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동산

류해윤 회화展   2007_1026 ▶ 2007_1115

류해윤_금강산 계곡_종이에 수채_76.5×57.5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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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26_금요일_06:00pm

송은갤러리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02_527_6282 www.songeun.or.kr

세탁소 한켠의 작업실 ● 류해윤은 화가 류장복의 아버지다. 그는 미아리 길음동에서 세탁소와 복덕방을 동시에 운영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가게 한 귀퉁이에 놓인 책상위에 작은 화판을 세워두고 그려나갔다고 한다. 다림질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혹은 월세나 전세를 찾는 이들과 함께 집을 둘러보고 온 후에, 그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그림들을 그렸다. 미아초등학교 근처의 그 세탁소를 찾아가 작업하는 장소를 봤다. 다소 감격적이었다. 작고 허름하나 이 세상의 어느 곳보다 안락한 오랜 집이자 직장인 이곳에서 그는 일과 그림 그리기를 아무렇지 않게 끌어안으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3층으로 올라가 옥탑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의 하루 행동반경은 1층 세탁소와 위층의 집과 '그림 방'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에게 그림 그리기와 삶은 분리 되지 않았다. 이 자발적인 그리기, 재미와 위안, 향수를 주는 작업에 몰두한 지도 어언 10여년이 돼간다. 그림을 그리면 잡념과 고민이 없어지고 만사형통이라 정신건강에 더없이 좋다는 류해윤. 그에게 '그린다'는 것은 늙어서 건강에 도움이 되고 심신이 더없이 편안해지는 방편인 셈이다. 건강한 노후를 그림 속에서 찾고 있으니 행복해 보였다. 상당수 작가들에게 작업이란 너무 어렵고 힘든 일에 속한다. 더러 재미와 유희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무엇을 그릴지, 어떻게 그려야 할지,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지에 대해 늘 조급해하는가 하면 동시대 미술의 흐름과 경향에 초조해하기도 하고 작품 판매와 화단에서 인정 받고자하는 욕망 사이에서 가쁜 저울질로 부산한 이들이다. 그러니 그림 그리는 일이 고역이고 힘겨운 일일 것이다. 작업도 먹고살자는 일이자 인정받고자 하는 일이며, 욕망과 권력의 시스템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으려는 안간힘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제도와 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오로지 재미와 즐거움, 자기 치유와 건강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황홀한 일일 것이다. 류해윤은 전문 화가도 아니다. 그림으로 먹고 살아야 하거나 화단에서 인정받고자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이다. 그렇게 되면 좋기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의 인생에 큰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이 주는 감동의 근원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외부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내부에서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한편, 자신의 추억, 소망, 건강과 유희를 위한 작업 말이다.

