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와 단도

지은이_박화영

지은이_박화영 || 분류_예술 || 판형_160×210mm || 면수_122쪽

발행일_2007년 10월 19일 || ISBN: 978-89-960216-0-5 || 가격_10,000원 || 책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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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빵집'에서 출간한 『치자와 단도』는 미술작가가 기존의 미술영역(이를테면 갤러리나 미술관 등)에 머물지 않고 영역을 확장시켜, 출판 유통구조를 경로로 '관객/독자/소비자'에게 말을 걸고 다가서는 '작가의 책'이다. 대부분 많은 미술작품들이 유일한 물건으로서의 소장가치로 치환되는 것에 비해, 출판책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다수의 사람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을 얻을 수 있고 소장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가장 원시적 형태의 시간적 예술(time-based art)인 책을 매개로, 시각매체 및 텍스트가 펼칠 수 있는 새롭고 실험적 가능성들을 모색하고 표출하는 미디어아트이다. 『치자와 단도』는 동명 타이틀의 복합매체 미술 전시회에 때 맞추어 발간되었다. 『치자와 단도』 책은 단순히 전시회를 기록하거나 설명하는 기능을 하는 출판물이 아니라, 독립적 내러티브의 축을 구축하고 있는 복합적 층위로 구성된 총체 프로젝트의 뼈대 구조로 작용하는 서사적 책이다. 허구적 내러티브는 다큐멘터리적 영상 이미지들과 혼재하며, 실제와 허상의 경계가 뒤틀려 맞물린다. 비현실적 상상의 이야기를 현실의 실제 사이트, 오브제, 사진이미지 등이 증거하면서 현실적 단서들을 연상하게 하고, 또한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주변 현실 세계를 보는 눈이 학습되고 주입된 방식 너머의 시선으로 꿰뚫고 뒤집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치자와 단도』는 현실과 비현실 세계가 뫼비우스 띠처럼 이면(異面)이면서 서로 연결되어있는 비틀린 구조로 형성되어있다. 박화영은 이번 '작가의 책' 에서, 서사적 영상 이미지들과 텍스트로 마술적 리얼리즘 내러티브 속 내재되어 있는, 언어 및 소통체계, 환경 및 자연, 자본과 권력, 분열된 존재, 과학과 문명의 이기, 현대사회의 암울과 불안, 우연과 필연, 허구와 실제 등 복합적 요소들을 혼재시키며 엮어나가고 있다.

치자가 남기고 간 휴대폰에 저장된 폰카 사진들

"어느 날 예고없이 치자는 나의 집에 와서, 자초지종 설명도 없이 마루에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몸을 싣는다. 천천히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며시 기울여 눈을 감으며 귓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곤을 펼친 손 위로 한참을 따라낸다. 그날부터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거리낌없이 나의 집에서 산다. 치자를 치자라 부르게 된 것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그녀가 새하얀 치자꽃이 핀 화분을 품에 들고 좁고 습한 나의 방에 향긋함을 안고 들어온 각인된 기억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처음에는 대화가 도통되지 않아 알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나서는 벙어리 여자와 나름대로 학습된 언어를 배제한 소통을 하노라고 믿고, 또 굳이 소리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를 일도 없기에 묻지도 않았다. 몇 년 전부터 나의 집에 들어와 사는 이름없는 개를 마음 속으로 '단도'라고 부르듯이 그렇게 그녀를 속으로 '치자'라 부른다." (중략) ● "나의 영혼이 1년 전쯤 어느 날 돌연 집을 나가버린 이야기를 치자에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연신 두 눈은 나를 관통하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부풀어오른 눈으로 주시하다가 눈을 두 번 깜빡이고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지갑을 꺼낸다. 그 속 깊은 주머니에서 겹겹이 접은 작은 하얀 종이를 꺼내고선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겹 한 겹 펼치고 나니 사람형상이 드러난다. 막 가위로 싹둑 싹둑 거칠게 잘라 만든 듯한 모양새다. 심장 부위가 모양대로 구멍 나있고, 나름대로 눈구멍 콧구멍도 뚫려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게 펼쳐 보이고서는 이내 곧 차곡차곡 다시 접어 원래 지갑 위치 속에 고이 집어넣는다. 치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녀의 얘기를 알아들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의 영혼을 접어서 지갑에 넣고 다니면 도망칠 염려가 없는 거야'라고 내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지갑을 잃어버리게 되면 영혼도 함께 분실되지만 말이다. 이 말을 바꿔서 하면, 영혼을 방치하고 싶으면 살며시 어딘가에 지갑을 버리고 모른 척 가버리면 된다."(중략)

