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ny Night

이광준展 / CHAR LEE / 李光準 / photography   2008_0801 ▶ 2008_0814 / 일요일 휴관

이광준_Browny Night #01_잉크젯 프린트_50.8×76.2cm_2006~7

초대일시 / 2008_080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0:00am~03:00pm / 일요일 휴관

스페이스 바바 SPACE VAVA 서울 강남구 신사동 514-1번지 포토피아 5층 Tel. +82.(0)2.745.1644 www.spacevava.net

그날은 온 거리를 군중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던 길에 사온 브라우니(brownies)케익을 한 입 베어 물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짙은 갈색 초콜릿 덩어리처럼 서로 엉켜있는 군중과 건물들, 그것들은 그렇게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빛의 강도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 빛은 그것을 각각의 하나로 분리시켜 놓았다.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어둠으로 시선을 던지는 눈동자들, 그 시선들은 마치 어둠의 표면을 둥근 조약돌로 수없이 문질러 닳고 닳은 표면에서 브라운 색의 광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교차하는 수많은 시선들을 바라보다 문득 한 시선과 마주쳤다. 얼어 붙어버렸다... 그 갈색 어둠 속에서 거미줄처럼 교차되는 시선들에 나의 시선도 자연스레 일부가 되었다. 겹겹이 겹쳐있는 인파의 장벽 저 너머 한 사람, 절대로 날 볼 것 같지 않은 그에게 주문을 걸었다. "Look at me, look at me!" 온 몸에 전류가 뚫고 지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는 내가 부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무심코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광준_Browny Night #02_잉크젯 프린트_50.8×76.2cm_2006~7
이광준_Browny Night #03_잉크젯 프린트_50.8×76.2cm_2006~7

1년 전에 만난 장면, 다시 1년을 기다려 만나다 ● 다시 그 오늘이다. 그 사이 많은 군중들을 찍어 보고, 찾아 다녔지만 그 시선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18번가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 나의 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그날 밤 색깔을 닮은 브라우니 케익을 손에 쥐고 작년 이날 만났던 그 시선들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2006.10.31, 2007.10.31 맨하튼 6애비뉴 18번가에서 ■ 이광준

이광준_Browny Night #04_잉크젯 프린트_50.8×76.2cm_2006~7

이광준의 browny night에 대하여 - 1.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할 때 나는 그의 사람이 된다.' ● 워낙 인간은 세상을 볼 수 없다. 이 간단한 물리적/시-지각적 사실을 깨닫는데 인류는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겨우 근대의 끝자락에 와서야 예술과 과학이 만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나도 그렇다. 태어나 지금까지 늘 내가 세상을 본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내가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반사된 빛이 나를 향해 옴으로써 비로소 눈과 뇌가 인식/지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안지가 그리 오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우주의 중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어린 확신'을 긴 시간 지녀왔기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데카르트의 확신에 찬 존재확인 이후는 그렇다. 내가 있고 나의 사유가 있고 그리하여 세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이성/자아 중심의 세계관은 자연스레 그러한 생각을 머금게 했다. 그러나 세상/자연에 가한 인간의 공격/개발이 되돌아 자연으로부터 억만 배의 보복으로 변환됨을 경험하는 지금 우리의 확신은 거절될 수밖에 없다. 이 처절한 확인의 통로를 거쳐 인간은 비로소 우주의 중심이지도 세상을 능동적으로 볼 수 있는 주체도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선의 동선/흐름'이 가시화된다. 그리고 사진은 이 동선 위에 은가루를 뿌려 시각화하였다. 내가 볼 수 없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지금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 (1-3) 층층이 주변을 둘러싼 다른 사람들의 사이를 뚫고 그녀의 시선이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진에 내가 매혹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모습이거나, 잘 어울리는 붉은 스웨터이거나, 머리 위쪽으로 쪽 지워 묶어 맨 치켜든 머리카락의 독특한 모양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 앞에 비스듬한 간격으로 서 있는 안경 쓴 청년의 아름다운 옆모습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사라져 버린다. 조리개와 거리감이 일구어낸 무관심의 징표다. 그리고 고개를 비틀어 나를 보는 그녀(1-1)에게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의 시선이 소중한 것 역시 아름다운 모습과 붉은색의 털 깃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머리 뒤쪽에서 같은 방향으로 서서 나를 겨냥하고 있는 저 남자의 시선이 겹쳐져 주변과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사진에서 '시선의 관계'란 이처럼 나를 꼭짓점으로 변증의 관계를 형성한다. 삼각의 동선을 그리면서 나와 너만이 아니라 또 다른 시선을 의식하게 하는 것, 그것이다. 그의 시선(1-5)도, 또 다른 그의 시선(1-7)도 이처럼 내가 의지된,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닌 시선의 혼융을 시작하게 한다. ● 작가 이광준은 미국유학시절 이 작업을 하였다. 어느 날 '특정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다갈(多葛)의 색(browny COLOR)이었다. 케이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이 단어는 소통보다는 단절을, 친근함 보다는 불쾌함/성가심을 동시에 뜻한다. 어느 사회거나 색깔은 의지를 나타낸다. 그것이 나의 색깔/color이기에 그렇다. 그러한 색깔의 의지에 이광준이 느낀 감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조용한 그가 미국의 사회에 한편 잘 적응했을 터이나. 수용되지 못하는 한계를 함께 경험했을 터이다. 그것은 결코 유나이티드/United 하지 못한 아메리카/America의 한계였을 것이다. 그의 감성이 초콜릿색으로 전환된, 그래서 달기도 하고 쓰기도한 감정의 이중성이 컬러로 전환된 듯 보인다. 그가 작업한 대상으로의 사람들은 소수자들이며 다 초콜릿이자 브라운이었던 것이다. 유나이티드하지 못한 사회의 결함을 온몸으로 감내하면서도, 동시에 그 삶을 사랑하는 자들의 쓴맛. 너의 시선은 네게 부딪혀 내게로 달려오는 빛인 것이지, 너의 존재가 나에게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느끼며 네가 되는 것은 그 빛에 묻은 너의 전부가 감촉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광준_Browny Night #05_잉크젯 프린트_50.8×76.2cm_2006~7

