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까?

박동수展 / painting   2008_0813 ▶ 2008_0905

박동수_줄다리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2×60.6cm_2008

초대일시 / 2008_08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대안공간 충정각 ALTERNATIVE SPACE CHENGJEONGGAK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360-22번지 Tel. +82.(0)2.363.2093 www.chungjeonggak.com

1. 참을 수 밖에 없는 키치의 당당함 ● 1. 언젠가 그가 전시한다고 전화하면 글을 쓰겠노라고 내심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는 평소에 작업실에 붙어사는 작업벌레도 아니고 한때 미술 제도권에서 촉망받던 젊은 유망주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로서 그의 작품을 뼈 속까지 훤히 들여다 봐온 제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언젠가 그의 작품 글에 대한 김치국을 마셨던 까닭은, 그가 현미발모(현시대 미술발전을 위한 모임) 시절에 안양의 어느 시장 바닥 주차장에 적어둔 친절한 인사말을 작품이라고 내놓았을 때부터다. 그렇게 재치있고 친절한 공공미술로 세상을 밝게 해줄 것 같은 미소 풍만하던 청년이 그 후로 '미술인 회의'에서 근무를 하다 예술행정 대학원 진학과 공공미술 큐레이터로 근무하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던지 평일 낮에 얼굴 보기만큼이나 그의 미소는 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갑작스럽게 전시를 한다고 연락이 왔다. ● 순간 나는 긴장했다. 그 날이 너무 일찍 온 것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일 있나? 그러나 경솔한 반응은 금물, 혹 그가 그동안 말없이 해놓은 작품이 있던지 아님 아이디어라도 저장해 뒀겠지. 그게 아니라면 졸속 전시를 당당하게 펼칠 속물 작가로 등극하면서 '스피드와 순발력'이 작가의 생명이라고 썰을 풀려나! 그것도 아니면 '사랑'에 관한 전시라고 하니, 이태리식 레스토랑 벽에 건 그림은 들러리고이번 전시의 메인인 애인을 소개하면서 인기 연예인처럼 기자회견 같은 리얼한 퍼포먼스라도 벌이려는 건지... 내가 이렇듯 남 일을 남일 같이 않게 우려하는 것은 솔직히 글 걱정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 작가로부터 글을 부탁하는 전화가 왔다. '...안들려~라고 말할까 말까'

박동수_안들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08

2. '왜 전화 안 해!', '우리 100년만 사랑해요', '자기야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나쁜 새끼, 미워' ... ● 한 장 한 장 온라인으로 숨가쁘게 날아드는 이미지를 보니 닭살이 소름처럼 돋는다. 뿐만 아니라 닭살로 맞이하던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서서히 중독성과 오기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다음엔 또 어떤 한글이 상형 문자화해서 아크릴 물감(?)을 뒤집어쓰고 사랑을 속삭일까 하고 기다리게 되는 중독성, 그 속에서 연애의 목적이 아닌 수단과 과정을 우리는 지켜보게 된다. 한번은 간접적으로, 한번은 직접적으로, 귀엽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하고 짓궂기도 하고 엉큼하기도 한 이 그림들의 정서적 감은 좀처럼 감 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심리가 아닐까? ● 그렇다. 사랑하면 똑똑한 사람도 바보가 되고 거만한 사람도 유치하게 되는 마술에 걸리고 만다. 바벨탑을 쌓는 거만한 인간에게 신은 '사랑과 연애'라는 콩깍지를 선사했다. 그 점에서 그의 작품은 사랑의 다큐 시리즈라고 할 만큼 솔직하고 리얼하다. 어쩌면 혼자 생각하고 마음먹은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투명하게 중계되는, 영화 속 주인공인 천재 '사토라레'의 스캔들 기록처럼 감상자들은 키치 상형시인에 의해 선택된 언어의 유치찬란함이 전형적인 부르주아 취향의 전유물인 캔버스에 버젓이 자리 잡음에 당혹스러워 하며 동시에 친근해진다. 그 당혹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아, 근데 이게 뭐야! 한여름 날의 납량특집도 촛불 소녀들처럼 발랄하게도 하네.' '서른이 넘은 예술행정가겸 작가라는 이 총각 속에 원더걸스 아님 촛불소녀의 감성이 동거 중이잖아!' 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것도 그림이야? 캔버스가 운다!'

