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리모델링

이지영展 / LEEJIYOUNG / 李芝英 / photography.video   2008_0820 ▶ 2008_0907 / 월요일 휴관

이지영_스님 사진이 있는 거실_디지털 프린트_123×156cm_2008

초대일시 / 2008_08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175_이전 Gallery175_Moved 서울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0)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gallery175

이지영 사진작업에 대한 다소 긴 메모 ● 이지영의 사진들은 재개발지역의 풍경을 찍은 것이다. 사진에서 보이듯 아직은 철거가 진행되지는 않은 상태인 것 같다. 하지만 철거 직전의 풍경치고는 뭔가 이상하다. 프로펠러가 없는 장난감 헬리콥터, 세워진 형광등, 뭔가 이빨이 맞지 않는 주방 가구들... ● 과거 철거지역에서 보아왔던 살벌함이나 처절함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어쩌면 재개발 지역에서 과거 철거민의 슬픔을 찾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감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재개발지역주민들은 합리적인 절차에 의해 적정한 보상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개발을 위해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이제 정부가 아니라 지역주민들이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이긴 하지만 세상이 바뀐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새 것이 들어서기 위해서 옛 것은 물러나야 한다. 더욱이 재개발처럼 싹 지우고 새로 그리는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럼, 이 사진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상함은 철거 직전에 있을 법한 폐기 혹은 방치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데서 오는 것일까? 사실 이 사진들은 재개발지역을 기록하기 위한 객관적 사진은 아니다. 이 사진은 일종의 연출된 사진인데, 작가가 철거 직전 재개발지역에 들어가서 버려지고 부서진 물건들을 잘 정돈한 이후 그 상황을 촬영한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기이한 행동을 해명하기 이전에 개발을 둘러싼 우리 내면 풍경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부연해보자.

이지영_꽃무늬 쿠션이 있는 침실_디지털 프린트_123×156cm_2008

개발과 관련된 우리의 기억은 대부분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경찰과 용역깡패의 폭력, 이에 대항했던 철탑망루, 삭발, 단식, 똥폭탄 등 등. 개발지역의 폭력은 불법이냐 생존권이냐의 문제였다. 철거민들의 비타협적인 투쟁에 의해 과거의 불법은 현재의 합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변화의 정점에는 해당 지역주민들이 있다. 그들은 이제 개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개발의 주체이거나 최소한 동조자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이 종종 들리지만 이 말을 뒤집어 '발전 가능한 단절'로 읽어보면 우리 삶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모든 개발의 명분에는 이렇게 발전의 논리가 있었다. 우리는 발전을 위해 과거의 기억과 인간적 관계들을 단절시켜야만 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잘난 발전의 쥐꼬리만 한 지분을 챙기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단절하고, 바야흐로 냉정한 개인주의자로 거듭나고 있다. 발전을 위한, 개발을 위한 폭력의 실상은 철거민과 공사판을 넘어 우리 내면의 리모델링을 위해 가해진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단절과 파괴의 잔해 앞에서 우리의 기억과 과거의 상실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있을 뿐이다.

이지영_형광등이 서 있는 청년회_디지털 프린트_123×156cm_2008

다시 이지영의 사진을 보자. 재개발지역의 풍경 사진을 통해 상실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이 의도였다면 파괴된 현장의 상황을 더욱 과장되게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흩어진 사체를 수습하고 염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작가의 기이한 행동은 이와는 무관해 보인다. 이 주술적인 퍼포먼스는 무언가 떠나버린 혹은 떠나보낸 것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의 퍼포먼스는 새로운 자본-지향적 개인의 탄생을 맞이하기 위해 과거와 이별을 고하는 애도의 제스쳐인가? 아니면 이러한 애도 자체를 미리 애도함으로써 아직은 상실과 애도의 시간이 아님을 강변하고자 하는 침묵시위인가? 물론 작가의 행위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외관상 서로 상반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라는 동일한 회로 속에서 이 둘은 상호보완적 관계에 놓여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과거 개발을 둘러싼 생존권 투쟁으로 얻어낸 개인의 기본권 획득이란 것이 결국은 현재의 재테크를 위한 논리였다면 우리가 느끼고 있는 상실의 유감이 악어가 흘리는 눈물과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이지영의 기이한 퍼포먼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해석의 참조점을 인간중심에서 조금은 벗어날 필요가 있겠다.