류해윤_통일동산_종이에 아크릴채색_87×176cm_2003
류해윤_금강산_아사천위에 아크릴채색_80×130cm_2004

아버지의 이야기: 기억 속 이미지들의 조합, 그리고 합성 ●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최소 한두 점씩 그려낸다. 대단한 작업량이 아닐 수 없다. 작년에는 그렇게 해서 모은 그림들을 가지고 인사동 쌈지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다. 생에 첫 개인전이었다. 그것은 지난 한 해 내가 보았던 전시 중 가장 흥미로운 전시였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수업과 방송, 글쓰기를 통해 그의 작업을 즐거이 소개하기도 했다. 전시가 끝나고서야 그가 류장복의 아버지임을 알았다. 내 기억에 류장복은 드로잉이 뛰어난 작가였는데, 특히 그가 철저히 보고 느끼고 그려낸 인물과 철암 풍경은 매우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류해윤의 세탁소도 찾고 작업공간도 둘러보고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볼 기회가 생겼다. 이날 류해윤의 집이자 작업실 방문은 류장복과 함께 하게 되어 그와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는 청력이 좋지 않아 대화하기가 약간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여태까지 작업에 대해 소상히 말해주었다. 보는 일이 작업이라 수많은 전시를 보고 다녔고, 웬만한 작업 앞에서 감동을 맛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내성이 생긴 나에게 류해윤의 그림들은 놀라움이었다. 추측컨대 류장복의 미술에 대한 재능은 상당부분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류장복은 자라오면서 단 한 번도 그림 그리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정규 미술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상경해서 어렵게 살아온 실향민이자 서울의 변두리 미아리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40년여 년을 살아왔을 따름이었다. 류해윤의 그리기는 9년 전인 1999년 노부의 죽음에서 우연히 시작됐다. 제사상에 올려놓기 위해 고인의 작은 사진을 그려달라고 화가 아들인 류장복에게 부탁했는데, 그것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그려본 것이 시작이었다. 일흔이 다 되도록 그림이라고는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던 그는, 영정사진을 놓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이 나올 때까지 열 번도 넘게 그림으로 옮겼다고 한다. 죽은 아버지의 얼굴 사진을 안쓰럽게 모방하고, 닮게 그리려 무던히도 애를 쓰다가 숨겨진 재능이 발아한 것이다. 그때부터 여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류해윤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던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다룬 것이 특징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미지들의 조합과 합성이다. 사실 류해윤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소학생 시절에는 군교육청에서 미술상을 받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서울로 가서 그림공부를 하려고 가출 시도까지 했다니 나름대로 화가가 되려는 열정이 꽤나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내 좌절되었고, 한국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온전히 내맡겨진 상태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인 그런 시대를 관통해왔다. 고향 땅을 떠나 낯선 서울의 변두리에서 세탁소와 복덕방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고, 그렇게 아들 삼형제를 낳고 길렀다. 생활에 쫓기다보니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꿈도 다 스러졌는데, 문득 부친의 영정사진을 그리다가 오랜 세월 잊고 지내던 재능과 열정을 되찾은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쨌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 아래서 열심히 그렸다. 세탁소와 복덕방 한 구석에 그림도구를 갖다놓고 그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어느덧 10여 년을 헤아린다. 그동안 500여 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모두 아들 류장복이 사진을 찍고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인터넷 전시를 하는 등 관리해준다. 그리고 가끔씩 들러 재료를 갖다 주기도 하고 그림에 관한 얘기도 나눈다. 이 블로그에 올라온 그림을 보고 매료된 화가 이진경의 주선 덕분에 류해윤은 생애 첫 전시를 열게 된 것이다. 나는 잠시 이진경의 포천 작업실과 홍천 작업실에 갔던 기억과 그녀의 여러 그림들을 떠올렸다. 그녀의 그림 역시 소박하고 아마추어적인 내음을 짙게 풍기는 키치풍의 그림이었다.

류해윤_백두산 천지_종이에 아크릴채색_51.6×75cm_2004
류해윤_남북통일육로_종이에 아크릴채색_54.4×78.4cm_2006

생의 경험과 상실을 담아내는 '위무' ● 류해윤은 독학의 작가, 아니 정규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이다. 그러나 그림에 관한 지식이 학교라는 제도에서만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만나고 체득한 모든 이미지들을 참고삼아 그린 그림을 보면 한국의 전통회화, 그러니까 산수화와 민화풍의 소재와 기법들이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변형되어 등장하는가 하면,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 일컫는 그림들의 소재 또한 빈번하게 차용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텔레비전이나 신문과 잡지에 등장하는 사진을 참조로, 모방해 그리거나 기억해두었다가 그려낸다. 이처럼 류해윤은 그 모든 것을 모방해가면서 자신이 본 이미지 위에 자신의 기억과 소망을 겹쳐 올려놓는다. 다시 말해 자신이 본 것들과 이른바 '미술'이라 통용되는, 그래서 아름답고 멋있는 장면, 미술의 주된 소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들을 따르거나 재구성해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는 그림 안에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역사와 흐름, 전통미술과 서구 근현대미술, 생활 속에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는 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상식이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그 안에 한국 대중이 간직하고 이해하고 있는 미술의 정체랄까, 그 모든 것들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런 그림들이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미술이자 지난 시간 동안 한국인에게 진정한 향수와 위안을 주었던 미술일 것이다. 류해윤의 그림은 전통산수와 민화, 이발소 그림과 성화, 상업미술과 대중적인 장식미술, 그 모두의 모방과 합성을 추구한다. 여기에는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지 않은(못한) 것에서 기인하는 부득이한 변형과 왜곡이 수반된다. 이처럼 자신의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 다소 어색한 표현들이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력으로 가시화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조형적 언어로 표출되는 편이다. 그가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은 이른바 산수화와 풍경화(이발소 그림)가 접목된 경우이다. 서구 풍경화가 한국에 토착화하면서 불가피하게 변질된 경우가 이발소 그림이고,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풍경의 전형이 되었다. 예를 들어 그림 안쪽에는 알프스처럼 만년설이 쌓인 뾰족한 산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침엽수림 지대와 단풍이 우거진 숲이 자리하며, 그 아래쪽에는 계곡과 다리, 초가집과 물레방아, 고추를 널어 말리는 마당, 지게를 진 농부와 아기를 업은 아낙네와 강아지가 있는 풍경처럼 말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정신분열적 풍경이라고나 할까? 네델란드로부터 연유한 그 풍경화가 일본을 거쳐 이 땅에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산수화와 만나고, 다시 근대화의 급격한 파고 속에서 상실해가던 농촌풍경과 고향의 추억이 다시 그 안으로 투사되면서 형성된 한국적 풍경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그림은 결국 류해윤 세대가 지닌 생의 경험과 상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동시에 그들을 위무해준다. 이렇게 대중성을 띠면서 삶 속으로 들어온 이발소 그림들이 류해윤의 미술관(觀)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류해윤_통일연못공원_종이에 아크릴채색_65.5×102cm_2006
류해윤_통일로에서 남과북을 바라보고 있는 한우_종이에 아크릴채_81.5×149cm_2006

