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로서 말하다...

양상근展 / YANGSANGGEUN / 梁商根 / sculpture   2008_0627 ▶ 2008_0716 / 월요일 휴관

양상근_'다른'나로서 말하다..._점토_가변크기_2008

초대일시 / 2008_0627_금요일_05:30pm

작가와의 대화 / 2008_0714_토요일_04: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월요일 휴관

샘터갤러리 SAMTOH GALLERY 서울 종로구 대학로 116 (동숭동 1-115번지) 샘터사옥 Tel. +82.(0)2.3675.3737 www.isamtoh.com

두꺼운 책 한권이 몇 개의 문장으로 다가오듯이 양상근의 작품은 인간의 온갖 목소리를 담으면서 상반된 생각들 -생명과 죽음, 절망과 희망, 진리와 모순- 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그의 'Fired Clay Sculpture'가 효과적으로 그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양상근은 작가 자신의 마음을 떠돌아다니도록 놓아두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여러 작품 앞에서 '나'를 망설이게 할지도 모른다. ● 일상에서 범상해졌을 우리의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내부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고독의 공간과 나의 신체에 새겨졌을 나로서 참되게 살았던 추억은 다시 한 인간으로서 작품을 읽어나가게 한다.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될 수 없는 일상에서, 잊혀진 오래된 문제들의 의미를 찾는 것은 내 몫이지 않느냐고 작가는 되묻고 있다.

양상근_'다른'나로서 말하다..._점토_가변크기_2008

내가 있는 공간, 나는 바로 그것이니 / 고즈넉한 닫힘과 고즈넉한 열림으로 한 영혼에게 다사로운 말을 건낼 것 같은 상자. / 지붕도 없고, 창도 없고, 문도 없는, 벽만 있는 공간. / 그 상자와 공간의 벽면이 떨어져 나온 듯, 다른 모습으로 일렁이는 곡면들.

양상근_'다른'나로서 말하다..._점토_가변크기_2008

각각의 작품은 표현될 수 없는 의미를 짙은 회색과 밝은 흙빛의 대비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양상근은 그동안 주로 검은색과 저채도의 작품을 통해 절망적 생과 생의 부활을 포괄하는 의미로써 작가의 언어처럼 색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의 색채는 감성적 성격이나 작가가 추구하는 의미보다도 본연의 의식을 깨우는 경적소리 같은 내적 충격을 주고 있다. 색채는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는 듯하나, 작품에서 보이지도 않고 그려지지도 않는 존재로 하여금 자신의 안과 밖이라는Noumenon-Consciousness 2003 모호한 경계에서 경적소리를 듣게 하는 반전을 주고 있다.

양상근_'다른'나로서 말하다..._점토_가변크기_2008

상자는, 특히 우리들이 다스릴 수 있는 작은 상자는, 열리는 대상이다. 상자가 닫히면, 그것은 외부 공간 가운데 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열리는 것이다! 자신에게만 속하는 이야기, 그것은 남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화려한 세부 내용만을 이야기해 줄 뿐이다. 그것의 존재 자체는 나의 것이고, 나는 결코 그것을 전부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각 자신의 작은 상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 역시 상자라는 메타포(metaphor)를 통해 다양한 작품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 닫혀있는 상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상자보다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을까? 과연 그럴까? 작가는 상자의 윗면을 차지하는 4개로 구분된 각각의 면을 정말 고즈넉하게 열어 두었다. 그리고 벽만 있는 기하학적인 건축적 공간 역시 시선을 받아들이는 위쪽 공간을 오히려 무한한 공간과 연결시키고 있다. 일렁이는 곡면들은 쌓이기도 하고 공간을 부유하기도 하며 '안과 밖'을 다양한 틈새로 들여다보게 한다. 스스로를 감추는 존재로서가 아닌 비밀을 열듯 자신을 여는 존재로서 접근하고 있다. 제한된 것과 제한되지 않은 경계를 언제라도 허물 수 있는 개념의 장치는 없다. 대신 작가는 여러 틈새와 색깔의 대비를 통해 이미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 내가 나 자신의 은닉처이기를 고집한다면 나조차도 나의 변화를 볼 수 없다. 양상근은 이번 『다른 나로서 말하다』展에서 스스로를 들추어내고자 내적 모순에서 오는 부대낌을 공간적 고립과 확장으로 풀어내고 있다. '나'의 지긋지긋할 수 있는 안과 밖의 고통스러운 경계에 서 있을 나에게 그것은 서로 내밀하며 도치될 수도 있는 관계라는 것을 색의 구분으로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 그렇다면 일상적인 습관으로 무감각해진 견고한 습관을 잠시 벗고, 격리된 나를 끄집어 내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만들어 놓은 안과 밖의 경계는 격리가 이유였을 수 있으나, 그것은 나 자신의 무제한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도 있을 테니...

