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재생을 위한 의식儀式

김성남展 / KIMSUNGNAM / painting   2008_0107 ▶ 2008_0119

김성남_07-19_캔버스에 유채_72×6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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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0107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월~토요일_10:00am~06:00pm / 일요일_10:00am~05:00pm

갤러리 담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cafe.daum.net/gallerydam

김성남의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은 통상적인 풍경화, 또는 산수화가 가질법한 관조의 미와 달리, 전쟁이라도 치루고 있는 것처럼 격렬하다. 화면을 가득 메우며 뒤엉켜 있는 나뭇가지들과 잎새들은 온전한 제 형체를 잃고 거친 붓질로 짓이져져 있거나 흩어진다. 신록 우거진 여름 풍경에서 나뭇가지의 빽빽한 잎새들은 그 밀도가 넘쳐 녹즙이 되어 흘러내리고, 나목이 등장하는 겨울 풍경에서 숲은 꼿꼿히 선 채 불타오른듯 검은 형해를 드러낸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자연 속 폐가들의 모습조차 은폐된 긴장감으로 충전되어 있다. 그의 요즘 작품은 자연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으나, 고운 화포에 정성껏 모사된 아름다운 소재, 또는 본질과 겉도는 과장된 자연 찬가와 무관하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야생적인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원초적 자연은 만물이 비롯되었을 그 때의 평화와 축복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고 상처받고 신음하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흔적으로 나타난다.

김성남_07-4_캔버스에 유채_72×72cm_2007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둡고 깊은 숲 속에서는 피 흘리며 추락하는 새,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듯한 초식 동물,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갔을 이름없는 이들의 추레한 삶의 터들이 포착된다. 그러나 김성남의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의 처분에 맡겨져 그 회생을 기다리는 나약하고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치유코자 하는 징후들을 보인다. 불그스름하거나 푸르스름한 필터로 걸러진 폐가 안에서 피어오르는 수수께끼같은 불꽃이나 희미한 광채는 희망의 빛일 수도 있다. 모든 잎새들을 떨구어낸 스산한 겨울에도 자연은 그 밀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다음 해의 재생에 대한 암시가 깃들어 있다. 또한 녹음 아래 물웅덩이를 헤엄치는 인간은 여성인 자연 깊숙이 잠겨 들어가면서 에로스적인 합일을 연상시킨다. 여기에서 에로스와 죽음은 반대항이 아니라, 하나의 몸뚱이를 가진 두 얼굴이다. 머리카락 없는 인간의 작은 머리는 정지와 움직임, 색채의 대조 등을 통해 신록 우거진 여름 숲이나 나목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형태를 이룬다.

김성남_07-2_캔버스에 유채_72×72cm_2007

연작의 형태로 움직임을 보유하는 유영하는 인간은 자연의 불확실한 경계면들을 들락거리는 침례浸禮에 의해 다시 태어난 존재로, 그 신선함과 생동성을 가진다. 자연은 붓과 나이프를 이용한 속도감 있는 터치에 의해 그 외양이 아니라, 과정이 모사된다. 여기에서 파괴의 과정과 재생의 과정은 구분되지 않는다. 김성남의 작품은 태초에 순수한 자연이라는 것이 있고, 그 후 자연이 인간 때문에 파괴되었고, 그래서 다시 복구해야 한다,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라는 면에서 그의 작품은 모호성와 애매성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작품에 메시지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윤리적이기 보다는 미학적인 것이다. 폐가 속의 불꽃은 생명의 불꽃인가 죽음의 불꽃인가. 인간적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방치된 주거지에 다시 피어오르는 연기는 삶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일 수도 있고, 파괴의 과정을 가속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김성남_07-14_캔버스에 유채_72×45cm_2007

버려진 고택 안마당에 핀 붉은 꽃은 모든 스러져 가는 것들 가운데서 피어난 기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핏빛 난무한 비극적 정서를 자아내기도 한다. 헤엄치는지 익사하는 중인지 알 수 없는 인간이 보여주듯, 자연과 하나되는 과정은 죽음의 또다른 모습인 것이다. 거대한 자연의 운행 과정의 일부를 이루면서도 대조를 이루는 화면 속 작은 개체들과 불꽃들은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미물들 개개의 사정과 무관하게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가혹한 자연의 과정은 때로 신비롭게 조명되고 있다. 폐가 속의 빛이 모노톤의 배경 아래서 타오르는 영혼의 불꽃과도 같은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면, 광야에서 불타오르는 나무의 빛은 파괴의 과정을 가속화하는 광란적 활기가 있다. 그것은 가을에 죽고 봄에 소생하는 자연의 주기와도 연결된다. 인류학자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계절이 바뀜에 따라서 대지 위에 나타나는 현저한 변화의 광경에서 감동을 받고, 이 광대무변하고 경이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자연의 운행이 무리없이 변화하는 것을 일종의 드라마로 재현하는 인간의 관습의 예를 든다.