이지영_성경책이 있는 문간방_디지털 프린트_123×156cm_2008

이를테면 물건에 대한 예의? 이를테면 물건에 대한 존중? 물건에 인격을 부여하는 행위는 전근대 사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태도였다. 사람과 물건 간의 이러한 존재론적 관계는 물건에 대한 주술적 태도와 상호전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물건에 대한 기능적 관계를 넘어선 여타의 태도들은 비합리적인 태도로 폄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물건이 차고 넘치는 현재의 관점이 아닌 물건이 귀했던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물건과의 존재론적 관계는 매우 타당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태도의 회복은 과소비를 조장해야만 지탱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나름의 유보로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작가의 태도에서 엿보이는 물건에 대한 존중 또한 이런 과거의 관습에 일정 부분 기대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물건에 대한 과거 회향적 태도를 현재의 자기윤리로써 갱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작가가 제기한 물건에 대한 존재론적 관계의 물음을 좀 더 밀어붙여야 한다. 그리고 그 물음은 자본주의 생산단계 변화와 그 변화의 지반 위에서 확보되어 왔던 개인적 권리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지영_빨간색 스카프가 있는 작은방_디지털 프린트_123×156cm_2008

작가의 기이한 행동이 불러내고 있는 공허함 속으로 들어가 보자. 쌓여있는 테이프가 그렇고, 엠프 없는 스피커가 그렇고, 비어있는 책장이 그렇고, '나의 힘이 되어주신 여호아여!' 라는 외침이 빈 공간 속을 맴돌고 있다. 이 공허함은 단지 사진 속의 물건들이 물건으로서 용도폐기 되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이보다는 자신을 사용해 줄 주인이 없음에서 오는 어떤 박탈감이 더 큰 이유인 것 같다.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기까지 물건의 전 생애는 인간의 편익을 중심으로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물건의 단순한 사용자를 넘어 조물주이며 절대자인 셈이다. 자본회수율을 높이기 위해 더욱 짧게 조정되고 있는 물건의 생애는 이러한 인간의 권능에 완전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물건들은 우리의 권능과 그 향유를 위해 존재하고 있으며, 진열대 위의 물건들은 자신을 사용해 줄 주인을 기다리는 가능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진 속의 물건들은 주인을 박탈당한 채 완전한 무능력과 절대적 수동성에 내던져져 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 헐벗은 불가능성 앞에서 주장하고, 관철하고, 소유하고, 향유하는 우리의 권능이란 무엇인가? ● 개발의 시대를 지나 재개발 시대, 그 발전의 도상에서 우리는 투쟁을 통해 개인적 권리를 쟁취하여 왔다. 하지만 그 권리를 하나씩 확보할 때마다 우리는 익숙했던 과거와 이별을 고해야만 했다. 이것은 우리의 권리가 자본주의의 승인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자본주의적 탐욕 앞에서 영혼의 빗장을 하나씩 열어줄 때마다 우리의 권리는 절대적 권능으로 격상되어 왔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앞에 이지영의 사진이 놓여있다. 사진 속의 물건들은 자신을 불가능성에 내던진 채 우리의 권능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길은 여러 갈래이다.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권능을 포기하고 그동안 단절시켜 왔던 과거로 망명을 떠남으로써 이러한 물음 자체를 무효화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이 헐벗은 물건들이 우리의 권능을 좌절시키고 패배시키기 위해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우리가 권능을 스스로 유보할 때까지 기다리는 있는 것이고, 그 시간을 통해 얻게 될 고양된 존재감 속에서 서로가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있는 것이다. ● 이렇게 희소성과 기능성을 넘어서 물건에 대한 존재론적 관계의 가능성을 묻는 것, 이것이 기이한 퍼포먼스를 통해 작가 스스로가 자문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존재론적 물음을 통해 자기윤리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 이것은 이지영의 기이한 사진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손에 쥐고 있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 고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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