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Inside 'I' outside '철암'

이종미展 / LEEJONGMEE / 李鐘美 / installation   2008_0903 ▶︎ 2008_0909

이종미_Trauma inside 'I', outside '철암'_관훈갤러리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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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나'-無 기획2. 이종미

관람시간 /10:00am~06:0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실존적 트라우마와 사회적 트라우마 ● 이종미의 작업의 주제는 「나我 - 무無」이다. 이 주제가 상기시키는 의미는 먼저, 나(혹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를 찾아보니 어디에도 없더라는 것이고, 이와는 반대로 너무나 선명한 나의 실체(혹은 실체감)를 무로 되돌리고 싶다는(나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처럼도 들린다. 이 가운데 작가의 의식이 지향하는 것은 후자보다는 전자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나는 세계(캔버스 혹은 몸)의 표면 위에 내려앉은 먼지 같고, 타자로 오염된 존재의 흔적(한때의 존재를 증언해주는 부재에 각인된 흔적, 혹은 타자들이 대신 써준 텍스트에 딸린 주석) 같으며, 빈 구멍(그 속이 비어 있거나 배후가 뚫려있어서 의미들이 왕래하고 중첩되는 비결정적인 텍스트)이나 틈새(사이존재 즉 존재와 존재 사이)에 머무는 무의 형상 같다. 그렇다면 이는 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보편적 실체가 없다는 것이며, 그 보편적 실체에 대한 의심이 작가의 작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에 대한 자의식은 근대와 후기근대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여겨져 왔다. 근대인이 보기에 세계는 통일된 전제를 갖고 있으며, 그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전망 역시 이에 걸맞은 총체적 인식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세계의 지평도, 주체의 전망도 하나같이 안정된(결정적인) 체계 위에서 상호 작용한다고 본 것이다. 이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이며, 또한 원근법은 그 원리를 그림으로 도해한 것이다(원근법에서의 소실점은 세계의 흔들릴 수 없는 중심으로서의 주체를 암시한다). 반면에 후기근대인에게 있어서 세계는 그저 이질적인 조각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하고 불안정한 집합에 지나지 않으며, 그 세계와 대면하는 주체 역시 파편화돼 있다는 거다. 그 이면에는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주체로부터 세계를 대상화한 연후에야 비로소 지식이 가능해진다고 여긴 서양의 전통적인 인식론에 대한 회의가 놓여있다. 그리고 이런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생산된 지식을 타자와 동일시하는 한편, 주체를 이런 타자에 의해 오염된(점령된) 것으로 본다. 말하자면 주체란 이성과 정신, 도덕과 윤리, 진리와 진실, 관례와 관습(죽은 아버지 즉 기의 없는 기표들)의 이름으로 나에게 내재화된 소위 상위 법률(형이상학?)의 소산인 것이다. 이로써 나는 타자들로부터 건네받은 방법(법률)이 아니고서는 세계를 보거나 듣지도, 판단하거나 예측하지도 못하게 된다. 나는 언제나 타자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타자의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다. 현상학적 에포케는 이처럼 주체의 눈에 덧씌워진 타자의 눈과, 주체의 귀에 덧대어진 타자의 귀를 박탈하고, 이로부터 주체를 구제하려는 기획과 관련이 깊다. 나를 (잠정적으로) 백지 상태나 영도의 지점으로, 기관 없는 신체로 되돌려 놓고는 새로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나에게서 타자의 눈과 귀가 박탈될 때 세상은 불현듯 새롭게 보이고, 낯설게 보이고, 걷잡을 수 없게 보인다. (인위적인) 지식의 체계가 코스모스라면, (지식의 전망을 걷어낸) 세상의 본질은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내가 머물고 있을만한 장소들을 탐색하는 과정을 거쳐 종래에는 나라고 부를 만한 (보편적인) 실체 같은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 이종미의 기획은 이렇듯 주체론과 타자론, 그리고 특히 주체에 대한 근대적이고 후기근대적인 자의식과 관련이 깊다. 나라는 실체는 과연 있는가. 그리고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나의(나라는 실체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을 주제화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종미_보다3 filming 2005_디지털 프린팅_2008
이종미_보다-흔들리다 filming 2005_디지털 프린트_2008

