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Day's Journey

오상택_차소림 2인展   2008_0814 ▶ 2008_0910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08_081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리씨갤러리 LEE C GALLERY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240번지 1,2,3층 Tel. +82.(0)2.3210.0467~8 www.leecgallery.com

리씨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업 안에서 삶의 긴 여정과, 삶에 대한 애착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두 작가의 전시를 준비하였습니다. 거대한 구조, 혹은 사회 안에서 겪게 되는 소외나 상실감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매듭을 풀어나가는 두 작가는 다른 성별, 다른 매체, 다른 사고, 다른 색깔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만 같은 방식으로 소통하며 삶의 과정을 그려내는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 오상택은 최근 가장 주목 받는 사진작가입니다. 사진이란 최첨단 매체를 미디엄으로 삼지만 고단한 작업과정과 풍부한 감성을 통해 드라마틱한 삶의 과정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보여줍니다. ● 차소림은 초월적 메시지에 힘겹게 다가가는 자신의 모습을 페르소나인 작은 개미로 표현합니다. 텍스트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바늘땀 혹은 기호 이미지는 작가가 찾아가는 공통코드의 모습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것이며 이를 통해 작가는 삶 안에서의 소통과 부재를 이야기합니다. 젊은 두 작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삶과 꿈에 대해, 그 고단함과 애처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번 전시는 젊은 두 작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삶이라는 긴 여정의 중간 과정이 될 것입니다. ■ 리씨갤러리

오상택_PRS2-001 Jump_컬러인화_100×130cm_2008

본인의 작업은 현대사회에서의 물질적 가치의 비대, 거대한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 소외, 상실감.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느껴지는 삶에의 애착. 이러한 인간 삶의 이중적인 모순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다. 본인이 작업에서 표현하는 대부분의 소재들은 이러한 우리 현대인의 삶의 모습들을 수긍하며 그 삶에 대한 애착을 형상화 하는데 있다. 작업 「PROCESS」는 현대인들의 삶의 과정 안에 묻어있는 그들의 현실적 삶과 그 안에서 파생 될 수밖에 없는 이상에 대한 동경, 자연에 대한 동경을 본인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경험과 직관에 의해 상징화한 것이다. ■ 오상택

오상택_PRS2-002 BAND_컬러인화_138×110cm_2008

"본인의 작업은 현대사회에서의 물질적 가치의 비대, 거대한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 소외, 상실감.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느껴지는 삶에의 애착. 이러한 인간 삶의 이중적인 모순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다. 본인이 작업에서 표현하는 대부분의 소재들은 이러한 우리 현대인의 삶의 모습들을 수긍하며 그 삶에 대한 애착을 형상화하는데 있다. 작업 「PROCESS」는 현대인들의 삶의 과정 안에 묻어있는 그들의 현실적 삶과 그 안에서 파생될 수밖에 없는 이상에 대한 동경, 자연에 대한 동경을 본인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경험과 직관에 의해 상징화한 것이다." ● 일반적으로 21세기 경제, 문화 발전의 정점에 다다른 사회는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과거와는 달리 상호 공유적인 요소를 크게 강요하지 않는다. 즉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개인의 선택이 큰 폭으로 확대되며 덕분에 현실과 다소 유리되거나 때로는 이성적이지 않는 삶의 문화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개인의 독자성과 개성이 현실의 삶에 정제되지 않은 채 이상적이고 감성적인 순수성이 그대로 보존되는 추세는 사회 구성원들의 사적 영역을 보장시키며 우리의 사회를 개인화, 다분화 사회로의 변화시켜간다. 전 지구적 공통체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개인화 현상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그러나 사진작가 오상택은 이러한 개인화 흐름을 향유하며 스스로의 독립된 자아 안에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의 일원으로서 강요되는 회색의 현실과 자신만의 자위적 영역 경계에서 영유하고 있다. 오상택은 자신과 현실 사회와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만의 영역이 보장되지는 개인화, 다분화 사회로의 변화를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이상적 자유를 사회의 구성 안에서 찾으려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적 사회에서의 완전한 독립이나 자유를 망설이고 있다.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의 한계정세를 넘어서기보다는 사회와 어울림을 통한 이상적 자유를, 나 스스로가 아닌 타자에 의해 인정받고 찾아가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상택_PRS-017 Voyage_컬러인화_110×138cm_2007

