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공간 NO.3-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

엄은섭展 / UMNSOUP / 嚴殷燮 / photography   2008_0116 ▶ 2008_0122

엄은섭_언어의 공간-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 _14sequences 431photographs_디지털 프린트_20×15cm_2005-200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9:00pm

광화랑_GWANG GALLERY 서울 종로구 세종로 81-3번지 Tel. +82.2.399.1152~3 www.sejongpac.or.kr

'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는 언어의 공간 3번째 작업이다. '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는 14.11 초의 음성언어를 431컷의 시각언어로 표현한 작업이다. ● '난 마리아죠'는 성경 속의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재조명한 뮤지컬『마리아 마리아』에 삽입된 곡이다. 우연히 농인 뮤지컬 극단이 공연하는 '마리아 마리아'를 보게 되었고, 김영민씨라는 농인(the deaf) 연기자의 마리아 연기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한국 무용가이자 수어 뮤지컬 배우이기도 한 김영민씨와 함께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을 기획, 작업한 결과가 「'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이다. '난 마리아죠'는 시각언어인 수어(手語)를 쓰는 김영민씨가, 그의 언어인 '표정'을 통해 표현한다.

엄은섭_언어의 공간-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 _14sequences 431photographs_디지털 프린트_20×15cm_2005-2006

나는 그동안 언어를 시각화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작업해 왔다. 이번에는 음성언어를 시각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동영상의 프레임(frame)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 동영상의 프레임은 사진의 컷(cut)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먼저 노래 속에서 14개의 나(또는 내, 날, 난 등)를 찾았다. 이것을 오디오 편집한 결과 14.11초의 음성언어에 해당하는 분량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영상을 위한 프레임은 초당 30프레임이다. 작가는 음성언어 14.11초에 해당하는 분량을 프레임으로 환산하여 총 431컷의 이미지를 얻었고, 촬영의 한계로 잡았다. 또한 각 상황은 음성언어로 표현되는 시간만큼의 프레임 수로 반복 촬영되었다.

엄은섭_언어의 공간-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 _14sequences 431photographs_디지털 프린트_20×15cm_2005-2006

우연적인 변이에 의해 확장된 언어의 공간 ● 사진기는 아무리 계산된 상황을 찍더라도, 순차적인 시공간 사이에 발생한 틈을 보여 준다. 사진기의 우연성과 자의성에 의해 채집된, 언어의 돌발적인 변이는 같은 시간 안에서 순차적이며 미묘한 언어의 변화를 볼 수 있는 동영상과는 또 다른 지점이다. 「'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 씨의 '나'」는 우연적인 변이를 통해 확장된 언어의 공간이다. '언어의 공간' 시리즈 ● 나는 '농인 표정 연구(2003)'에서 '단 27개의 방안에 누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다(2005)', 그리고 '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2008)'-까지, 농인(the deaf)과 함께 그들의 언어인 수어(sign language), 그 가운데서 농인의 표정(facial expression)을 통해 작업해 왔다.

엄은섭_언어의 공간-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 _14sequences 431photographs_디지털 프린트_20×15cm_2005-2006

왜 농인이며, 농인의 언어인가 ● 나는 소통의 접점을 시각언어에서 찾고자 한다. 농인의 언어인 수어(手語)가 대표적인 시각언어이고, 나의 모델은 시각언어를 모국어(mother language)로 쓰는 농인이다. 농인에게 귀는 바로 눈이다. 수어가 한국어, 영어, 불어, 독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음성언어 체계를 따르지 않고 시각운동체계를 따른다는 것이다. 수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손이 아닌, 오히려 비수지(non-manual)의 대표적인 영역인 얼굴이며, 표정이다. 수어는 가시성이 높은 얼굴 표정을 통해 언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게다가 농인의 표정은 단순히 감정의 표현을 넘어서 자기 표현기능까지 포함한다. 나는 이 표정 속에-음성언어가 간과할 수 있는 그리고 음성언어보다 밀도가 강한-상황을 느끼고 표현하는 개인의 주파수, 음고, 음색, 음량 등이 그대로, 혹은 보다 정직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이 시각적인 언어의 공간, 표정에는 사람마다 결이 살아 있다.

엄은섭_언어의 공간-난 마리아죠를 부르는 김영민씨의 나 _14sequences 431photographs_디지털 프린트_20×15cm_2005-2006

한편 농인의 '분리 이전의 감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다. 우리 몸의 감각은 청각, 시각, 미각, 촉각, 후각 등 오감으로 나눠진다. 농인은 하나가 덜 분리되었다. 바로 청각이다. 농인들은 청각에 해당하는 부분을 진동을 통해 감지한다. 진동을 통한 감지는 온몸의 전 방위적인 대응이다. 몸의 모든 기능이 열려 있어야 한다. 감지는 곧 소통과 연결된다. 그런데 청인(hearing people)인 나의 잘 분리된 오감은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고 있지 않나 싶다. 대개 청인들의 오감은 다시 이성으로 걸러지고, 편견으로 걸러지고, 해석과 판단으로 걸러지곤 한다. 우리는 극히 일부분만 선택적으로 선호하고, 판단하려 한다. '판단하기' 이전의 감각, '보기' 이전의 감각, '듣기' 이전의 감각... 오감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감각, 원(源)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원감각으로 내가 바람을 느끼면, ● 나는 바람이 될 수 있다. 햇빛을 느끼면 나는 햇빛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해석할 대상이 아니라 느끼는 그대로 그것으로 감응(affects)된다. 청각 기능 하나가 분리되지 않아 보다 원감각에 가까운 농인의 감각 속에 무언가 나도 예전에 갖고 있었던 감각, 지금은 잊혀진 감각-이 묻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나는 느낀다. 감지한다. 감지는 시작이다. 새로운 영역, 새로운 메시지, 새로운 의사소통-의. ■ 엄은섭

Vol.20080115d | 엄은섭展 / UMNSOUP / 嚴殷燮 / photography

@ 통의동 보안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