김성남_07-15_캔버스에 유채_72×50cm_2007

죽음과 부활을 되풀이하는 자연은 파종과 수확이 매년 되풀이 된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술극에서 재난에 처해진 듯한 초목이나 동물들은 성장과 재생의 상징이 된다. 인류학자들은 풍요를 기원하는 살해와 부활에의 약속을 전제하는 동서고금의 많은 풍습을 보고한다. 프레이저는 신이 매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는 신화적 원형을 설명한다. 미개사회에서는 풍부한 결실을 위한 농업의식에서 사람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식물의 화신인 '숲의 왕'도 살해되었다. 이러한 살해는 숲의 왕의 쇠약이나 노화가 자연의 재생력을 약화시킬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과 재난을 죽어가는 신에게 떠넘기는 경우이다. 죽어가는 신이 죄악과 재난을 짊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순수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화톳불을 피우는 것은 대지나 수목의 열매에게 해를 미칠지도 모르는 유해한 힘을 물리치는 정화의 의미를 가진다.

김성남_07-16_캔버스에 유채_72×45cm_2007

김성남의 작품에서 거친 들판에서 불타는 나무는 자연의 주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극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야생의 자연에서 펼쳐지는 극적 사건들은 초인이 등장하는 그의 옛작품처럼 신화적인 면모가 있다. 그러나 그의 파괴적인 붓질은 쉽게 코드화 될 수 있는 신화적 원형조차 파열시키려 한다. 그렇다고 계몽으로 회귀하지도 않는다. 가령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빛은 계몽의 빛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깊은 자연 속에 푹 잠겨있는 한 인물처럼 은자隱者적이고 비밀스럽다. 그것은 자연 구석구석을 비추는 찬란한 계몽의 빛 보다는 물질적인 불투명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신비로운 빛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자신의 확고한 외곽선을 잃고 생기하고 사멸하는 과정 그자체로 드러난다. 그것은 원초적 혼돈이나 맹목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의 작품은 그것조차도 의문에 붙여져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해석의 투명함, 도구적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낱낱이 밝히고 어떠한 비밀도 남겨놓지 말라는 명증에의 강요, 그것이 지향하는 강제적 개방과 공적 소통에의 요구 자체가 오늘날 자연이나 인간, 그리고 예술을 위기에 빠트렸다는 것이다.

김성남_07-18_캔버스에 유채_105×75cm_2007

그런 이유에서 오늘날 적지 않은 작가들이 현대의 병적 증후를 감지하고 치유하는데 있어, 비의적 전통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단지 비이성에의 경도가 아니라, 이성이 가능한 토대, 내지는 이성이 지향해야 할 목적의 전면적인 검토와 관련된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김성남의 전작인 초인 시리즈가 디오니소스적인 면모가 있다면, 요즘의 작품은 헤르메스적이다. 둘 다 아폴론적 사고에 대한 대조항을 이룬다. 철학자 롬바흐는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에서 어둡고 나쁜 것에 대한 승리자인 아폴론이 오늘날 지배적 질서의 상징이 된 과정을 설명한다. 아폴론과는 달리, 어두운 동굴에서 태어난 헤르메스는 죽은 사람이 지하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돕는 영혼의 안내자이며 전령과 통역자의 보호자이다. 그는 세계를 넘나드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들의 신이다. 김성남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모티브인 새, 소, 연기 등이 경계를 넘나드는 전령사를 떠오르게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이러한 전령의 신의 인도를 통해 도달하는 세계들은 드러나 있는 일상성의 세계와 비교한다면 불가해 한 것, 그런 의미에서 닫혀있는 어두운 세계들이다. 존재보다는 생성 또는 소멸이 강조되어 있는 야생적 화면은 현대의 지배적 질서의 원형이 되고 있는 아폴론적 세계의 이면을 이룬다. 자료, 사실, 해명, 법칙 등이 지배하는 아폴론적 세계는 자연을 도구로 삼아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하게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진보적' 세계는 자신들의 잣대로 계측되지 않는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행사해왔다. 김성남의 자연은 이성에 의해 번역되거나 환원되지 않은 원초적 질료로 나타난다. 그것은 자본과 노동에 의해 유린될 수 없는 무정형의 상태를 통해 현대가 강요하는 도그마와 질곡을 빠져나가려 한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세계의 유일한 척도나 출발점으로 간주되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불명료한 세계의 상황 속으로 자신을 내맡긴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다. 무한한 자연이라는 상황 속의 인간은 옛작품의 모티브인 초인의 세계, 즉 역사와 인간 이후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 이선영

Vol.20080107a | 김성남展 / KIMSUNGNAM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