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House

윤소연展 / YOONSOYEON / 尹素蓮 / painting   2008_0220 ▶ 2008_0305

윤소연_부엌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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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연 블로그_blog.naver.com/soyeun94                      페이스북_www.facebook.com/soyeon.yoon.965 인스타그램_@soyeun794            

초대일시 / 2008_0220_수요일_05:30pm_가나아트 스페이스            2008_0228_목요일_06:00pm_롯데갤러리 대전점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1층 Tel. +82.(0)2.734.1333 www.ganaart.com

롯데갤러리 대전점 LOTTE GALLERY DAEJEON STORE 대전시 서구 괴정동 423-1번지 롯데백화점 9층 Tel. +82.(0)42.601.2827~8 blog.naver.com/sonsjsa www.instagram.com/lottegallery_official

일상, 암시적이고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지층 ● 윤소연의 그림은 작가 자신의 생활공간이지 싶은 실내정경을 보여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발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신발장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성별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신발장 하단에 줄지어선 부츠로 보아 여성일거라고 짐짓 짐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짐작은 옷장 밑에 놓인 구두나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를 보고 보다 분명해진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응접실 한쪽에는 벽면에 면해 긴 탁자가 가로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일상적인 물건들이 어지럽지만 자연스레 놓여 있다. 응접실 옆 의자 밑에 종이 상자가 놓여 있고, 그 상자에서 꺼내어졌을 하이힐 한 켤레가 탁자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 구두는 작가 자신이 최근에 직접 구입한 것이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것일 것이다. 어느 경우이건 상자를 막 열어 새 구두를 꺼낼 때의 작가의 들뜬 마음을 보는 듯하다.

윤소연_수다중_캔버스에 유채_60×90cm_2008

응접실에 앉아서 보면 그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부엌에는 싱크대와 식탁이 놓여 있다. 가스렌지 위에 주전자가 끓고 있고 식탁에 막 끓여냈을 커피 한잔이 놓여 있다. 커피 한잔. 왜 한잔일까. 그녀는 미혼일까 아니면 기혼일까. 혹 애인이나 손님이라도 찾아온 것일까. 옆 접시에 놓인 봉지로 보아 그 커피는 인스턴트임이 분명해 보이는데. 누군가를 접대하기 위해 커피 한잔을 끓여내는 일이 없지는 않겠지만 쉽게 상상되지는 않는다. 새 구두도 그렇지만 특히 인스턴트커피 한잔에서 왠지 모를 외로움(혹은 삶의 여유?)이 묻어난다. 그림 속에 정작 사람은 그려져 있지 않지만, 사람의 흔적을, 막 일어났었을 일상적인 사건을, 때로 작가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로 와 닿았을지도 모를 사건을 상기시켜준다.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들, 다만 암시적인 것들의 개입으로 인해 그림이 갑자기 경직된다. 너무나 일상적인 정경이 불현듯 불러일으키는 이 긴장감은 무엇일까. 관음증. 엿보기. 타인의 방. 나는 과연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의 주체를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일이 그림을 읽는 독해행위와 무슨 결정적인 관계가 있을까.

윤소연_신발장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07

윤소연의 그림은 자신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려서 보여준다. 그의 일상은 실내에서 진행되고 그의 사건은 실내에서 일어난다. 일종의 실내 정경화로 범주화할 수 있는 작가의 그림은 현대인의 달라진 자기 정체성을 반영한다. 현대인은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도회인이며 도시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가 비록 전원생활을 하거나 나아가 실제로 농사를 지을 때조차 그의 생활방식과 생활철학만큼은 도시적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연이 없다. 있을 때조차 그 자연은 별반 의미가 없거나 적어도 아무런 실질적인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에게 한 송이 꽃은 플라스틱 조화로 대체되고, 모니터의 파르스름한 빛깔이 하늘을 대신한다. 그는 실제로 여행하기보다는 공상과 더불어 여행하기를 즐긴다. 모니터 속의 자연은 실제보다 더 감동적이며, 여행사의 선전 리플릿에 실린 환상적인 풍경은 현실에서처럼 결코 꿈을 배반하는 일이 없다. 무엇보다도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대면해야 하는, 그래서 꿈꾸기의 흐름을 단절시켜 재차 현실로 되돌려놓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가 않는다.