뿔. 이종미의 「뿔」이란 영상작품은 실존적 혹은 존재론적 트라우마가 생성되고 머무는 장소로서의 몸을 탐색하고 있다. 일종의 셀프카메라 내지는 셀프비디오로 범주화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런 연후에 사진을 동영상 화면과 오버랩시켜서 스틸 컷과 동영상과의 경계가 모호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몸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최종화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재구성되고 연출된 (의도적인) 흔적이 엿보인다. 셀프카메라든 셀프비디오든 이는 주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내는데, 자신이 자신을 기록한다는 메타적 상황과 함께 일종의 분열적 자아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즉 진정한 나는 영상 속의 나인가, 아니면 영상 바깥의 나인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영상 속의 나는 나의 오롯한 실체 대신에 재구성되고 연출된 주체의 흔적을 보여줄 따름이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혹은 기록할 수 있다는) 의도와 신념과 강박이 영상 밖의 나를 전전긍긍하게 하고 더 주관적이게 만든다. 주관적이게? 이야말로 주체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주체를 확인해볼 수 있는 곳)은 영상이지 영상 밖이 아니다. 결국 나는 나를 기록하거나 재현하거나 읽을 수가 없다. 다만 부재와 암시와 흔적이라는 불완전언어를 빌려 나를 겨우 추억할 수 있을 뿐이다.

이종미_바라보다-가까이2 filming 2005_디지털 프린트_2008

새벽. 이종미의 「새벽」이란 영상작품은 존재의(존재라는 개념의) 중의적 의미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모든 선명한 경계는 허물어지고, 모든 사물현상은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어법으로 치자면 00같은, 00처럼, 00이면서 동시에 00이기도 한. 화면에 등장하는 파리(?)가 벌 같은가 하면, 단지 파리처럼 보일 뿐인 검은 실루엣 같기도 하고, 부풀려진 망점 같기도 하다. 그 파린지 벌인지 모를 것이 철망 위(안쪽 아니면 바깥쪽인가)에 앉아 있다. 그리고 일련의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숫자 위로 지나가는 초침(아마도 빠른 속도를 가늠해 볼 때 초침일 것이다)이나 1에서 12까지 숫자들이 순서대로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시계 같다. 그리고 초침이나 설핏 보이다마는 가장자리의 테가 아니라면, 엘리베이터의 층 넘버로 읽힐 수도 있겠는데, 사실 그렇게 읽어도 무방할 듯싶다. 또한 화면이 유독 10이라는 숫자 위에 오래 머물면서 이를 강조하는 것도 같다. 혹 10이라는 숫자가 작가에게 무슨 특별한 의미(주체의 흔적?)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똑 떨어지는 숫자에 대한 막연한 관성일 따름인가? 새벽은 정신이 가장 명료해지는 시간이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명징한 정신으로 본 사물현상은 온통 이중적이고 다중적이고 중의적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사물현상이 맞다. 사물현상은 처음부터 이중적이고 다중적이고 중의적이었다. 다만 지식(개념)의 관성이 사물현상의 풍부한 레이어를 억압하고 이를 단순화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물현상의 모든 풍부한 의미는 단순화된 그 의미의 뒤쪽으로 사라져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의미들을 복원하는 일이 예술의 과제로서 주어진다. 묘약이면서 동시에 독약이기도 한 파르마콘은 주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주체도 타자도 없다. 다만 주체 속에 타자가, 타자 속에 주체가 혼입된 상호작용적인 경계, 움직이는 경계가 있을 뿐이다.

