Vol.20070924d | 정혜령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