그의 다양한 작업 스타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배경 속 등장인물로서 자신이 직접 출현한다거나 또는 다수의 주변인들을 등장 시키고 그가 의도하는 인위적 행위들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 행위들은 배경과는 다소 이질적이고 어색한 상황으로 연출되어짐으로서 작품 안에서 다층적 구도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도는 사회조직과 인간 사이의 모순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배경과 등장인물 사이의 상대적 차이를 극소화시키며 사회로부터 자아의 완전 독립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를 사회에 대한 구성원으로서 부각시킨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이상향을 바라보는 인물이나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긴 여정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떠나고자하는 배경 즉 어두운 동굴이나 하얀 빙판, 호수 등 그가 설정한 배경들과 부조화 속에서 기묘한 어울림을 만들어내며 이상향으로 떠나고 싶지만 또한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상황을 너무나도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만들어낸다. 그는 항상 자연이라는 이상적 세계를 자신의 사진 속 배경으로 그려낸다. 그 이상향들은 항상 어려운 노동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며 그가 찾아낸 자연들은 무수히 걷고 헤매는 육체적 어려움의 결과적 산물들이다. 비트 이미지들이 난무하고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보다 쉬운 방법으로 그가 원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그는 그러한 방법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에게 육체적 소모과정은 작업의 일부이며 인내를 통해서 자신만이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로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오상택의 작업 「PROCESS」는 현대인들의 현실적 삶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이상에 대한 동경, 자연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들은 현실에서 파생되어진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소외, 상실감. 허무 이러한 사회의 모순들로부터의 자유는 그가 말하는 삶에의 애착에서부터 찾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 서진석

차소림_Deco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티치_53×45.5cm_2008

"나에게 다가온 글의 이미지 그것은 우리가 찾아가는 공통 코드의 모습이기도 하며 그것은 신의 메시지와도 닮아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종종 눈에 띄는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으며 그것은 대상에 투영되기도 하고 때로는 투사되어 보여 지기도 하였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며 행위를 지속하는 자신의 모습을 작은 개미에 비유하여 글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고는 하였다. 그것은 거대한 메시지와 소통을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추상적인 형태와 구체적인 형상, 복잡성과 단순성 등의 모양으로 한 화면 안에 자리하기도 한다." ● 바벨탑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사방에 흩어져 이처럼 살아가게 되었다고 말하여지기도 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때로는 서로의 소통할 수 없음에 난감해 하기도 하고 의사전달의 소통 이상의 공감을 기대하기도 한다. 텍스트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바늘땀 혹은 기호 이미지는 우리가 찾아가는 공통코드의 모습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나에게 다가오는 글의 이미지는 신의 메시지를 닮아 있었고 메시지의 내용을 찾아가는 나의 모습을 개미에 비유하여 한 화면에 그려나간다. 끊임없는 개미의 움직임은 기호를 쌓기도 하고 옮기기도 하며 또 다른 의미체계를 만들기도 하고 열려있는 문처럼 보여 지는 커다란 텍스트의 이미지로 들어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움직임의 흔적들이 남아 시간을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산처럼 혹은 계단처럼 쌓아지고 흩어지는 기호들은 신의 메시지에 접근을 시도하는 일련의 행위를 의미하지만 때로 그것은 일련의 행위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기도 한다. 화면 위에 분절음처럼 자리하는 기호들은 또 다른 형상을 만들기도 하면서 신의 메시지를 향한 여정을 지속한다. ■ 차소림

차소림_Deco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티치_117×91cm_2008

신의 죽음과 초월성의 소멸 속에서, 그러니까 (시어도어 로작 Theodore Roszac의 표현을 빌자면) 세계의 코카콜라 식민지화, 또는 '과학적 세계관의 밀실 공포증과 온갖 종류의 환원론적 오만'이 범람한 이후, 당연하게도 인간의 영혼은 오갈 곳이 없어졌다. 객관적 과학이 성취한 물질로 가득한 세계는 인간의 영혼이 머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 John Stotte) ● 그 결과 이 시대는 놀라울 정도로 초월성의 회복에 집착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환각을 일으키는 약물과 뉴에이지(new age)의 소위 고차원적 의식이라는 것들이 그 어느 시대보다 널리 퍼져나가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공상과학과 요가, 극단적인 예술의 지류들, 그리고 말콤 머거리지가 유물론자의 유일한 신비라고 부른 섹스 등, 온갖 종류의 수단을 동원해 절박하게 초월성을 갈망하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인 것이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를 따르면, 현대사회에 나타나는 온갖 종류의 신비주의적 경향은 근대의식이 초월성을 억압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초월성을 향한 열망과 모색은 차소림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핵적인 단초다. 기호, 문자, 텍스트들-대부분은 성경으로부터 기인한 것들인-을 추구하고 따르는 과정으로 시각화된다. ● "나에게 다가오는 글의 이미지는 신의 메시지를 닮아있었고, 메시지의 내용을 찾아가는 나의 모습을 개미에 비유하여 한 화면에 그려나간다."

