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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빈展 / YIMSANGBIN / 任相彬 / painting   2008_1006 ▶︎ 2008_1019

임상빈展_호기심에 대한 책임감_2008

초대일시_2008_1006_월요일_06:00pm

'태안기름유출사고'에 관한 주관적 보고서

관람시간 / 11:00am~11:00pm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_gallery, curiosity 서울 종로구 부암동 254-5번지 Tel. +82.2.542.7050 www.curiosity.co.kr

드로잉 연작들은 스타일과 행동양식에 관한 시각적 사례들이며, 현대인의 친숙한 모습들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획일화의 이데올로기와 도덕적 위선 그리고 이기주의 등을 노출함으로써 그들의 연극적인 동작들을 유머러스하게 폭로하기 위함이다. ● 1. 찌꺼기와 얼룩은 야만주의를 낳는다. 잘 보이지 않는 공적영역에서 아주 조용히 무례하고 파렴치한 사건이 발생한다. 파동이 작아 사소한 사건으로 묵인될 수밖에 없는 일들, 그래서 가해자(딱히 범죄라고 부르기에는 수위가 너무나 낮은)는 항상 상황을 악용한다. 이들이 저지르는 일들은 타인에 대한 작은 착취와 작은 억압이며 소진되지 않는 것이기에 부조리라는 '찌꺼기'가 생겨난다. 법의 효력이 닿지 않는 곳에 도덕성, 예의범절, 매너가 있다. 법과 이들 사이를 오가는 이율배반적 태도는 통제불능의 상태에 놓여있으며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이익의 추구와 자기보존의 삶에만 연연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하나의 관점을 추론하자면, 사람들은 경제적 가치에 따라 행동할 뿐이지 옳고 그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탈도덕화 경향이다. 내가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제스처들이다. 나는 점잖은 행위들 속에서 발견되는 계산적인 이기주의와 도덕적 무책임이 지금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의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한 그러나 타인에게는 엄격한 실리주의야말로 공적영역을 침범하는 야만주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 2. 응고된 사건은 구역질처럼 넘어온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은밀한 포착이다. 그러나 사건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거리두기의 냉소주의이기 때문에 '무능한 째려봄'이다. 스캐닝은 사건의 표면을 훑기만 할 뿐 침묵으로 마비된다. 사건은 바로 앞에서 일어나지만 끼어들지 못함으로 나는 사건 밖을 배회한다. 나는 사건 현장의 바깥에 존재한다. 단지 일말의 양심만이 사건에 합류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건이 멀어지면 멀어 질수록 일련의 사태에 더욱 더 집중하게 된다. 회피하려는 의식 너머에서 돈키호테 같은 영웅의식이 구역질처럼 넘어온다. 이내 망상에 사로잡혀보지만 순식간에 헛일로 막을 내린다. 오로지 사태를 주시하는 비겁한 눈만 떠돌고 있을 뿐 어느 것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정지된 시간에서처럼 나는 무관심한 화석이 된다. 이런 경험은 상처이고 없어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는다. 그래서 사건은 응고된다. 스캐닝 된 이미지가 쌓이면 쌓일수록 심장 깊숙한 곳에서는 '응고된 사건'들이 종양처럼 커져가면서 심장 박동수를 줄여간다. 도덕적 요구를 담고 있는 평이한 안전지대가 소실점화 되어 간다. ● 3. '자유의 여신상'의 발견은 고무적인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행동패턴은 장막으로 가려져 있다. 이것은 노출되지 않으며 잠재태로 숨겨져 있다. 그런데 과시욕의 심리를 엿보이는 무리가 있다. 교묘한 듯싶지만 눈에 보이는 뻔뻔한 도발이다. 무엇을 표방해야 되는지 알고 있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이다. 점잖떠는 교양은 그래서 거짓말로 속내를 드러낸다. 문제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속아주고 속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유행'이다. 아니 '포퓰리즘(populism)'이다.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일은 매스미디어가 한다.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이미지를 표상하게 하며 다급한 모습으로 등장해 헌금을 강요하는 것 또한 매스미디어가 하는 일이다. 한편에서는 노동착취가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중 세금부과 현상이 당연한 듯 고개 들고 행해진다. 반대하는 목소리는 어디에 있을까. 없다. 이것은 '원죄'이기 때문이다. 강요된 의무, 그러나 자발적인 의무는 선험적으로 심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은 다시 농노로 되돌아간다. 열심히 뛰었지만 제자리걸음이었다. 이 환상의 시나리오를 발견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영화 「화성침공」에서 주인공이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감상에 젖게 한다. 내가 발견한 일, 이것은 '태안기름유출사고'이다. ■ 임상빈