2. "그녀가 그에게 보낸 시선을 내가 느낄 때 나는 그녀와 그의 사이(Zwichen)가 된다." ● 그렇게 개입(介入)이 시작되는 것, 개입이란 주변에서 중심으로 위치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 공존/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비껴 타인을 향할 때(2-1) 내가 그 두 시선의 접점을 함께 부여잡고 공유하고자 한다면, 나는 공존이 가능하며 타인과 나는 하나가 된다. 사이에 존재하기란 매우 힘겨운 일이기도 하다. 이도 저도 아닌 듯 여겨지기도 하려니와 안주(安住)의 불안이 고스란히 숙제처럼 남아있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동시에 사이가 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너와 그의 사이에 시선을 함께 하며 개입을 함으로써, 의식의 교각을 세울 수 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사이는 공간을 그리고 공간은 사건을 연계한다. 때문에 사이에 존재함이란 종내는 그 사건에 개입하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이쪽과 저쪽을 잇는 작업인 것이다. 양쪽을 공시(共時)적으로 부여잡는 일. 그것은 모순이자 극치다. 우리의 존재가 그렇다. 땅과 하늘을 잇는 사람의 형상은 현실과 이상을 잇거나 단절시키기도 하고, 우주/지구의 둥근 모습은 앞과 뒤를 사이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잇기도 한다. 적어도 세계를 삼차원의 모습으로 이해할 경우는 그렇다. ● 지금 이광준의 사진에서 우리가 취하는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그가 파인더를 향해 눈을 고정하고 어느 대상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대상들은 다시 다른 대상과 시선의 교차를 만들고 있다. (2-4, 2-5, 2-7)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 교차점과 파인더의 눈을 공시적으로 공유하는데 이는 물론 화면 밖에서이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은 화면 안에서 마감되는 사건이 아니라, 화면에서 밖으로 향하는 시선의 연장과 역류를 염두에 두고 '보아/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선의 선(線)을 머리로 그려보면 관자를 한 지점으로 하여 삼각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그려낼 수가 있다. 이러한 점이 이광준의 사진에 커다란 매력일 것이다. 그의 사진은 테두리를 생략한다. 테두리 안과 밖의 경계가 시선의 선으로 연장되어진 바, 뒤집혀진 삼차원의 역공간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광준은 의식적으로 색을 드러내고 그 색에 자신의 생각을 파묻는다. 색과 선이 모더니즘 작가들에게 무한한 반항의 빌미였던 것처럼 어쩌면 그에게도 사진에 대한 애증의 염(念)이 가득할지 모른다. 그가 모더니스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광준_Browny Night #06_잉크젯 프린트_50.8×76.2cm_2006~7

3. "나를 등지고 저쪽을 향한 시선이 내 의식의 공유(共有)를 부른다" ● 공유하는 것, 그것은 옛날 동굴에서 벽에 투영된 거짓을 향해 함께 미혹의 눈길을 겨누었던 것과 같다. 결국은 그 벽에 비친 허무의 그림자가 내 진리를 향한 염원을 속였을지라도. 함께 한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는 일은 인간의 본능일지 모른다. 만일 아니라면 설명하기 곤란한 일이 많다. 수많은 시선들이 한 곳에 집중되는 일은 흔하디흔하다. 적어도 게임처럼 혹은 매체처럼 대중성을 가장한 진부한 소식들은 모두 하나의 시선을 유도한다. 서로 맞대어진 아파트의 구조에서도 시선은 벽을 사이에 두고 설치된 T.V를 향해 마주한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존 방식이다. 하나의 사건에 어께를 나란히 하고 생각/시선을 함께 하는 일로 우리는 공유의 안심을 느낀다. 그 뒤에 카메라를 든 내가 함께 할지라도 말이다. 지금 그 또한 그 쪽을 향해 진지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3-1, 3-2) 내 시선이 그들의 뒤에 가만히 있는 것은 공유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개가 가져오는 흥미의 공유거나 혹은 광기거나. 그러나 대부분 공유는 대화를 거절한다. 같은 소파에 옆으로 앉아 같은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두 사람은 말이 없다. 그저 그곳을 볼 뿐이다. 시선의 공유를 거절하는 일! 그것은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소외효과(Verfremdung Effeckt)라 부른 것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같은 곳을 향해 있으면서도 끝끝내 그 전개된 사건에 함몰되기를 거절하는 것, 그것이 참으로 공유인 것. 그러나 이 공유는 사건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공유하는 일이다. 사건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그래서 공유의 진정성에 의식을 연계하는 일.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내 지점에 내가 서있음을 소외시키는 일이다. 나는 지금 사진을 찍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 이광준이 저 시점(時點)에 가졌던 바로 그 생각! ■ 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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