차소림_Decode - firs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티치_117×91cm_2008

차소림은 이미 2002년 예컨대 「creation-code」같은 매력적인 작품을 통해, 에폭시의 여러 레이어 속에서 어렴풋 드러나는 텍스트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의 벽을 뚫고 막 현재에 모습을 드러낸 어떤 통시적인 계시 같아보였다. 작가에게 시간은 하나의 경로로서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의미다. 그것이 역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넘나드는 범우주적 진리, 주어진 하나의 역사적 상황하에서는 결코 인식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초월적 진리가 존재에게 다가오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역사성, 통시성은 바느질을 통해 캔버스에 텍스트를 요철 형태를 남기는 현재의 작업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하나의 계시에서 이웃하는 계시로 연이어지는 이 과정은 작가가 신의 메시지를 향해 지속해 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완성을 향하면서, 그 자체로 완성이기도 한 매우 신비로운 과정이다. 계시의 이 순환적이고 변증적인 과정이 지속되는 동안, 화면에는 의미의 심오성이 피상성을 결정적으로 넘어선-넘어서고 있는- 흔적인 깊고 오목한 함몰들이 만들어진다. 이 심오함의 출구를 중심으로 텍스들의 응집과 산포가 만들어내는 모노크롬의 변주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마치 고대문명기의 두루마리에서 발굴된 텍스트와 흡사한 인상을 준다. 텍스트의 활자에 해당하는 요소는 지퍼의 서로 맞물리는 잇 날들이 수없이 반복된 조밀한 자국들이다. 이 계시의 심오한 함몰들로 인해 차소림의 회화는 3차원의 깊이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 된다. 형식적으로 이 깊은 함몰은 2차원성이라는 고전적인 지평이 무너질 때의 긴장감을 화면에 남긴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기도 한 이 함몰들은 계시의 기호학적 응집일 수도 있고, 심오한 초월성으로 나아가는 출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주변에서 개미로 변신한 작가의 갈망이 그토록 분주해지는 것이리라. ● 작가가 자신을 개미에 비유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초월적인 여정에서 한 인간의 위상이 결코 과장되거나 포장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개미로의 변신을 단순한 문학적 레토릭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이 성실하고 극소한 곤충이야말로 절대 진리를 향한 초월적 여정에서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정당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화면에서 이 개미들은 지나치게 작아, 가까이 다가서기 전까지는 하나의 얼룩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 지나치게 작은 것들은 분명 미물로서, 그들이 살고, 노동하고 이동하는 세계에 대해서조차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이 절대 무지의 고백이야말로 작가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이 광대한 우주 앞에서 견지해야 할 진정한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문화적, 시대적, 지형적 제약 속에서 살 뿐이며, 그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 없다. 하지만 개미들은 그들의 무지 속에서 더욱 열심히 노동한다. 끊임없이 기호들을 옮기거나 축적하면서, 그리고 음미하고 탐닉하면서 운명적으로 그것들을 동반하는 삶에서 분주하게 생을 꾸려나간다. 그러면서, 앞서 말한 계시의 심오한 응집인 함몰들의 주변으로 부단히 모여드는 그것들에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내적 갈망의 방향을 새삼 독해하게 된다. ● 오늘날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범람하는 담론들 안에서 언어는 다만 존재의 한계를 확증하는데 유효한 담론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 같은 종류의 담론들을 따르자면, 존재는 사회와 문명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언어의 철장에 동일하게 갇혀있다. 언어는 우리를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게 하는 체계와 권력의 하수인인 것이다. 반면, 차소림에게 언어와 기호는 너무나도 소중한 계시의 신체이자, 드넓고 심오한 초월의 세계로 나아가는 은혜로운 이정표다. 그의 텍스트는 모든 인간 존재가 도달하고자 하는 공통된 갈망의 기록들이다. 이 게시의 보편성을 제한하지 않기 위해 작가는 한 지역의 구체적인 언어를 택하지 않음으로써 그 문자와 텍스트가 한 지역의 방언과는 다른 것이 되도록 했다. ● 차소림은 우리의 운명적인 제한인 바로 그 언어가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텍스트가 자신으로만 가득 채우는 동안에는 족쇄지만, 자신을 비우는 순간 하나님의 계시를 담는 순결한 용기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향후의 작업들이, 그에게 점점 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낼 초월과 계시로부터의 메시지를 전하는 성격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작가 자신보다 앞서, 벌써부터 그의 다음과 다음다음의 여정에 함께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훨씬 넘어서는 절대로부터 오는 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듣고 싶기 때문이다. ■ 심상용

Vol.20080814b | Long Day's Journey-오상택_차소림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