이종미_바라보다 2 filming 2005_디지털 프린트_2008

철암. 이종미의 일련의 사진작품들은 일종의 사회적 트라우마가 깃들어 있는 장소인 철암의 정경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트라우마는 흔히 역사특정성과 장소특정성과 맞물린다. 그러니까 역사적 현실이 서려있는 장소, 역사적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장소로부터 사회적 트라우마가 싹튼다. 이러한 역사적 장소 중에서도 특히 한국근현대사를 대변해주는 장소로는 난곡과 달동네 같은 재개발 현장과 재건축현장, 그리고 청계천과 철암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같이 전쟁 이후 경제개발과 정치논리에 의해서 명과 암이 교차하고, 희와 비가 엇갈리는 장소들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찾은 그곳이나, 특히 그곳을 기록하고 재현한 도쿠멘타에서도 여전히 그때처럼 명과 암이 교차하고, 희와 비가 엇갈리는가. 작가가 찍은 사진은 철암의 어떤 레이어를 증언하고 있는가. 70,80년대 당시 경제개발의 동력을 제공했던 철암인가, 아니면 경제개발의 허울 아래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간 무명씨들의 혼령을 기억하고 위무하는 철암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흔한 전원풍경에 비해서 약간 색다르고 이색적인 풍경일 뿐인가. 나는 철암이 부르는 어떤 소리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는가. 그리고 내가 기록한 사진 속에서도 여전히 그 소리가 들리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회의적이다. 사진 속에서 철암은 흔히 철암의 현실로 알려졌던 것들을 뒤로 한 채 그저 조금은 고즈넉하고 쓸쓸하고 낭만적인, 흔한 풍경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써 철암을 소재로 한 작가의 사진작업은 아카이브와 도쿠멘타가 현실의 맨살 그대로를 증언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현실을 사라지게 하는지, 혹은 현실을 신화화하고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은 아닌지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 「뿔」, 「새벽」, 「철암」에서 이종미는 주체를 상처가 남긴 흔적(혹은 상처로서의 흔적) 즉 트라우마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트라우마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탐색하고, 사회적 트라우마를 재확인하기 위해 철암을 찾는다. 이러한 탐색과 모색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끝내 주체에, 엄밀하게는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보편적 실체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있다. 주체에 대한 작가의 의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체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게 만든다. ■ 고충환

이종미_뿔_단채널 영상_capturing 00:01:15_00:02:47_2002 / retouching_2008

무의미는 의미없음도 아니고 의미라는 도구로 채집되지 않는 의미를 비껴가는 흔적 흔적은 '나'와 無가 차이들의 반복으로 지연되는 자리 트라우마의 장소인 몸과 철암에는 아무것도 없다. 본 것들의 더미들-사진더미들( 분절된 시공간 모음) 본 것들의 연결-영상(분절된 시공간 연결 가까이 보다, 멀리 보다, 통하여 바라보다, 흔들리다, 움직이다,----→없다 ■ 이종미

이종미_새벽_단채널 영상_capturing 00:03:12_00:03:37_2003 / retouching_2008

본 전시에서는 주체의 조건이기도 한 '트라우마'를 소재로 과연 그것이 실제 있을까? 아니면 감으로만 인식할 수 있을 따름일까? 그렇다면 그 인식은 합리적인 것인가? 질문해보며 '본다는 것' 에 관한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이를 위하여 사진과 비디오 매체가 도입된다. 나는 사회적 트라우마 장소인 철암을 찾아간다. 나는 그 중에서도 채굴이 아직도(2005년 현재) 진행 중인 저탄장을 중심으로 찍었다. 찍을 당시 카메라라는 매체와 대상간의 관계에서 주체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은 표준렌즈로 조리개를 조이고 찍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반면 영상으로 신체를 담은 작업인 「뿘, 2002」은 카메라 셔터를 미리 맞춰 혼자 찍은 슬라이드 필름들을 두 장씩 겹쳐서 프로젝트로 쏜 다음 그 장면들을 다시 캠코더로 찍은 것이다. 그리고 마치 무슨 사건이 있는 냥, 즉 의미가 발생할 수 있도록 유도해 사진들을 나열하고 편집하였다. 그러나 정작 편집된 이미지에서 발생된 의미는 실제 신체와 사진 간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미지간 생성된 것이다. 트라우마의 장소들을 보지만 정작 트라우마는 보이지 않고 불완전한 지각으로 말미암은 감각의 상황만 시각을 포함한 몸은 맴돌고 있다. ■

Vol.20080903i | 이종미展 / LEEJONGMEE / 李鐘美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