박동수_속타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2cm_2008 박동수_선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3×130cm_2008

솔직히 어릴 때부터 '글로 그림을 그려온 작가'치고 선이 세련되거나 성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작가가 준 정보를 참고하자면, 초딩 때부터 고딩 때까지 시험 남들보다 일찍 보고 종칠 때까지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에 시험지 빈자리에 긁적대던 낙서가 어느 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캔버스와 아크릴 이라는 럭셔리 재료로 쫙~ 뽑아 입고 나타난 정도다. 한글로 그림을 그렸으니 드로잉치고 국적은 있는 셈인데, 미학적으로 심히 불안정한, 혈통을 알 수 없는 잡종 드로잉이다. 춤으로 치면 막춤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그의 그림을 보면 사람들 앞에서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막춤을 당당하고 천연덕스럽게 잘 추는 얼굴 두꺼운 아마추어 댄스를 보는 것 같다. 얌전하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온 세상이 그의 무대 미술인 양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고 펼치는 막춤의 공습에 -『희랍인 조르바』정도면 말을 안 한다- 동행인들은 처음에는 당혹스러워 하다가 어느새 길들여지지 않은 춤꾼의 몸 사위에 술술 넘어가게 되는데, 우리는 그를 제도권에서는 볼 수 없는 관계로 프로가 아닌 고수라 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기법적으로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일관성 없는 선과 거기에 굴하지 않는 당당함이 고수스럽지 않은가!

박동수_너무 슬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6.8cm_2008 박동수_사랑이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08

2. 막춤, 그러나 그 속에 뼈가 있다 ● 관람자들이 그의 고수스런 당당함에 서서히 속아 넘어갈려는 찰나, 냉소적인 필자는 믿음 좋은 관람자들을 위해 도대체 '저 당당함의 출처가 무엇인가'를 밝혀내야만 한다. 춤에 춤 자도 모르거나 춤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 막춤을 춘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춤을 입시 준비부터 대학 4년 동안 전공하고 그 이후에도 춤 관련분야에서 계속 공부했거나 일을 해 온 사람이 독자적인 '막춤'을 춘다는 것은 주목받아 마땅하다. 박동수는 그동안 배운 그림기술은 어디다 써먹고 정작 전시장에는 어린 시절 시험지 귀퉁이에 낙서하던 퇴행적 솜씨를 발휘하는지! 그런 그림을 제도권에 천연덕스럽게 선보이며 와중에 옵션으로 자신감과 관대함까지 구비하는 저 태도의 백은 무엇일까. 바로 이것이 내가 그의 그림이 과시하는 키치함에 대해 참을 수밖에 없는 속사정인데, 알고 보니 설득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 그의 막춤 드로잉을 잘 들여다보자! 이건 한마디로 '숨은 글 찾기'다. 그의 막나가는 조형은 '숨은 그림 찾기'가 아닌 '숨은 글 찾기'라는 유희를 제공한다. 막대사탕을 빨다 그 속에 감추어진 껌을 씹는 보너스 성 재미라고나 할까!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그림은 막춤이 아니다. 더 정확히, 문어처럼 뼈대 없는 막춤이 아니라 '한글'이라는 뼈대 있는 춤으로 명랑시트콤 버전의 상형 문자 춤이자 캘리그램 댄스다. ● 신종 한국산 후기 낙서화? 그런다고 낙서가 미술이 되나? 된다 카더라. 이 질문에 미술사의 낙서 귀재로 꼽히는 바스키아(Jean-Michel Basqiat)가 앞장서고 그의 추종자들인 그래티피 동호회 회원들이 청년작가 박동수의 '신종 한국산 낙서화(Graffitti)'에 대한 필자의 인색한 태도에 온라인 카페에서 줄줄이 리플로 '근조, 작가주의가 우물에 빠진 날'로 응수할 것 같아 필자, 꿈자리가 사납다. 어디 바스키아와 추종자들 뿐이랴! 1983년 뉴욕에서 '후기 낙서화'라는 그룹전을 열었던 톰블리, 프랭크 스텔라, 장 뒤뷔페, 잭슨 폴록 등이 필자의 새벽꿈에 출연해 막춤스런 그림을 당당하게 전시하는 청년 작가 박동수를 'Writer', 'Burner'로 부르지 않던가! 그러니 별로 프로답지 못한 필자로선 다음날 작품의 글을 부탁하는 작가의 전화에 차마 '안들려~' 할 수 없었다.

