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rief story of a forgotten place

김기태展 / KIMKEETAE / 金岐泰 / painting   2008_1008 ▶︎ 2008_1014

김기태_Unknown Artist-June23rd09_캔버스에 젤라틴 프린트, 아크릴, 유채_145×145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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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100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_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신관 2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빛이 그린 그림, 시간이 만들어준 환영 ● 회화의 존재의미와 관련해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정의로는 단연 재현이랄 수 있다. 사물, 세계, 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빛의 그림이랄 수 있는 사진이 등장하면서 심각하게 재고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세계를 재현하는 몫을 사진에게 넘겨준 회화가 차선책으로 찾아낸 길이 소위 추상으로 대변되는 형식주의 미술이며, 모더니즘 서사가 그 논리를 뒷받침하게 된다. 이처럼 모더니즘 서사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동안 서로 나뉘어져 있던 사진과 회화가 재차 만나지는 지점이 하이포리얼리즘이다. 주지하다시피 하이포리얼리즘은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회화를 지향하면서 기존의 사진과의 차별성을 견지하고자 했는데, 돌이켜보면 이는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가상(혹은 이미지)을 주장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선취하는 것이었다(보드리야르 자신이 이론가이면서, 곧잘 자신의 사진으로 전시도 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그 영향이 한국현대미술의 현 경향성에로 연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수년 내에 이루어진 비중 있는 기획전들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이를테면 곧잘 재현의 논리를 매개로 하여 사진과 회화와의 관계를 다루는 전시행태를 통해 사진 같은 회화 혹은 회화 같은 사진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것이다.

김기태_Unknown Artist-May22nd08_캔버스에 젤라틴 프린트, 아크릴, 유채_72.7×90.9cm_2008

외관상 김기태의 작업은 이렇듯 사진 같은 회화 혹은 회화 같은 사진의 연장선에 있으며, 사진과 화화와의 사이쯤에 위치해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사진의 현재(이를테면 포토샵과 같은 컴퓨터 조작에 의한 사진이나 디지털프린트와 같은 첨단의 사진으로 진화하는)를 추종하기보다는, 사진이 막 태어나던 과거로 자신의 작업을 소급시키는 것 같다. 사진을 직접 찍고, 현상하고, 캔버스에 인화하고,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리는 전 공정에 대한 철저한 수공성을 고집하는 것이다. 이는 사진의 미학이라고 부를 만한 미덕이 현대사진의 첨단적인 면면들(이를테면 이미지 조작과 관련된)보다는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아날로그 사진에 엿보이는 예스러움과 그 예스러움이 암시해주는 어떤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국면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기태_Unknown Artist-Aug 4th08_캔버스에 젤라틴 프린트, 아크릴, 유채_162.2×130.3cm_2008

주지하다시피 사진의 존재의미는 크게 두 가지 갈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존재증명(혹은 자기지시성)과 지표성(인덱스)이 그 하나이며, 사진 자체가 품고 있거나 발하는 특유의 분위기 즉 아우라가 또 다른 한 축이다. 이 중 전자에 대해서는 현실참여와 정치적 실천논리를 지향하는 도큐멘타나 르포르타주 사진에서 그 지배적인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이중적 논리에 의해 뒷받침되는데, 이를테면 한 장의 사진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증거로 보는 사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사진은 곧잘 리얼리티를 가장한 조작된 이미지(그 자체 이미지의 정치학과 맞물리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진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난다. 사진은 현실을 재현하고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조작하기도 한다고 본 것이다. ● 이처럼 사진의 한 축이 현실과 실제에 대한 존재증명에 있다면, 또 다른 한 축은 이보다는 사진 고유의 성질과 본질적 국면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내의 경우, 전자만큼 작가 층이 두텁지는 않은 이 경향성은 사진의 지시성 대신 그 고유의 분위기와 아우라를, 사진의 질감을 향한다. 그리고 김기태의 작업은 이 경향성과 통한다.

김기태_Unknown Artist-Jan 29th08_캔버스에 젤라틴 프린트, 아크릴, 유채_81×211cm_2008

김기태는 사진을 직접 찍고, 현상하고, 캔버스에 인화하고,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린다. 그 과정에서 사진과 회화는 서로 구별되기보다는 하나의 결로 스며들고 삼투된다. 회화와 사진을 날실과 씨실 삼아 긴밀하게 직조해낸 일련의 이미지들이 그 경계를 허물어 불투명하게 한다. 회화가 사진을, 사진이 회화를 서로 견인하고 강화해주는 상호내포적이고 상호간섭적인 어떤 경계를 실현한 것이다. ● 그가 프레임 속에 불러들인 피사체를 보면 도심이 아닌 한적한 시골풍경이며, 그마저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자연 풍경 그대로이다. 혹은 목책이나 묘지 그리고 허름한 촌락처럼 자연에로의 퇴화 과정이 상당할 정도로까지 진행되어져서 사실상 자연과 구별되지 않는 인공의 흔적들이다. 화면에서 흔적은 이런 인공의 부산물만은 아니다. 사람 역시 그 자체로서보다는 오로지 과거와 흔적과 부재의 형태로서만 암시된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존재 대신 부재를 향한다. 과거의 한 순간에 거기에 사람이 있었음을 증명(암시?)하는 것이다.