윤소연_옷걸이_캔버스에 유채_162×97cm_2007

MP3와 워커맨, 이어폰이나 해드셋, 그리고 슬라이딩 도어 형의 핸드폰 등 첨단의 장비들로 무장한 디지털노매드인 그는 오늘도 현대판 정글인 도시를 배회한다. 자연광보다 더 감동적인 네온사인 불빛이나, 자연광보다 더 마음을 들뜨게 하고 진정시켜주고 편안하게 감싸주는 조명빨의 세례를 받을 때 나는 더 아름답게 빛난다. 조명빨 아래서만큼은 심지어는 고독조차도 찬란하다. 그 고독이 부조리한 삶과 부닥치면서 빛바랜 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온통 무의미한 일상들, 진부한 삶들에 점령당한 내가, 이 공허하고 권태롭고 막막하고 정지된 것처럼 아주 느리게 흐르는 공기에 둘러싸인 내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 일상을 낱낱이 기록해보자, 여하튼 그것들은 나 자신이지 않은가. 진부한 일상을 기록하기. 틀에 박힌 일상을 지겹게 옮기다 보면 혹 그것들이 나를 구원해 줄 의미를 한줄기 섬광처럼 열어 보여줄지도 몰라. 진작부터 사소설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진부한 일상에서 의미 찾기, 무의미한 일상을 유의미한 이상으로 승화시키는 종류의 감성이 탄탄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형이상학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담론에 견인되는 이상주의자보다는 미시담론과 개인서사에 이끌리는 미시적인 종족, 체질적으로 미시적인 감수성이 발달한 종족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상을 기록하는 윤소연의 재현행위는 태생적으로 도회적 감수성에 물든 대부분의 신세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미시담론과 개인서사에서의 의미 찾기에 맞닿아 있다.

윤소연_옷방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7

윤소연의 그림은 사실적이기보다는 회화적이다. 사실적으로 보일 뿐 드로잉의 경향성이 강한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사물의 즉물성(핍진성)을 손에 쥐어주기보다는 사물의 암시적인 태(잠재태)를 드러내면서 그림을 심층적이게 만든다. 밋밋한 평면과 오일 조밀한 사물들, 단조로운 색면과 어질러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연스레 자리하고 있는 물건들, 타일과 같은 복잡한 패턴과 벽면이나 간이벽체와 같은 상대적으로 심플한 구조가 대비되면서 어우러진다.

윤소연_작업실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8
윤소연_흰색테이블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7

이 일련의 그림들은 자신의 일상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진부하고 세속적인 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최근의 일상성 담론과 맞물린다. 그림일기처럼 사사로운 사건을 기록해 보여주는 작가의 행위가 자기 고백적이고 자기 반성적이며, 때로 관음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도회적인 감수성을 자아내는 실내정경에 그 초점이 맞춰진 그림들이 신세대작가들에게서 나타난 미시담론과 개인서사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대동소이한 생활방식으로 인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일상성 담론과 강하게 연동된 실내정경화는 원래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재조명된, 실내를 은근하게 감싸는 빛과 연예 감정으로 나타난 얀 베르메르에게서 그 정점을 확인해볼 수 있지만, 작가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인상은 이보다는 팝아트의 그것에 더 가깝다. 일상의 전체 맥락으로부터 일정 부분을 떼어내 클로즈업해 보여줌으로써 일상에 내재된 의외성을 드러내고 암시하는 것이다. 그 태도는 생리적으로 전통적인 회화보다는 사진과 영상 이후의 변화된 감수성을 반영한다. 이를 통해 윤소연은 무의미한 일상에서 유의미한 이상을 캐내는 행위를 보여주며, 그 행위나 과정은 일정정도 예술의 본질과도 통한다. ■ 고충환

Vol.20080219f | 윤소연展 / YOONSOYEON / 尹素蓮 / painting

@ 60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