임상빈_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No One Waited for Her_밀랍, 종이에 유채_10.5×29.5cm_2008
임상빈_욕하는 사람들-Scandalmongers_밀랍, 안료, 종이에 유채_10.5×29.5cm_2008

검은 파도..., 가 밀려든다. 거침없는 기세로 넘실대는 파도. 그 격랑의 끝부분은 마치 무수히 많은 악귀의 발톱들이 아우성치는 듯 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니다. 완성될 이미지를 상상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마음 속 한 구석에 꽈리를 튼다. 구체적 사물들과 그것의 상호교차에 의한 상징적 차원의 기호들. 그렇다. 서로 긴밀하게 조우하는 대조와 비유적 암시의 통로로 연결되는 구체성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과연 그것뿐일까? 역시 그렇지 않다. 그것은 변형과 왜곡의 코드로도 작동한다. 굳이 비교한다면 그것은 긴장에서 이완의 관계로 설정이 변경되었다. 그렇다. 그 두 개의 이미지 -선례로 채택된 이미지와 그것을 차용했으나 작가의 임의적 조작이 개입된 이미지- 사이에는 분명 느슨할 뿐 아니라 당면한 위협에 대한 부드럽고 완곡한 서술이 삽입되어 있다. 물론 이 같은 진술은 주어진 자료만으로 가늠해 본 아직 구현되지 않은 이미지에 대한 섣부른 예견일 뿐이다. ● 제시된 이미지는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전례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가츠시카 호쿠사이. 그리고 그의 저 유명한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神奈川沖浪裏』.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재차 탐색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일종의 확인절차인 셈이다. 그리고 그 확인절차를 통해서 마침내 변형된 코드에 대한 사례들이 그 구체성을 보다 더 확연히 드러낸다. 그 구체성을 나열하기에 앞서 전례로 드러난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를 잠시 들여다보기로 하자.

임상빈_합주-A duet_밀랍, 안료, 종이에 유채_10.5×29.5cm_2008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는 극명한 대비에 의해 구현된 도상이다. 화면 좌측에 시선을 압도하듯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는 말 그대로 시각적 압권을 형성한다.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솟구친 바로 그 거대한 파도의 포말이 막 떨어져 내리려는 연장선상에 만년설에 뒤덮인 후지산의 모습이 배치되어 있다. 이 대비적 관계, 곧 화면의 상단 가장 높은 곳까지 솟구쳐 올라간 파도와 그것의 수직적 상승감에 의해 가중된 역동적인 힘, 그리고 그 위압적인 동세 바로 밑에 작은 크기로 묘사된 후지산-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시선이 사라지는 지점에 위치한-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이중적 심리상태로 인도한다. 수직적 관계에서 느껴지는 불안감과 공간의 깊이에 의해 느껴지는 막연한 안도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초연한 듯, 멀리 떨어진 지점에 서 있는 후지산의 풍경은 그저 평온하기만 한 느낌을 전달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미묘한 불안의 심리상태와 유착된다. 그리고 바로 그 앞, 넘실대는 파도의 격랑이 만들어 낸 비가시적 주름 사이로 세 척의 배가 파도 위에 노출되어 있으며 배에 탄 이들은 격한 파고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긴 채 일제히 납작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사정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기 위해 서로를 의지하며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갑판 위에 고정된 기물을 혼신의 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앞에 위치한 배의 선수는 이미 막 떠오르는 파도의 포말이 삼켜버린 상태이며 바로 그 뒤쪽에 위치한 배는 예의 거대한 파도에 의해 곧 집어 삼켜질 듯 위태롭기만 하다. 좌우의 동선으로 연결되는 이 긴박감과 속도감은 수직으로 솟구친 파도의 역동적 힘과 함께 그림 전체를 요동치는 거대한 운동감으로 회전시킨다.