박동수_왜 전화안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2×60.6cm_2008 박동수_닭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08

동서고금을 통해 서민층이나 슬럼가 아이들이야 동네 벽이 화선지고 캔버스였지만 이 시대 한국의 아이들은 계층을 떠나 학원 버스타고 드라이브 하느라 동네 벽에 낙서할 기회도 시간도 거의 없다. 그러니 학교며 학원이며 시험을 간식 먹듯이 치러대는 한국 아이들에게 환상적인 망중한의 시간은 작가의 경험처럼 시험 치는 날이다. 왜 있지 않은가. 늘 남들보다 시험 일찍 보고 종칠 때까지 엎드려있거나 시험지 빈자리에 낙서하는 친구들, 그 중에 미래의 '신종 한국산 후기 낙서화가' 박동수가 있었다. 대게 그 여백의 시간에 그림에 소질이 없는(?)아이들은 계획표를 짜고 손재주가 있어 좀 긁적인다는 아이들은 알아볼 수 없는 글과 이미지가 뒤죽박죽된 흑연 칠을 한다. 한쪽에서는 머리 굴리고 연필 굴리고 진 땀 빼며 답 고르고 있는데, 같은 공간에서 시험을 잘 봤든 포기했든 지긋지긋한 시험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누리는 청춘의 여유 자적함이여! 그때 흐르는 압도적인 정적은 사교육과 공교육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억압을 해소해주는 명상 음악이며 그 순간 교실은 '시험시간에 시험에 대한 트라우마를 씻어주는 불가사의한 영적 공간'이다. 힙합 댄스에 비유되는 바스키아의 낙서화를 기존의 정서와 그 허구를 폭로하듯 자유롭고 충동적인 불 화산 같은 그림이라고 한다면, 반면에 박동수의 낙서 드로잉은 한국의 입시 제도에 처한 청소년기의 억압을 가볍고 명랑하게 해소해 주는, 바로 그 생산지가 한국인, 신종 신토불이(?) 낙서화인 셈이다. ● 그러니 애초에 그의 그림에서 바스키아가 그린 벽면의 낙서화처럼 폭발적인 미적 쾌감을 기대하는 건 포기해야 한다. 시험지 구석 여백이라 해봐야 그 면적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 속에서 긁적이다 보니 소심해져 미적 쾌감을 기대한다는 건 사치다. 그나마 색감으로 이만큼 가다듬을 수 있는 건 가능한 일이지만. 그러니 바스키아가 한국에서 학교 생활했다면, 자퇴하고 벽에 그림 그리다 경찰서에 몇 번 불려 다녔던지 아니면 박동수처럼 제도권 안에서 차분한 버전으로 이렇게 '참을 수밖에 없는 소심한 키치의 당당함'을 과시하지 않았을까.

