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SLOW DISTANCE

김형관展 / KIMHYUNGGWAN / 金泂官 / painting   2008_0829 ▶ 2008_0916

김형관_Long Slow Distance 0826_캔버스에 유채_145×145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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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8_0829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눈 창덕궁점 GALLERY NOON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98 (와룡동 5-14번지) 1,2층 전시실 Tel. +82.(0)2.747.7277 www.110011.co.kr

재현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그림 ● 어두운 화면 속 희미한 붓 자국들이 빛에 반사되었을 쯤에야 결국 그것이 풍경이라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짙고 깊은 바탕에 미미한 채도의 차(差)로 정착된 붓질의 흔적은 모여서 형상의 윤곽을 이루고, 그 형상은 연상 작용을 자극하여 풍경이 되게끔 하였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 윤곽을 드러내고 숨기는 그림, 요즘 자주 사용되는 렌티큘러와 같은 광학적 장치 없이 작가는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그림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불변의 이미지는 없다. 인간의 시각이 파악해내는 모든 것이 단지 본질의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려진 이미지 또한 찰나처럼 스쳐간 인상과도 같이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행태일 뿐이다. 우리는 한 그림에서 풍경을 보기도 하지만, 보는 위치를 바꿈으로서 화가의 행위로 남겨진 붓질에 주목할 수 있다. 작가 김형관의 그림은 사실과 관념 그리고 구체와 추상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더하여 현대미술의 이분법적 분류가 타당한지 회의하게 만든다...(중략)

김형관_Long Slow Distance 0827_캔버스에 유채_148×163cm_2008

원본이미지와 거리두기 ● 작가가 그린 이미지는 어디서 본 풍경들이다. 하지만 작가도 그것을 눈앞에 두고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원천에 대해서는 솔직하다. 잡지의 사진에서건 아니면 영화에서 따온 한 장면이건 작가는 이미지의 원 주소를 밝혔다. 그러나 그 증언이 그가 그린 그림 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이미지가 작가에게 인상으로 기억되면서, 원 대상과의 관계성은 이미 해체되었다. 또한 인상은 작가가 받아들인 모든 정보와 주관적 감성 등에 뒤섞이면서 변화한다. 바로 여기서 그의 주체적인 이미지 관리능력이 작동한다. 기억은 사실 많은 변수로 조작되거나 해체된다. 바로 그곳에서 작가는 작업의 동기와 원인을 찾고 있는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본래 감지했던 대상과 기억 사이에 놓여있는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특히 시간상의) 거리이다. 화가는 이 거리 사이에 자신의 사유를 개입시킨다. 하나의 기억은 다른 기억 혹은 연상 작용에 의해 다른 차원으로 전이되기도 하고, 구체성을 털어내고 단순한 인상적 기호로 생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현실성이 떨어지는 형상에 변론적인 반론을 붙인다. 그곳에 가보았냐는 질문에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아니요"라고 한다. 그곳은 단지 작가의 구성된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다. 즉, 에베레스트나 남극이나 그가 그린 광활한 풍경은 이상적인 곳, 예컨대 작가가 가고 싶은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 현실과 이상사이의 거리에 놓인 장소에 그림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상(理想)은 물리적인 거리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김형관_Long Slow Distance 0828_캔버스에 유채_148×163cm_2008

이것은 마치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취했을 때 비로소 숭고미가 생겨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멀수록 이상적이며 사실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전에 작가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그렸다. 아마도 그의 자화상에서부터 시작하면 그 거리의 관계를 잘 설정할 수 있겠다. 가장 근접한 대상으로서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그가 선택한 것들은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는 경향을 보였다. 자신 다음에는 모델이나 자신의 작업실과 같은 직접적인 경험이 가능한 테마들로 옮겨갔다. 이제 아주 먼 곳을 그린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보는 (혹은 볼 수 있는) 대상과 그리는 주체 간에 관계가 어떤 로드맵을 지니고 발전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물리적인 거리와 작가에게 감음하는 심리적 거리는 반비례한다. 간접적인 인상이 오히려 작가에게는 더 친밀하고 강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김형관_Long Slow Distance 0829_캔버스에 유채_145×145cm_2008