영혼접기

"영혼이 바닷가를 걷다가 모래사장 위에 파도에 실려 나온 기이한 불가사리 하나를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불가사리가 별처럼 다섯 갈래로 되어있는 것과 달리 그 생긴 것이 마치 벤쯔 자동차 마크처럼 세 갈래로 뻗어있다.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니 요상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징그럽게도 작은 입 같은 부위로 무슨 미세한 노랫소리 같은 것을 내는데, 귀를 갖다 대고 자세히 들어보니, 멜로디가 제니스 조플린의 '메르세데스 벤쯔(Mercedes Benz)' 를 노래하는 것처럼 들린다. 영혼은 잠든 단도의 꿈 속에 나타나 이 기묘한 불가사리의 노래를 들려준다. 노래 속에 치자에게 전할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호를 단도에게 담아 보내, 치자가 제니스와 만나 블루폰드(Blue Pond)에 함께 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중략) / 본문에서 발췌

제니스, 영혼, 그리고 단도

박화영이 고안한 『치자와 단도』에서의 복잡한 구성요소들과 중층적 레이어의 이야기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나레이터는 "이것은 아무 것도 찾지 않는 이야기이다"를 반복 강조한다. 그리고 등장인물 '나'의 상태를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와 '치자'는 불현듯 동거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나'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설명하는 단서도 하나도 없을 뿐더러, 둘 사이의 인간적 관계를 암시하는 것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관계에 대한 구차한 설명 없이, 다만 파편적 에피소드들의 축적 속에서 그들이 함께 지내는 것이 우연 만은 아닌 필연적 암시들을 단서로 남긴다. ● '치자'는 말없는 벙어리 여자로 처음 등장하는데, 박화영 작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 무언의 요소는 빈번하며, 말이 많이 나오는 경우에도, "소리"(1998)에서 처럼 짓지 않는 떠돌이 개가 등장하거나, "별일없지?"(2002,3)에서 말소리를 모두 음절단위로 난자해 음소로 들리게끔 뒤섞어 놓거나, "블라인드 스퀘어" 및 "ㄹㅗㄱㅇㅏㅂㅏㅇㅣ"에서 처럼 음향이 말소리를 치환하는 등, 학습된 언어의 왜곡된 소통의 한계를 주제로 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소리"에서 나레이터가 "나는 너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너 또한 나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를 건조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을 떠올리면 그의 작업 저변에 깔린 공통 주제를 감지할 수 있다. 「치자와 단도」 비디오작품에서도 두서없이 갑자기 스페인어가 등장하고, 해양깃발 신호, 수화, 수화처럼 보이는 손동작, 자연물이 전달하는 무언의 암시적 언어 등 다양한 표현수단이 나와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소통을 전복시킨다.

루마니아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는 그림

개 '단도'는 그 이름이 함축하는 날카롭고 재빠르며 명쾌한 이미지와는 상이하게, 책 속에서는 세상 편하게 널브러져 낮잠이나 자고 산책이나 졸졸 따라다니는 평범한 개로 등장하지만, 쓰레기장에서 예시적 '루마니아 그림'을 발견했을 때도 '단도'가 '치자'를 거기로 안내하는 것처럼, 실상 더 깊고 넓은 투시안을 갖고 육감적으로 세상을 감지하는 것은 '단도'이다. '단도'는 꿈속에서, 인간들이 보지 못하고 연결시키지 못하는 비선형적 해체된 파편들을 체험하는 예지력을 갖고 있으며,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개체들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도 수행한다. 이런 '단도'의 숨은 능력은 이번 작업에 전반적으로 자연이 잠재하는 위대하고 신비한 에너지가 각종 동식물의 무언의 목소리로 드러나는 것의 연장으로 보인다. '치자' 캐릭터는 일반 사람보다 조금은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등장인물로 나온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연의 동식물과 '대화'하는 방식을 실천한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뱉지 않은 채 자신의 세계와 호흡한다. 치자의 생각들은 그녀의 삶의 방식과 그녀가 남긴 그림들과 시 등으로 드러난다.