김기태_Forgotten Garden-April21st08_캔버스에 젤라틴 프린트, 아크릴, 유채_162.2×130.3cm_2008

이처럼 과거시제와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그 이미지들은 실상 사진의 본질적인 국면과도 통한다. 즉 사진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상기시키는 것, 즉 그 이면에 죽음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사체는 사진으로 찍혀지는 순간 존재로부터 부재로 건너가고, 현재시제로부터 과거시제 속으로 편입된다. 사진은 여하한 경우에 있어서도 현재하는 존재를, 현재하는 시간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사진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리고 결코 현존재 그대로를 붙잡아 들일 수는 없다는 사실에의 인정으로부터 사진 고유의 아우라가 생겨난다. 사진은 모든 존재를 부재하게 하고, 시간의 저편으로 덧없이 사라지게 만든다. 해서, 사진은 죽음을 연습하게 해주는 어떤 마술적인 장치인지도 모른다(실제로 어떤 원주민은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는데, 그것은 사진과 함께 영혼이 도둑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런가하면 사진은 현실로부터 비현실로 건너가는(혹은 건너가게 해주는) 어떤 불투명한 경계, 애매한 경계, 흔들리는 경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한 모티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온통 애매하며,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모든 분명한 것은 이데올로기적이며 프로퍼갠더적이고 그 자체 폭력적이기 조차 하다). 모든 피사체가 적당한 어둠 속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이고, 희뿌연 안개의 장막 뒤편에서 안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은 존재를 쉬게 해주고, 죽음은 존재를 승화시켜준다. 모든 시간에 침식된 것들은 쓸쓸하고 우울하고 아름답다. 인간이 문명화되기 전에 어둠이나 죽음 그리고 시간은 모두 신이었다. 그 신들이 문명에 지친 인간들을 치유하고 위무하며 쉬게 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불투명성은 이처럼 신으로부터 발해지는 어둠과 죽음과 쉼의 계기 탓이며, 그 자체 아우라와 동질의 것이다.

김기태_Forgotten Garden-July30th08_캔버스에 젤라틴 프린트, 아크릴, 유채_80.3×116.8cm_2008

낡고 색 바랜 사진을 통해 보는 피사체는 아름답고 쓸쓸하고 슬프다. 그것이 과거시제 속에 편입된 것인 만큼 현재하지 않는 것, 부재하는 것,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없는 것들이 더 절실하게 하고 더 사무치게 한다. 흑백은염사진은 가장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사진인 만큼이나 오랜 경륜의 두께를 느끼게 하고, 오랜 시간의 지층을 감지케 한다. 그 사진은 어떤 사실을 정서로 전이시키고, 실제를 흔적으로 화하게 한다. 사진 속 피사체는 마치 사실과 실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 정서와 흔적을 환기시키기 위해 거기에 그렇게 놓여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작가는 질료적 형태를 부여해 그 흔적을 더 강조하고 강화한다. 낡고 색 바랜 흔적을 보는 것 같은, 잔뜩 습기를 머금은 시간의 지층을 빠져나와 지금도 여전히 얼룩 속에 그 습기를 감추고 있는 것 같은 피사체 위로 위무하듯 시간이 내려앉아 있다. 사진은 빛이 그린 그림이라고도 하지만, 시간이 만들어 준 환영이기도 하다. 사진은 말하자면 실제가 아닌 환영이다. 진짜가 아닌 가짜다. 현실을 판타지로 바꿔놓는 기술인 것이다. ● 작가의 그림(혹은 사진?) 속엔 이처럼 비정형의 얼룩들과 함께 무슨 곰팡이 같기도 하고 죽은 사람 위로 피어오르는 인광 같기도 한, 별자리 같기도 하고 반딧불 같기도 한 불빛들이 불꽃처럼 드리워져 있다. 나무와 중첩된 불빛들이 숲이나 나무의 영혼처럼 보이고, 잊혀진 정원이나 묘지 위로 비처럼 흘러내리는 불빛들이 사자의 혼령처럼 보인다. 현재하는 모든 것들을 잠식하고 사라지게 하기 위해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아득하게 먼 과거로부터 호출된 시간의 사제들 같다.

김기태_Forgotten Garden-Aug24th08_캔버스에 젤라틴 프린트, 아크릴, 유채_80.3×116.8cm_2008

김기태의 작업은 이처럼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허물고,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를 넘나들며, 존재와 부재를 하나의 결로 직조해낸다. 잊혀진 것들,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 그 존재감이나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 아득하고 아련한 것들을 환기시켜주는 그 이미지들은 마치 비물질적 시간에다가 질료와 형태를 부여해준 것 같은, 비가시적 시간을 가시화한 것 같은 어떤 의외의 지점을 열어놓는다. ■ 고충환

Vol.20081005h | 김기태展 / KIMKEETAE / 金岐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