박동수_사랑노래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2cm_2008

3.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 청년이 된 작가는 '과연 사랑이 뭐길래 사람들을 웃겼다 울렸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시험지가 아닌 물감 칠한 캔버스에 '사랑'이라고 낙서를 했다. 그 때 지나가던 마그리트가 작가에게 말을 건다. '그럼 바탕 그림이 사랑이 아니라는 말인가?' 작가가 의아해 하는 동안에 마그리뜨는 계속 말을 잇는다. '바탕 그림이 사랑이라면, 당신은 다른 단어를 썼겠지.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지적하기 위해서.' '전 단지 '사랑이 뭔가' 자문하며 낙서를 하는 중인데요.'라며 작가가 입을 열자, 마그리뜨는 '그럼 내 영역이 아니군... '하더니 근처에서 레게뮤직에 맞춰 브레이크 댄스를 시도하는 바스키아를 부른다. '자네는 이게 뭘로 보이나?' 하고 마그리뜨가 숨을 벌떡이는 바스키아에게 묻자, '그냥 그림이죠.' 라고 대답했다. 마그리뜨가 격앙된 목소리로 '그렇다면 자넨 이게 무슨 그림으로 보이나?' 라고 묻자 바스키아 왈, '그게 꼭 뭐여야 되나요? 내겐 그 어떤 글도 음악에서의 음표 같은 거예요.' '음표도 읽지 않나? 음표가 지시하는 대로 사람은 연주를 하니까'라고 마그리뜨가 되받자 '내겐 음표나 그림 속 글이나 형상이나 무늬나 의미 없는 리듬같은 거긴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내 작품에서 리듬은 중요해요. 호흡이자 일종의 생명력이니까요.'라며 바스키아는 랩하듯 중얼중얼대며 마그리트의 질의에 꼬박꼬박 말대답을 한다. 이 대화를 듣던 젊은 작가는 황당했다. '두 분 다 썰이 장난이 아니시네요. 한국어를 아세요?' '..........' 이 대화를 볼 때 마그리뜨는 한국어를 이해하고 있었고, 바스키아는 한글이 '글'이라고 파악해 버렸다. ● 실제로 이 그림은 한국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 엄청난 소통의 차이를 드러낸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희미한 글자는 바스키아 표현대로 음악의 음표 같은 것이지만 한국어를 아는 사람에게 '사랑'은 기호이자 상징이므로 이 그림과 소통하는 데 결정적인 암호로 작동된다. 그림의 윤곽을 벗어 던지고 글의 자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 그림들은 작가가 글로벌한 시대에 굳이 '한글'을 고집함으로써 본의든 아니든 국제적인 시각에서 '소통'에 혼란을 야기하면서 이면에 한글의 미학적 측면을 과시하는 이질적인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이 작품들을 통해 '사랑'은 결국 글이나 그림으로 소통하기에 한계가 있음을 확인해준다. 다시 말하면, 작가가 이렇게 사랑을 노골적으로 써놓아도 '사랑'이라고 알아 볼 사람은 지구상에 몇 퍼센트 안된다. 더구나 '사랑'이라는 한글을 아는 사람조차 '사랑'이라는 글을 보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아크릴 물감과 캔버스요, 붓 자욱이요, 글이요, 그림일 뿐이지. 그래서 마그리뜨 스타일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더 바랄 것도 없다. 늘 미술은 주제와 문제 제기에 그치는 것으로 자족해 왔으니 이제야 말로 청년작가 박동수는 본격적으로 '사랑'이라는 현장으로, 그 감 잡을 수 없는 천차만별의 사랑이라는 미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네? 지금 여행 중이라구요?'

박동수_사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2_2008 박동수_우리 자기라고 부를까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08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주술이다 ● 박동수의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개념적이고 조형적인 측면보다 주술적인 기운이 담겨져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그가 과거에 시도했던 실험 작들을 통해 그의 야망을 추적해보면, '기네스 북 입성'처럼 미술사에 이름을 남길 충격과 새로움에 대한 실험이 아니라 오히려 쉽고 친근한 공공미술이나 통속적인 대중 문화적 속성에 더 끌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만약 그만의 작품 뼈가 '한글'이라면, 유치한 듯 귀엽기까지 한 그의 그림의 살은 '시험장 낙서화'요, 이번 전시의 피부는 '사랑'이며 그림 속 영혼은 미술을 향하기보다 세상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 부드럽게 대화하고 자상하게 돌봐주고 따뜻하게 치유해주는 사회문화적 주술이다. '행복하세요' '부자되세요' ...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가 한 때 주차장 바닥의 글이나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그의 현대판 부적은 실제로 시장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해서 제작했던 것들임을 재차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젊은 작가 박동수가 세계적인 낙서화가, 바스키아는 못될지언정 '예술 행정가 겸 작가로는 별스럽게 잘 어울린다' 라는 인상을 받는다. ● 따라서 그의 캔버스에 그려진 '사랑' 타령은 허술해 보이는 '구애나 프로포즈식 말 걸기'며 훤한 대낮에 '연애질 훔쳐보기'인 동시에 캔버스화가 품위를 포기하고 관람자에게 '숨은 글 찾기'라는 주간지 심심풀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희터이기도 하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추가하자면, 작가는 사람들이 사랑으로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과 사랑으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담긴 다소 유치찬란하고 명랑한 주술을 시도한다. 시장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소박한 꿈과 소망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자 몸으로 체험했던 그의 작업 정신이 관료주의에 찌든 행정가들의 잃어버린 초심에 '사랑'이라는 유치찬란한 햇살을 비쳐주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필자는 젊은 예술 행정가 겸 작가인 박동수가 자신뿐 아니라 사회를 향해 작품을 계속해 나가길 바란다. ■ 이름

Vol.20080803g | 박동수展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