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 Into Flower

김초희展 / KIMCHOHUI / 金初喜 / sculpture   2008_0104 ▶ 2008_0117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적동,FRP_가변크기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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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희 홈페이지_www.kimchohui.blog.me

초대일시 / 2008_0104_금요일_06:00pm

갤러리 쿤스트독 KUNSTDOC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0)2.722.8897 www.kunstdoc.com

반짝이는 진주가루 눈물에 묻어 반투명 아른거리는 통에 있다. 무엇을 보관하려 했는지 무엇을 간직하려 했는지 그 임자는 빛에서 온 무지개와 가냘픈 적동(赤銅) 안으로 이를 밀어 넣었다. 시간은 흘러 세월이 되고 공기의 요철이 매끈한 물질을 뒤덮을 때도 이 안은 모든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길들여지고 있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닮아가는, 아니면 하나로 섞여가는, 그래서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모가 깎이었다. 어쩌면 찬바람을 피하고 피해 여기로 왔고 발갛고 여린 맨살이 되어 깊은 잠을 자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저곳으로 나간 잎을 보거라. 여기처럼 틀이 없으니 스스로 동(銅)을 입었다. 그 가벼움은 무게를 갖고 그 모양은 한 방울의 눈물로 고착되었다. 생각해 보자. 꽃잎이 눈물이 되어 흐르지 않고 멈춰 서게 되었다는 것을... 어디나 할 것 없이 사물로 전락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슬픔을...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적동,FRP_200×300cm, 둘레628cm_2008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브론즈_100×83×40cm_2008

언제가 우리에겐 말랑말랑했던 감정이 흘러내린 적이 있었고 그것이 아쉬워서인지 미련이어서인지 하나의 애틋한 사물이 되었다. 그 후 나와 그 사물 사이엔 막이 쳐졌고 실체의 잔상이 막으로 번졌다. 그리고 오로라가 되었다. 무지개의 섬광을 테두리에 두고 실체에 조금 떨어져 사방에서 교차가 되어, 급기야 나의 시선을 현혹시키기까지 한다. 그것은 아우라가 아니었다. 단지 오로라였다. 사물로 온 입자가 대기를 이온화시킨 단순한 잔상에 불과한 오로라였다. 우리가 안타까워했고 애틋해했던 감정이 사물에 대상으로 교차하는 곳에서 배출되었고, 시야에 맞닿고 교란시키는 간극에서 힘을 잃었다. 더 이상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감정으로가 아닌 망막에 얼맺힌 상의 착각된 놀이였다. 이 놀이는 지각과 정념의 자유로운 유희로 장소의 냉정을 잃지 않는다.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브론즈_100×83×40cm_2008

누구나 어둠 안에 하나의 빛이 비춰진 무대에 서있다. 그 무대는 깊고 신중하여 침착하고자 하는 태도로 가득하였다. 이는 스스로를 환기시키는 정화의 장소요, 지극히 개인적이고자 했던 사심(私心)이 읊조린 시적인 공론의 장소였다. 과연 꽃에서 떨어져 나간 꽃잎 하나가 한 사람의 마음을 긁기 시작하였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허공에 달려 나의 잔상들과 함께 대기 중으로 휘발시켜 버려라 하였다. 그리고 아름답다 하였다. 비로소 미적 정서가 여기에 싹텄으니 그것은 시적형식의 눈물로 된 사물이었다.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FRP_80×85×15cm_2008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한 단어 한 문장 이들이 시각화된다는 것은 무게를 취하는 이미지의 내러티브요, 요술과도 같은 예술의 일루전과 다르지 않다. 궁극적으로 이는 정념(pathos)의 재현의 문제로 소급되니 과히 미적 정서의 문제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예술의 실체는 없어야 한다. 바로 그곳이 예술과 우리가 관계하는 지점이니 참으로 시선을 동요하는 미술의 무한한 힘이라. 언제나 감정처럼 미술은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 주변에서 선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대기를 실컷 들이마시며 다시 내뱉는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는 단순한 정서나 분위기로 그치지만 그것을 제어하고 조절하기 시작할 때 미적 정서로 우리는 정화된다.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적동,FRP_가변크기_2008

이곳은 꽃잎이 눈물로 봉인된 여성의 섬세한 손가락과도 같은 감옥이어라. 누군가 감옥을 거듭남 혹은 성장의 장소라 하는데 대상이 변하여 사물이 되었고 사물이 변하여 시적 장소가 되었다. 그 사물은 우리에게로부터 온 사적인 감격의 혼합된 이미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던 카타르시스 (Aristotle, 천병희 옮김, 『시학』, 문예출판사, 2000, p.47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를 언급하면서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관한 감정의 이행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행은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감정이 유발하는 곳에서 감정이 유발되는 곳까지 감정이나 정서, 정념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처럼 문학이나 예술은 감정이 감염되고 전달되어 결과물인 작품과 함께 환기된다. 무게를 갖는 시각미술에 적용시켜 봤을 때 대상이 되는 오브제, 사물은 시적인 형식을 취하게 된다. 시적인 형식이란 플롯(p.49)으로 사건의 결합이다. 꽃과 눈물의 이미지가 겹친다는 것, 이것은 사건의 결합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신화의 내용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 , 이처럼 조형예술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감격의 기념처라 할 것이다. 한 목동이 한 묘비명을 읽는 푸생의 작품 (Nicolas Poussin, , 1638. Oil on canvas. Louvre, Paris, France.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에는 문학적인 내러티브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묘비명에 쓰인 라틴어의 문자이며, 그 두 번째가 그것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목동들의 제스처다. 이처럼 작품 속에 서사시와 희극, 비극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은 매우 문학적이며 시적이다. 이러한 미술형식은 낭만주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으며 자연과학적인 측면에서 접근되기보다는 시적이고 문학적인 방식이라 하겠다. 지금의 미술과 관계하여 이러한 문학적인 시각화는 미술사의 도전적이고 문제적 측면으로 접근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이미지와 텍스트, 좀 더 구체화시켜 시각작업화와 문학작업화의 간극에서 떨리는 미적 시선의 갈등이 관객의 감상태도에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도전적 시각은 이 작업에서 세 가지의 형식으로 유추되기에 이른다. 그 첫 번째가 눈물과 꽃잎 등의 이미지들이 하나로 겹치면서 나온 '만들어진 사물'이다. 두 번째가 빛이 '만들어진 사물'을 비춰 필름에 맺힐 때 발생하는 흔들거리고 번진 잔상의 이미지들이다. 마지막으로 브론즈로 제작된 '만들어진 사물'과 적동으로 된 원형의 틀 그리고 그 안에서 위치가 조정되는 설치의 방식에서 오는 시적인 형식 즉, 플롯의 방식(사건의 결합)이다.) 처럼 문학적 감미로움이 '여기 미술공간에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꽃잎이 떨어진다는 쓸쓸한 사건일 수도 있으며 그것이 눈물이 되어 감정을 부여하는 하나로 이어지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미술공간은 '만들어지고 설치된 사물들' (이 작업에서 '만들어지고 설치된 사물'의 의미는 단순히 이미지화된 오브제 혹은 대상에 한정되지 않고 시가 함축된 정제된 가공물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 작업이 작가에게서 떠났고 다른 한편으로 작업이 여전히 작가의 심중에서 부유하고 있어서, 미적이다고 할 때 미적 정서나 감성을 건드리는 미적 오브제의 측면을 보여준다.) 로부터 온 섬세한 미감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 김용민

Vol.20080104e | 김초희展 / KIMCHOHUI / 金初喜 / sculpture

@ 통의동 보안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