치자의 식빵

책 속 등장하는 '나'는 의구심과 호기심이 많아 부조리한 세상을 관찰하며 많은 실마리들과 의문들을 허공에 던져 놓는다. 발견한 이상한 단서들을 조각 맞추며 다소 황당한 상상으로 치닫기도 하는데 추리를 귀결시키거나 증명하는 경우는 없다. 이야기의 나레이터 또한 이야기의 귀결된 설명으로 친절하게 마무리해주지 않는다. 남겨진 육신인 '나'를 떠난 '영혼'은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며, 자연 속을 방랑하고 다니다가 발견한 단서들을 '단도'를 통해 암시적 메시지로 보낸다. 확연히 제니스 조플린을 빗댄 것으로 보이는 '제니스'는 '치자'와 만나 상상의 빨간 오픈카 벤쯔를 타고, 화려해 보이는 세상을 까뒤집은 듯한 풍경 속을 유영하며 탐방한다. '메르세데스 벤쯔'라는 곡은 제니스 조플린이 자본사회 속 소득분배의 불균형 및 소유의 문제를 역설적으로 노래한 해학이 있는 70년대의 풍자곡이다. 그녀는 노래한다, "주님, 나 벤쯔 한대만 사주세요. 내 친구들은 다 포르쉐 타요..." 그들이 당도한 이 디스토피아적 세상을 '블루폰드(Blue Pond)'라 명한 것은 어쩌면 푸른연못 '청담'을 직역한 것으로 서울의 화려한 자본주의의 표피를 드러내는 지역을 풍자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의 논리로 권력과 재력이, 넓은 바다로 분배되어 널리 펼쳐지지 못하고, 자꾸만 작은 연못으로 고여 드니 물이 쉽사리 썩기 마련이다. ● 시공간을 초월하여 만난 이 두 여자가 상상의 벤쯔를 타고 달리며 관찰한 시점 속에 자본과 권력의 질서만을 맹신하는 현대사회의 암울한 거품 같은 자화상을 보여준다. '자연'이 우리에게 한없이 말을 걸어오는 암시적 양태들이 여러 모습으로 드러난다. 바위, 나무, 꽃, 풀, 바람, 이끼, 숲, 바다, 그리고 고래, 코끼리, 참새, 거미, 불가사리, 개 등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메시지를 '청력이 있는 귀머거리들' 인간들에게 한없이 속삭인다. 자신의 통나무토막의 목소리를 듣는 '트윈 픽스(Twin Peaks)'의 '로그 레이디'의 깜짝 등장도 이런 측면을 보이기 위함일 것이다. 우주의 질서 및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왜곡시키지 않고 영위하던 것들이 인간의 인공적 개입으로 틀어지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위협받는 것에 대한 징후들이 작업에 드러난다. 실제로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미스터리한 '집주인'과, 주인집에 임시적으로 사는 이들을 둘러싼 많은 의문과 의구심은 현대사회와 환경을 사는 위기의식 속에서 불길한 징후들을 예견하는 불안심리를 보여준다.

치자의 책상

신속한 이윤에 익숙한 자본 논리에 순응하는 프로그램된 언어들이 팽배하고 그 소음은 귀가 아프도록 시끄럽지만, 정작 인간 본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 없는 침묵이다. 『치자와 단도』는 거대 자본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개체들이 소멸되기 쉬운 현대사회를 사는 이들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어조로 말을 건네고 있다. ● 저자 박화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동경, 뉴욕,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과 뉴욕에서 미술과 영화를 공부했다. 세계 곳곳에서 전시회, 상영회, 멀티미디어 공연 등을 하였으며,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복합적 매체를 다양하게 섭렵하는 미디어작가로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 책빵집

Vol.20080129d | 치자와 단도 / 지은이_박화영 / 책빵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