유토피아, 시간의 보상과 소망의 호명 ● 류해윤의 산수 풍경화, 풍속 풍경화는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기초로 하거나 경험과 개념으로 아는 사실에 기초해서 만들어낸 풍경이다. 그에게 고향은 유토피아이자 파라다이스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노는 장면이 다수다. 어부들과 농민들이 어울려서 야외에 나와 음식을 끓이는 장면이나 상투를 튼 어민들과 머리에 띠를 두른 농민들이 야외에서 잔치를 벌이는「조선시대 어민과 농민이 함께 모여 5월 단오절을 마자 흥겨운 노리잔치」(2005) 등이 대표적인 그림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추억을 환기하고, 상실한 농촌 공동체 삶의 건강하고 낙천적인 측면을 환생시키고자 한다. 이는 도화경이고 그의 소망이자 옛 기억의 호출이며 잃어버린 시간의 보상이며, 위안이다. 이렇듯 정신건강을 돕고 추억과 향수를 자아내기도 하며 즐거움을 주는 그림 그리기이지만, 그에게 불만이 하나있다면 바로 실제와 닮지 않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기 전에 몸의 동작표현이나 다양한 상황을 여러 번 그려보면서 연습을 한다. 원근법이나 명암법과 같은 기초적 모방기술을 배우지 못한 입장에서는 당연한 불만이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독학 화가가 갖고 있는 개성적인 표현력과 순진무구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 모방의 기술을 터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어지는 변형과 왜곡, 그만의 고유한 조형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그는 모방을 추구한다. 그의 최대 목표는 모방적 재현이기에 그렇다. 인물이나 풍경 등 실제 대상을 놓고 그리기에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탓인지 그는 대부분 이미 재현된 이미지를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주로 참조하는 이미지 원천은 매일같이 접하는 신문 사진이나 텔레비전 영상이다. 모든 기성 이미지, 이른바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다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 것들을 모방하거나 잘 기억하고 있다가 자신의 기억, 환상,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다. 특유의 상상력이 낳은 소산으로, 기억에 의존하고 상상력과 환상을 첨가해서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상상력이란 예술적 영감 같은 것이 아니라 기억과 추억에 기반을 둔 개인적 정서의 소산이다. 이렇듯 류해윤은 그림 그리기를 통해 꿈을 꾸고 이상향을 떠올리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환생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내러티브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화며 신(新)몽유도원도이고, 낙원화요, 무릉도원화다. 주목할 점은 이런 그림 속에 어렵게 살았던 서울생활의 편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고향 땅과 관련한 추억만 있으니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과거에 어렵고 힘들었던 장면들은 하나도 없고 가보고 싶은 곳, 특히 금강산이 지속해서 등장하고 그 다음으로는 고향과 관련한 기억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또 하나, 그림마다 비교적 긴 제목이 붙어 있다. 아들인 류장복은 그림의 제목에 그린 날짜와 시간을 기록한다면, 아버지는 나름의 사연, 이야기를 제목으로 붙인다.-문화예술 325호(2007년 여름호)「어느 '부자'그림쟁이의 삶」 ■ 박영택

Vol.20071030g | 류해윤 회화展

@ 60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