임상빈_기념촬영-A Commemorative photograph_밀랍, 안료, 종이에 유채_10.5×29.5cm_2008

다시 제시된 이미지로 되돌아가자. 거듭 확인하는 바이지만 이는 분명 임상빈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로부터 탈취한 이미지이다. 그런데 임상빈의 이미지엔 원작과 달리 후지산과 세척의 배가 생략되어 있다. 뿐만이 아니라 그는 원래의 화면을 엿가락처럼 길게 가로로 늘여놓았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그림들이 우리가 통상 '걸레받이'라고 일컫는 형태로 제작되고 설치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들이 회화라는 시각예술작품의 지위에 상응하는 위치에 그것이 배치 또는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기능, 그것도 청소 등의 행위로 인해 벽이 훼손되거나 오염될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걸레받이'의 형태로 설치될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하자.) 그런데 반드시 그런 의미와 결합시키기 위한 의도로 이미지의 고의적 변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는 점 또한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당연히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 전달하려 하는 전체적 기획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임상빈은 이 '검은 파도' 그림을 지난겨울 발생한 '태안기름유출사고'와 연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그것에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이름표를 부착했다. 하지만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와 임상빈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의 사이에는 단순히 비교할 수 없는, 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서로 긴밀히 연결된 관계라고 볼 수도 없는 여러 가지 층위의 간극들이 가로놓여 있다. 당연히 가츠시카 호쿠사이와 임상빈이 그렇고, 일본의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가나가와(神奈川)와 우리나라 서해에 위치한 태안이 그렇고, 19세기 초 일본의 시대적 상황과 21세기 초에 당면한 우리의 시대적 상황이 또한 그렇다. 물론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가 임의의 변형과정을 거쳐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가 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간극일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표제어인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엉뚱하게도 일리야 레핀이 그린 동명의 작품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저 이 표제어가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의미대로 단순히 '태안기름유출사고'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던, 즉 아무도 예기치 못한 파국이란 뜻인지, 아님 레핀이 그의 작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이 작업에 연결시키고자 함인지 도무지 작가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임상빈_복수는 나의 것-Sympathy for Mr. Vengeance_미니어처 기성품_2008

어쨌거나 임상빈은 이번 전시를 위해 하나의 단일한 주제를 선택했고 그것은 지난겨울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환경재앙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린 '검은 파도'는 당시 태안 앞바다를 뒤덮었던 기름띠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비유인 셈이다. 우리 모두는 거의 예외 없이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 파국의 소용돌이에 직간접적으로 빨려들었고 그 결과는 연인원 120만 명 이상이 투입된 자원봉사자들의 숫자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생태계의 파괴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재앙에 직면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현지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은 분명 당시 언론에서 다루었던 바대로 세계가 깜짝 놀랄, 민족적 자긍심의 차원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정작 이 사태를 바라보는 임상빈의 태도는 이런 일반적인 관점에서 사뭇 비켜 서 있는 듯 하다. 아니 그냥 비켜서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비아냥거리거나 냉소적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단적으로 그는 '태안기름유출사고'에 전 국민이 보여준 열광적인 '관심'의 틈새에서 그 관심이 저마다의 이기심의 발로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짐짓 진지하고 심각한 태도로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신들의 이해관계라는 접속망을 통해 이 사태와 관계 맺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들의 모습은 임상빈의 그림 속에서 피해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관망자로 나타나기도 하며, 해결사나 조사관으로, 또는 죽은 자연의 상징적 대체물로 나타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장면들이 서로 엇갈리며 미묘한 불일치를 자아낸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결같이 뜻밖의 충돌을 야기하는데 그 뜻밖의 충돌은 도상 자체뿐만 아니라 도상과 그것을 지시하는 표제어와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임상빈展_호기심에 대한 책임감_2008

물론 임상빈이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표제어를 사용함으로써 굳이 비유하지 않아도 그 누구도 '태안기름유출사고'와 같은 대재앙을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앞서 말한 바 있는 이기심에 대한 역설적 표현으로 읽히는 것은 어쩐 일일까? 문명화된 사회에서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만족은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또한 이런 정황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그에 비례하는 잠재적 파탄 또한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문명사회는 '태안기름유출사고'와 유사하거나 그와 관련된 사고들이 언제 어디서든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늘 떠안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보다 확대해서 해석하면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그 밑바닥에 상존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시를 통해서 임상빈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스스로 작성한 텍스트를 통해서 '태안기름유출사고'를 한 편의 드라마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 텍스트의 표제어는 "run a play"이다.) 그 한 편의 드라마 속에서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그것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신의 관조적 태도에 대해 그는 '무능한 째려봄'이라고, '단지 일말의 양심만'이 '합류'된 채 사건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회피하려는 의식'과 '돈키호테 같은 영웅의식' 사이에서 배회할 뿐이라고 중얼거린다.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통렬한 자기고백. 이 같은 그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서는 단연 알레고리적 우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흡입과 소멸, 상호침투에 뒤따르는 명백한 모순이 최근에 보다 더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너무도 투명해서 오히려 비가시적인,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을 관통하는 이 시대의 유일하며 유의미한 기의. 그것을 바라보는 임상빈의 시선에 대해 굳이 비유적으로 접근한다면 이렇다.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에는 시선이 부재한다. 바라보는 자의 위치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의 익숙한, 그러나 너무도 낯선 방문객은 자신의 형형한 눈빛을 단지 역광 속에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

Vol.20081006c | 임상빈展 / IMSANGBIN / 任相彬 / painting