양상근_'다른'나로서 말하다..._점토_가변크기_2008

지속될 이야기, 나의 암시 ● 양상근은 종교적 의미에서 형식화된 근엄한 부처의 얼굴에 삶의 절박성에 구속되어 있는 인간의 표정을 덧입혔다. 이 작품은 일정한 틀에 끼워 맞춰진 군집된 인간상처럼 보인다. 종교적 모티브인 불두(Buda's face)佛頭를 차용하면서도 액자틀로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하며, 흐트러트린 얼굴은 형이상학적 가치의 '문턱'에 도달하지 못하는 삶의 풍부한 혼란 같다. ● 인간의 몸 가운데에서 얼굴은 내적인 통일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작가는 그 얼굴에서 인간의 본질을 읽으려 시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상징으로써 얼굴이 있고 없음은 의미가 없어진다. 단지 그것의 암시가 개인의 정서적 흔적을 어떻게 풀어내게 하며 해석하게 하는가에 있다. 그 암시는 2007년에 제작된 '자화상'작품처럼 직접적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얼굴이라는 인격의 거울과 같은 장치를 제거했다. 껍데기만 남은 육체를 걸어놓은 듯한 작품으로, 인간의 불변의 본질에 대해 직감적으로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의식적으로 외적 지배가 중단된 자유로운 정신을 상상하게 한다. 조금 예민한 사람이라면 앞서 언급한 다른 작품들보다 강하게 내적 세계로 이끈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만큼 작가의 의도는 작품에서 바로 전달되고 있다. 즉 내적으로 완전한 통일성을 달성하지 못함에서 오는 혼란을 없애려 그는 껍데기 같은 외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정신의 지배가 중단되어 자화상 2007 영적 불구로 살고 있을 지도 모르는 나의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는 것이다. 너덜너덜해지도록 방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스런 나의 통증을 작가는 계속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지속될 통증이 말하는 이야기는 그 무언가(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시키는)가 여전히 전제조건이다. 작가는 2007년 이 작품을 2008년 다른 작품들과 병렬적으로 읽어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역전되는 '안과 밖', '나와 다른 나' 사이의 관계를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코드로서의 의미이다.

양상근_'다른'나로서 말하다..._점토_가변크기_2008

양상근은 그동안의 개인전에서 전시명이 작품명이 되고, 작품 전체가 하나의 상징이 되는 응집력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초기 작품에서 보이던 작가의 강한 자의식이 강도 높게 읽혀졌던 작품성향은 2003년 이후, 점차 바라보는 주체에게 모든 해석의 자리를 내어주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이제 그의 개성과 일관된 색채가 작품의 언어를 한정하거나, 인간의 존재의미를 확고하게 전달하려고 자신에게로만 침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극도의 절망감 같은 암시인 2007년 '자화상'작품을 2008년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며 다른 작품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양상근이라는 작가 전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앞으로도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지만, 나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되는 양상근의 언어 같은 작품성향은 여전히 그의 뿌리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존재의 실체와 허구를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은유로 다시 바라보며, 외적으로 모호한 형태를 제거하고 철저히 공간의 본질을 추출하고자 기하학적 구조로 재구성하여 다양한 '나'의 안과 밖에 대한 암시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 삶을 향해 나아갈 때, 어느 순간엔가 튀어나오는 케케묵은 당혹감 같은 질문은 망각하고 있던 내적 고통의 소리를 듣게 한다. 처음 들리던 격동의 소리는 그 이후에는 반복되는 감각과 인상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양상근의 전시에서 다시 들리는 그 질문은 '나는 무엇인가?'라고 직접적으로 묻지 않기에 '모른다'며 능숙하게 피해갈 수 없을 거 같다. ■ 박은주

양상근_'다른'나로서 말하다..._점토_가변크기_2008

예술작품이 자유롭기를 바라면서 스스로에게 속하는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위협이다. 그것은 영역의 통합이나 해체라는 모호한 단어로 하나의 예술적 생산의 영역을 질식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Fired Clay Sculpture'는 양상근이라는 작가의 작품 내부로부터 획득된 개념이며, 기존의 도조(ceramic sculpture)陶彫(도자공예(ceramic craft)와 조각(sculpture)을 결합한 용어) 즉 '도자조형'(the plasticarts)이라는 합성된 단어가 갖는 의미의 한계로 인해 시도되었다. 물론 Clay Art라는 상위개념은 여러 작품들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Fired'는 흙(clay)이 가공되지 않은 원재료(basic material)의 상태에서 다양하게 작품에서 활용되는 다른 작업과 구분하기 위함이며, Clay는 오히려 작품의 원재료를 설명한다. Clay는 ceramic, porcelain등이 '도자'로 번역되어 작품을 전통적 도자공예의 연장선에서 접근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Fired라는 단어와 함께 의미로 접근한 것이다. ■  

Vol.20080627g | 양상근展 / YANGSANGGEUN / 梁商根 / sculpture

Gwangju Bienn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