표면으로부터 드러나는 회화의 깊이 ● 작가의 이미지생산은(너무나) 회화적이다. 그림 속에 생성된 이미지를 살펴보면, 그는 묘법에 치중한 어떤 추상화가보다 더 회화적 행위를 잘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단순한 밑칠이 완성되면, 이 위에 미묘한 차이의 색으로 형상을 그린다. 그러므로 대상을 표현하는 색은 대상의 고유색이 아니라 화면 위에서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구성해내는 것이다. 모노톤에서 약간의 변주만으로 칠해진 형상은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의 회화와 비교할 만하다. 모란디의 회색은 다른 모더니스트들처럼 근본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세잔이 근본적인 형태를 찾으려 했다면 모란디는 근원적인 색에서 찾았다. 모란디가 단색으로 그려낸 사물은 - 대개는 정물화이다 - 그 물리적인 속성을 털어버리고 이미지가 되었으며, 그 이미지는 고유한 것이 되었다. 작가 김형관과 모란디의 유사성은 그런 이미지에 대한 천착에 있지 않을까? 작가는 모방을 위한 고유색을 부정하고, 색 또한 이미지처럼 불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정해진 색 속에서 감각의 날을 세우고, 그것의 미시적인 변화에 주목한다. 그렇게 그의 채색법은 결국 어두운 그림이 되어갔다.

김형관_Long Slow Distance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7
김형관_Long_Slow_Distance_캔버스에 유채_125×250cm_2007

물론 이 희미한 윤곽으로 인식된 풍경은 대상과의 사실적 관계를 형성하기에는 원래부터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 붓질의 효과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은, 그러므로 즉물적 대상 혹은 환영주의의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즉 표면위에서 벌어진 회화적 행위가 앞서 언급한 인상과 결합하여 만든 표면적인 이미지라는 뜻이다. 그림의 층이 얇은 것은 작가의 표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그것은 일종의 '살'이다. 내면이란 결국 표층을 통해 연상되는 환영일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사유를 모더니즘 철학과 연계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오히려 표면으로부터 드러나는 깊이에 - 즉 숨어있는 깊이가 아니라 - 대해 말하고 싶어 하고, 표면이 얇을수록 의미의 층은 깊어진다고 믿는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가 설정한 원리주의적 평면성보다 실재적이고 현실감 있는 대응으로서 색 층의 깊이를 그는 말한다.

김형관_Long_Slow_Distance_캔버스에 유채_191×163cm_2007

끝으로 '길고 느린 거리'는 아무래도 기억의 실마리가 된 대상과 그려진 이미지 사이의 상황적인 설명인 것 같다. 작가는 느슨한 태도를 갖고 이 거리를 점점 더 늘어놓았다. 그 거리는 지금까지 현대미술이론이 이원론적으로 설정한 두 대립항의 거리이기도 하다. 작가는 두 대립항을 연계시키는 대신에 한쪽을 간단히 포기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재에 대한 관념적 이해가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경험론적 표출이다. 그는 이제 그쪽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그림이란 이미지에 상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암묵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므로 원대상에 대한 지시성을 사라졌고, 그 빈자리는 작가의 실제적인 그리기가 채우고 있다. 그러나 언급한 것처럼, 그의 그림은 추상도 구상도 아니다. 그러나 그림은 추상적인 관념성도 충족시키고, 동시에 구상적 형상미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일까? 그의 그리기는 이 두개의 축위에 걸린 팽팽한 줄 위에서 벌어지는 긴장된 균형 잡기처럼 보인다. ■ 김정락

Vol.20080829b | 김형관展 / KIMHYUNGGWAN / 金泂官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