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영展 / KOOEUNYUNG / 具殷英 / painting   2008_0903 ▶ 2008_0909

구은영_목련-Magnolia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97cm_2008

초대일시 / 2008_09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토포하우스 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 Tel. +82.(0)2.734.7555 www.topohaus.com

1. '사물'에서 '사물들'로, 관찰적 지각에서 통찰적 인식으로 ● 구은영의 모티브는 자연이다. 그중에서도 나무고, 가지와 이파리와 꽃잎들이며, 그것들의 숱한 교차와 중첩이다. 가지들 위로 이파리들이, 이파리들 위로 다시 가지가 중첩되기가 반복된다. 그 위로는 다시 꽃잎이, 때론 반쯤 투명한 구름이 얹혀진다. 끊임없는 비정형적 변주가 그 결과로 생성된다. 그럼에도 회화는 여전히 가볍고, 놀라울 정도로 평면성을 간직한다. 나무와 가지, 이파리와 꽃은 모두 윤곽으로만 존재한다. 잎사귀의 파릇한 볼륨감과 그 위에 영롱하게 맺히곤 하는 이슬은 거기 없다. 꽃잎에 감도는 연한 핑크나 퍼플의 미세한 변주도 없다. 사물의 구체성은 기꺼이 누락된다. 어느 것도 2차원의 밋밋한 운명에서 일탈을 꿈꾸지 않는다. 구은영의 회화가 사물과의 감각적인 포촉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는 근래에 들어 더욱 공고해졌다. ● 사물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가 전적으로 누락된다는 점은 구은영의 회화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은영이 사실의 목전에서 서구의 사실주의자들이 취했던 것과 반대쪽의 방향을 취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귀스타브 쿠르베에서 듀안 핸슨에 이르기까지, 사실에 대한 서구사실주의자들의 대체적인 입장은 사물의 곁으로 성큼 다가서서는 그 표면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반면, 구은영의 형식은 사실의 뒤로 몇 걸음-또는 한참- 물러서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 물러섬-후퇴(後退)가 아닌-은 대체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아시아적 감수성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이다. 이 물러섬은 묘사의 양보와 관찰적 지각의 유보를 동반한다. 하지만, 이 양보는 의미 있는 것이며 유보는 창조적이다. 그것은 묘사에 집착하고 관찰적 지각에 안주하는 한,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어떤 진실에 대한 갈망에서 발생하는 화론(畵論)이다. 그러므로 묘사의 생략은 회화적 묘미를 돋우기 위한 단순한 기법적 차원 이상이다. 그것은 탈 묘사가 아니라, 묘사로는 포착할 수 없는 맥락적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다른 묘사라 해야 옳다. '사물'로부터 물러남으로써 '사물들'로 나아가는 것이고, 관찰적 지각을 유보함으로써 통찰적 인식에 한층 다가서는 것이다. 사물 각개의 감각적 표면을 탐닉하는 대신, 그것들의 어우러진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생명의 신비와 마주하는 것이다. 사물의 공존과 상관, 유기적 상호성과 복잡한 얽힘, 즉 관계에 천착되는 '관계의 도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 이로 인해 구은영의 식물원은 복잡하게 얽혀있으면서도 혼란스럽지 않고, 다채롭지만 산만하지 않으며 화사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자연과 생명의 기적(奇籍)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이 식물원은 한 그루의 나무, 한 송이의 꽃이 전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멜로디와 다른 종류의 향기를 전한다. 그 향기는 코끝을 찌르는 짜릿함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 멜로디는 은은한 느슨함에 의해 더 달콤해지는 종류의 것이다. 때로는 맡을 수 없는 향기가 더 내면의 갈망에 답할 수 있다.

구은영_붉은꽃-Red Fiow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30.3×130.3cm_2008
구은영_작약-Peon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97cm_2008

2. 상호적, 또는 생태적 사유 ● 구은영의 회화는 나무와 가지, 나뭇잎의 윤곽이 반복적으로 겹쳐지면서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변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때론 그 위로 다시 커다란 잎이나 꽃의 형태가 겹쳐지고, 그 위에 또 다시 투명한 미디움 재질의 마티에르가 추가되기도 한다. 각각의 이미지는 이웃하거나 겹쳐지는 다른 것들의 개입과 간섭 탓에 그다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나뭇잎의 실루엣 내부로 가지의 실루엣이 통과하고, 꽃의 실루엣에는 복잡하게 얽힌 나뭇잎들의 실루엣이 얼비친다. 꽃은 그 자체인 동시에 전체의 일부다. 나뭇잎은 나뭇잎이면서 하나의 구성적 요인으로 해체된다. 그것들은 그 자체이면서 전체고, 스스로 드러나면서 다른 것으로 연장된다. 어느 하나도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그자체로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꽃은 그것을 둘러싼 구성적 요인들의 연장이고 일부며 그 자체이기도 하다. 배경은 사물 내부까지 침투하고, 이내 사물과 배경의 구분은 해체된다. 그 관계는 '상호적'을 넘어 '삼투적'이다. 부정되어야 할 것은 경계요 구분이다. 이 점은 오래전부터 구은영 회화의 저변이었다. 1986년의 개인전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에게 있어 주제와 배경과의 관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즉, 나의 행동이나 사고의 많은 부분이 의식보다 무의식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처럼 나의 작업에서도 언제나 주제보다 배경 쪽의 관심이 우선이다... 결국 나의 작업과정에서 염두에 두어지는 것은 그려지는 부분이 아니라 그려지지 않는 부분인 것이다." (구은영)

구은영_목련II-MagnoliaII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08

나무와 잎과 꽃이 서로 연결된 하나며, 전체와 부분도 별개가 아니고, 배경과 모티브도 더 이상 둘이 아닌, 이야말로 '자아로부터 빠져나와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생태주의적 사유의 한 시각적 얼개로 적절해 보이지 않는가! 이는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정확하게 꿰고 있었던 진실이다. ● "...고립한 나를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사람은 보편적 정신이 거짓 정신에로 타락한 그 치욕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 부버를 따르면, 나는 '나-너의 관계(Ich und Du)', 상호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버젓한 나가 될 수 있다. 의도건 아니건, 구은영의 회화도 관계의 의미에 깃들어 있는 세찬 기운, 즉 상호적(gegenseitig)인 그것이 꺾여서는 안된다는 언설에 가담하고 있다.

구은영_수련-Water Lil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3×130.3cm_2008
구은영_수련II-Water LilyII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3×130.3cm_2008

3. 심도(深度) ● 구은영의 회화에서 모티브들 간의 구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깊이의 문제다. 하지만, 구은영의 지극히 '평면적인' 회화에서 깊이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가 아닐까? 깊이를 원근법적인 묘사가 이끄는 착시 현상이나 두터운 물감 층으로 가능한 마티에르 정도로만 한정한다면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구은영의 회화가 관여하는 깊이는 착시나 마티에르에 의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구은영의 회화적 중첩은 어떤 물성적인 차원의 깊이감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매우 얇은 물감의 층은 깊이를 형성되기보다는 오히려 취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밑의 층은 그 위로 덮여지는 얇은 물감 층을 뚫고 표면으로 올라오고, 이러한 투과는 다음 층이 구현될 때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때문에 지속적인 중첩에도 불구하고, 구은영의 회화는 여전히 그 심도에 어떤 변화도 없는 종래의 평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은영의 깊이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심도, 누적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쌓여가는 층으로부터 비롯되는 심도를 구축한다. 그 층은 이전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후에 의해 부인되지 않는다. 이 심도는 역설적이 아니라 정설적이며, 구축적이기보다는 누적적이고, 시각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다. 이에 의해 관계적 사유에 역사적 차원이 부가된다. 상호성은 처음과 마지막의 시간적 상호성이기도 한 것이다. 이 은유적인 심도는 공간과 시간,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에서 작동한다. 이는 원근법의 도움이나 물리적 동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누적된 시간의 단계들로 인해 구은영의 회화적 공간은 그토록 많은 움직임을 담아내면서도 깊은 평정을 유지하고, 그토록 많은 경계를 설정하면서도 생태적 사유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 구은영의 회화는 은유적 심도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평면성이라는 회화의 근대적 본성을 견인한다. 자연의 무성한 생명력에 낭만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그것에 내재하는 복잡성과 연대의 신비를 담담하게 스케치해낸다. 이 균형감은 그의 회화가 생태적 정서와 안정감을 배양하는 토양이 되는 데 있어 핵심이다. 감관을 교란하는 과도한 '자극'의 탐닉이나 오락적 교양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색조는 온화하고 따듯하며 그 변주는 시종 부드럽고 완만하다. 어떤 것도 다른 것에 돌출적이거나 극단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유와 담론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각광을 받는 이미지들의 특성과 분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대중문화건 고급예술이건 오늘날 승승장구하는 것은 스팩터클, 게임, 서커스, 오락산업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기분전환의 기제들은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잠깐의 욕구충족과 탐미에 몰입하도록 부추긴다. 이에 부응해 주류를 이루는 동시대미술은 존 번연의 표현을 빌자면 '허영의 시장(Vanity Fair)'에 내다 팔 물건을 만들어대느라 여념이 없다. 지각이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 시대가 다시금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던 소크라테스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아니라 호모 퀴어렌스(Homo quaerens), 즉 '묻고 또 묻는' 동물이다.(조지 스테이너) 구은영의 회화는 이 혼탁한 탐미의 시대를 향해 한 호모 퀴어렌스가 던지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회화를 지탱해 온 미적 지반은 이제껏 우리의 삶을 성숙시켜 온 '검증'된 그것이다. ■ 심상용

Vol.20080830a | 구은영展 / KOOEUNYUNG / 具殷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